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을 보장하지 않는 UN 안보리

2023년 11월 13일, explained

중동과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곳에 UN은 없다.

NOW THIS

두 개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UN은 어디에도 없다. 11월 11일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에 사우디, 이란, 튀르키예 등 이슬람 국가 지도자들이 모였다. 이들은 합동 정상 회담을 열고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공격을 비판하며 즉각적인 휴전을 촉구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의 국제법 위반을 막지 못하는 UN 안전보장이사회를 비판했다.

WHY NOW

미국 중심의 일극 체제가 깨지고 다극 체제가 시작됐다. 미국의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세계 각지에서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 국제 연합인 UN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 그런데 UN의 존재감은 1945년 창설 이래 가장 작다. 분쟁 지역에서 UN이 보이지 않는다.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 이사국이 휘두르는 거부권 때문이다. 거부권을 거부할 때다.

Permanent 5

UN은 세계 최대의 국제기구다. 193개국이 가입해 있다. UN의 핵심은 안전보장이사회, 줄여서 안보리에 있다. 말 그대로 회원국의 안전을 보장하는 이사회다. UN 회원국은 안보리의 결정을 수락하고 이행할 의무가 있다. 안보리는 임기 제한이 없는 5개의 상임 이사국과 2년 임기로 선출되는 비상임 이사국으로 구성된다. 안보리를 움직이는 건 5개의 상임 이사국(P5)이다. P5는 어떤 결의안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 거부권을 사용해 사실상 국제 사회의 모든 문제를 결정한다.

이스라엘은 나의 편

국제 사회를 대변해 거부권을 행사하면 다행이지만, 실제로는 자국 이익을 위해 쓰인다. 10월 18일 미국 뉴욕 UN 본부에서 안보리 회의가 열렸다. 중동 전쟁이 의제였다. 의장국인 브라질이 결의안을 냈다. 가자 지구에 구호품을 제공할 수 있도록 교전을 잠시 멈추라는 내용이었다. 이런 인도주의적인 결의안이 부결됐다. 결의안이 채택되려면 안보리 15개 이사국 중 9개국 이상이 찬성하고, P5 중 어느 한 곳도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아야 한다. 이 결의안에 12개 이사국이 찬성했지만, 미국이 거부권을 행사했다. 결의안에 이스라엘의 자위권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이유였다.

셀프 거부권

지난해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이튿날인 2월 25일 UN 안보리는 긴급회의를 열고 러시아의 즉각적인 철군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냈다. 그런데 P5 중 한 곳이자 전쟁 당사자인 러시아가 셀프 거부권을 행사해 무산됐다. 다음 달인 3월 UN 총회에서 전체 회원국이 모여 러시아의 침공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지만, 총회 결의안은 안보리 결의안과 달리 법적 구속력이 없다. 외교적, 윤리적으로 압박할 뿐이다.

안보리라는 고인 물

UN은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5년 10월에 설립됐다. United Nations이라는 말 자체가 2차 대전의 승전국 모임인 연합국을 의미한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이 P5가 됐고, 80년 가까이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UN 헌장에 따르면 안보리는 세계 평화가 위협받을 때 모든 UN 회원국을 대신해 행동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크라이나와 중동에서 벌어지는 전쟁에서 P5는 국제법적 의무를 다하지 않고 있다. 자국 이익을 최우선하고 있다. 그렇다고 P5를 교체할 수도, 거부권을 없앨 수도 없다. 안건이 올라와도 그둘 중 하나가 거부권을 행사하면 무산된다.

지금 안보리를 새로 만든다면

지금 UN은 1945년 처칠과 루스벨트와 스탈린이 얄타 회담에서 만든 구조에서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80년 전 거버넌스로 국제 사회를 움직이고 있다. 지금 안보리 상임 이사국을 새로 꾸린다면 어떤 모습일까. 우선 영국과 프랑스는 입지가 위태롭다. 누가 봐도 지금 유럽의 최강국은 독일이다. 경제 규모나 인구로 봤을 때 일본, 인도, 브라질도 자격이 있다. 아프리카와 남미, 중동을 대표하는 국가도 들어가야 한다. 비상임 이사국도 현재 10개국보다 늘려야 한다. UN이 설립됐을 때 회원국은 51개국이었다. 이후 탈식민지화와 다민족 국가의 해체로 회원국 수가 4배(193개국) 늘었다.

느린 변화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없는 건 아니다. 2005년 당시 UN 사무총장이던 코피 아난은 안보리 회원국을 15개에서 24개로 늘리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더 많이 할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상임 이사국에 일본, 독일, 인도, 브라질, 남아공을 추가하자고 제안했다. 중국과 러시아의 안보리 내 영향력을 축소하려는 취지다. 그러나 현상이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 국제 정치의 역학은 한번 확립되면 여간해서는 변하지 않는다. 지금의 UN 안보리가 탄생한 것도 2차 대전 이후였다. 우크라이나와 중동의 전쟁은 충분히 끔찍하지만, 2차 대전처럼 세계 정치의 역학을 바꿀 정도는 아니다.

약해지는 UN

그러는 사이 UN은 점차 힘을 잃고 있다. 국제 평화 유지라는 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을 수수방관하고 있다. P5가 저마다의 이해관계와 셈법으로 거부권을 남용하면서 역설적으로 거부권이 희소성을 잃고 유명무실해지고 있다. 이제 국제 사회는 UN에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국가 간 문제를 UN이 해결해 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그런 문제를 G7, G20, BRICS 같은 곳으로 가져가고 있다.

IT MATTERS

우리나라는 올해 6월 회원국 3분의 2 이상의 지지를 얻어 안보리 비상임 이사국으로 선출됐다. 내년 1월부터 2년간 비상임 이사국으로 활동한다. 국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계기이자 외교적 쾌거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안보리의 현실을 고려할 때 세계 평화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2013년 사우디는 안보리 비상임 의석 제안을 받고도 거절했다. 안보리가 지금처럼 운영되는 한 세계 평화와 안보 유지에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P5가 자국 이익을 보호하면서 안보리의 정당성이 하락했고, UN에 대한 신뢰도 무너지고 있다. 거부권을 폐지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역시나 거부권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다. 현실적인 개선 방향은 거부권 사용을 제한하는 것이다. 프랑스와 영국은 냉전 종식 이후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또한 프랑스는 대규모 잔학 행위가 벌어질 때에는 거부권을 행사하지 말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한국이 안보리 비상임 이사국에 선출되자 국내 주요 언론이 이런