지구적 발전의 길고도 느린 죽음
6화

북저널리즘 인사이드 ; 발전은 서사 위에서 부활한다

알타시아(Altasia), 경제 전문지 《이코노미스트》가 만든 용어다. 대체라는 뜻의 ‘알트 Alt’와 아시아를 합친 말이다. 알타시아는 일종의 해결책으로서 등장했다. 중국을 대체함으로써 리스크를 줄이고, 중국으로부터 방출되던 성장과 발전의 에너지는 그대로 취한다는 게 골자다. 세계의 공장이라 불리는 중국은 어마어마한 원자재를 사들이고, 무한대의 물건을 생산해 왔다. 중국의 엔진은 멈출 것 같지 않았다. 물론 이제는 과거의 이야기다. 알타시아는 정말로 위기의 글로벌을 구해 낼 수 있을까? 아시아를 대체하는 아시아라는 역설, 어쩌면 이 역설은 2000년대 이래 반복돼 왔던 낙관적 서사의 다른 표현일지 모른다.

《지구적 발전의 길고도 느린 죽음》은 2000년대 이후 쏟아져 나왔던 발전이라는 환상과 낙관을 수면 위로 올리며 출발한다. 암울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러나 암울함에서 끝나지는 않는다. 《지구적 발전의 길고도 느린 죽음》은 미래에 대한 불투명한 긍정과 낙관이 아닌, 저개발 국가의 잔혹하고도 적나라한 초상을 직시하자고 제안한다. 전 세계가 그다음의 성장 서사를 상상하고, 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구의 발전이라는 엔진은 영화 〈설국열차〉의 그것처럼 갑자기 멈추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제목이 말하듯, 성장과 발전은 길고도 느리게 죽는다. 《지구적 발전의 길고도 느린 죽음》의 저자 데이비드 옥스와 헨리 윌리엄스는 이 죽음의 원인으로 개발되지 못한 서사를 짚는다. ‘다른’ 서사와 ‘가능한’ 궤적이 사라졌기에 지구적 발전의 엔진은 서서히 가동을 멈추고 있다.

서사의 핵심은 무궁무진한 가능성이다. 사건과 사건을 연결하는 가상의 선은 직선이 될 수도, 돌고 도는 나선형의 형태를 그릴 수도 있다. 선택할 수 있는 다른 형태의 선이 없을 때 서사는 멈추고, 다른 가능성은 소멸된다. 제조업과 산업화를 통한 발전이라는 엔진은 서서히 꺼져 가는데 다음의 서사가 없다. 일시적 구호 행위나 정치적 견제는 서사를 잇기보다는 그저 일시적인 사건을 만드는 데 그친다. 저개발 국가에서 늘어나는 벽에 기댄 젊은이들(하야틴)은 전 지구의 문제가 아닌 불량 국가의 도덕적 해이, 미비한 시스템의 탓으로 치부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위기를 만든 것도, 그 위기의 몫을 감당하는 것도 결국은 전 지구다. 정치적 위기, 생태학적 위기, 인구통계학적 위기를 헤쳐 나갈 서사가 없는 지금, 전 지구는 그 다음의 사건으로 안전하게 도약할 수 없다.

《지구적 발전의 길고도 느린 죽음》은 다른 궤적을 발명해야 하는 전 지구의 책임, 그리고 새로운 서사를 상상하고 이뤄 나가야 하는 시민들의 책임을 말한다. 그리고 이 책임은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일방향적이고 단세포적인 낙관론에서 벗어나는 것에서 출발한다. 지금의 전 세계는 꺼져 가는 엔진 앞에서 몇 가지 단어와 사건만 되뇌인다. 알타시아와 IT의 인도, 기회의 땅 아프리카가 그들이다. 그러나 지구의 미래를 책임지기에 몇 가지 단어, 파편화된 사건들은 무력하다. 종말한 서사는 다른 모습의 하야틴으로, 탕핑족으로, 청년으로 구성된 거대 갱단의 확산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성장 없는 국가들의 초상은 글로벌 전체의 리스크다. 이 리스크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비현실적인 영감에 사로잡힌 신화가 아닌,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그러나 상상력으로 가득 찬 서사다.

김혜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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