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동 평화를 지켜라
완결

미국, 중동 평화를 지켜라

트루먼부터 클린턴까지, 부시부터 바이든까지. 미국의 중동 개입은 피할 수 없지만, 실패할 위험이 크다.

2023년 10월 18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이스라엘을 방문해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와 인사하고 있다. 사진: AP
2023년 10월 18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이스라엘을 방문해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와 인사하고 있다. 사진: AP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중동 문제에 휘말렸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바이든은 버락 오바마 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냈다. 당시 바이든은 오바마의 중동 평화 구상이 출범하자마자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자신이 중동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걸 직감했다. 그래서 바이든은 2021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오바마나 도널드 트럼프와 달리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조정할 특사도 임명하지 않았다.

기대대로 되도록 관리하는 게 아니라 기대 자체를 없애는 게 중요했다. 백악관 잔디밭에서 평화 회의도, 캠프 데이비드 협정도, 조약도 체결되지 않아야 했다. 바이든은 여러모로 전통적인 민주당원이지만, 오바마와 빌 클린턴과 지미 카터의 전략을 따르지 않고 무대를 떠났다. 대신 바이든은 2020년에 트럼프가 주도해 체결된 아브라함 협정[1]을 승계했다. 또한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공식 인정한 트럼프의 논쟁적이고 도발적인 결정을 유지했다. 어느 정도 예정된 일이었다.

그러나 모든 미국 대통령들은 그 전쟁 이후 중동이 피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됐다. ‘축복받은 중재자(peacemaker)’가 되는 데 별 관심이 없던 대통령들도 중동 지역이 때때로 그들의 삶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비극적인 일은 2001년 9월 11일에 일어났다. 클린턴 정부는 임기 내내 평화 이니셔티브를 추진했고, 그 이후에 집권한 조지 W. 부시는 국내 문제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내 부시는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규모의 이슬람 테러에 직면했다.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 국회의사당 같은 미국의 심장부가 공격받은 것이다.

취임 8개월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부시는 오사마 빈 라덴을 수색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대통령 임기를 보내야 했다. 이후 이라크까지 전쟁이 확대됐다. 그 결과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9.11 테러의 기원은 부분적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에 있다. 빈 라덴이 요구한 사항 중 하나가 이스라엘의 종말이었다. 빈 라덴은 2002년 ‘미국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유대인들이 토라[2]에 약속된 대로 팔레스타인에 대한 역사적 권리가 있다는 조작된 거짓말을 반복하는 데 아직 지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웃음과 눈물이 교차한다. 이런 유대인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반유대주의라 공격받는다. 팔레스타인이 흘리는 피는 똑같이 갚아 줘야 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저절로 울지 않고, 여자는 저절로 과부가 되지 않고, 자식은 저절로 고아가 되지 않는다. 이걸 알아야 한다.”
1993년 9월 워싱턴에서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라빈(왼쪽)과 팔레스타인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가 오슬로 평화 협정 체결을 기념하며 악수하고 있다. 가운데는 협정을 중재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다. 사진: AP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포한 직후, 이스라엘을 국가로 사실상 인정했다. 1949년에는 법적으로 승인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 이스라엘과 ‘특별한 관계’를 수립했다. 그러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린든 존슨, 제럴드 포드,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는 이스라엘 문제를 풀 수 없는 문제로 여기고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주된 관심은 항공기 납치 같은 테러를 억제하고, 주기적으로 전쟁과 침략을 벌인 뒤 휴전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1956년 아이젠하워처럼 말이다.

1956년 영국이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기 위해 이집트를 침공하자 미국은 프랑스, 이스라엘과 함께 영국의 철수를 요구하며 재정적으로 압박했다. 1974년 리처드 닉슨은 임기 말로 접어들고 있었다. 닉슨은 스캔들로 인기가 떨어지자 1973년 4차 중동 전쟁을 종식해 행정부 성공의 발판으로 삼으려고 했다. 당시 국무장관이던 헨리 키신저의 선구적인 ‘셔틀 외교’로 전쟁은 끝났지만, 닉슨과 키신저는 평화를 구축할 수 없었다. 익숙한 문제 때문이었다. 아랍 국가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는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스라엘은 테러로 이스라엘을 파괴하겠다고 공언한 PLO와 관계를 맺지 않으려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시리아는 아주 완고한 반미 국가였다. 1974년 닉슨은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를 방문했다. 현 시리아 대통령의 아버지이자 당시 대통령이었던 하페즈 알아사드와 거북한 회담을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알아사드 대통령이 내게 여덟 살 된 아들 이야기를 해줬다. 그 이야기로 이번 회담을 요약할 수 있다. 그 소년은 우리의 공항 도착 행사를 텔레비전으로 봤다. 그날 밤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자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닉슨이 그 사람 맞죠? 아버지가 몇 년 동안 우리에게 얘기했던 사람이요. 시온주의자들과 우리의 적들을 완전히 통제하는 사악한 사람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사람을 환영하고 악수를 할 수 있어요?’ 그러자 알아사드가 미소를 지으며 ‘그건 모든 국민이 물어볼 질문이며, 그렇기에 우리는 매우 신중한 속도로 움직여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중동 외교의 또 다른 특징인 긍정적인 사적 대화와 공개적인 비난 사이의 부조화, 그리고 제삼자를 통해 비밀리에 진행되는 ’막후 채널(back channels)‘이 필수적인 존재로 성장한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해 준다.
1978년 9월 캠프 데이비드에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가운데)이 지켜보는 가운데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왼쪽)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가 악수하고 있다. 사진: AP
중동 개입은 실패할 위험이 크고, 표가 되지 않는다. 미국 전역과 의회, 어디에나 있는 강력한 로비 세력이 문제를 제기하고 비판할 준비가 되어 있는 탓에 대통령의 재선 가도에 타격을 줄 수 있다.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에는 수많은 영예와 평화상이 걸려 있지만, 선거에서 얻을 수 있는 보상은 거의 없다. 그렇다 보니 평화 중재는 특정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첫째 조건이자 가장 중요한 조건은 과감한 결정을 내리고자 하는 지도자가 적어도 어느 한쪽에는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탄탄한 국가 기반, 협상을 달성할 수 있는 신뢰성, 평화에 대한 신념, 협상 파트너들과의 개인적인 친밀감이 필요하다.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PLO의 야세르 아라파트,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 그리고 처음에는 중재자 역할에 회의적이었던 두 명의 뛰어난 이스라엘 총리 메나헴 베긴과 이츠하크 라빈이 평화를 이끌어 낸 인물로 꼽힌다.

1979년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카터의 중재로 백악관에서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2000년 만에 이뤄진 일이다. 1977년 사다트를 처음 만난 카터는 안도감을 느끼고 이렇게 기록했다.

“PLO 지도자들은 두 가지 사항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는 것. 팔레스타인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는 것. 그러던 중 1977년 4월 4일, 중동 정세에 한 줄기 빛이 비쳤다. 그날 나는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을 처음 만났다. 그는 역사를 바꿀 것이었고, 나는 그를 다른 어떤 지도자보다 존경하게 될 것이었다.”

바이든이나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공무 중에 그런 선구자를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물론 나중에 사다트는 암살당했다. 라빈 역시 팔레스타인 자치와 이스라엘의 존재에 대해 인정한 원칙적 합의인 오슬로 협정 직후에 암살당했다. 용기와 정치력은 중동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트럼프는 브로커라기보다 이스라엘의 대리인이었다. 그래서 트럼프의 평화 중재는 성질이 약간 달랐다. 그러나 아브라함 협정의 성공은 또 다른 중요한 교훈을 제시한다. 국가 대 국가의 조약 체결이 다자 간 틀 구축보다 덜 어렵다는 것이다. 대통령, 총리, 샤이크(sheikh), 국왕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효과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스라엘이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팔레스타인은 아랍의 연대를 기대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지렛대가 대부분 사라졌다. 공식적인 인정, 정상화된 외교 관계, 대사 교환과 교역은 이스라엘이 한때 소중히 여겼던 것이었고, 따라서 팔레스타인 정착촌 확대를 위한 지렛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양국의 네트워크를 고려할 때 더 이상은 아니다. 이스라엘은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이웃 국가들과 더 많은 조약을 체결할 수 있고, 이는 핵심적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부분적인 평화는 평화가 아니다. 이 지역에서 반세기 전 사다트가 보여 준 비전과 조급함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바이든의 관점에서 보자면 적당한 인도주의적 거래를 넘어 평화 프로세스를 재개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마스와 헤즈볼라는 PLO와 파타(Fatah)가 그랬던 것처럼 진화하지 않을 것이며, 포위당한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수반 마흐무드 압바스는 아라파트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약속도 할 수 없는 처지다. 그래서 늘 그랬듯 팔레스타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압델 파타 엘시시 이집트 대통령, 그리고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도 별다른 영감을 주지 못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바이든 역시 임기가 끝나가는 지금 단계에서 중동 문제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에 많은 보상이 있을 것 같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1993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클린턴이 했던 이 말을 다시 볼 가능성이 거의 없다.

“이제 진보를 위한 노력이 결실을 맺게 될 것이다. 앞으로 열릴 수많은 교차점 중 첫 번째 교차점인 이곳에 여러분 땅의 경이로움을 공유하기 위해 지구 곳곳의 사람들이 올 것이다. 사막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자원, 바다에서 채취하는 강물, 소금에서 분리해 밭을 비옥하게 만드는 물이 있다. 고대 노예들이 끌을 들고 돌을 깎아야 했던 이곳에서 코란의 말씀처럼 땅은 흔들리고 부풀어 올라 생명을 낳을 것이다.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사막은 기뻐하고 꽃을 피울 것이다.”
 
[1]
미국의 중재로 이스라엘이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모로코 등 아랍권 국가와 체결한 평화 협약이다.
[2]
구약 성서의 첫 다섯 편이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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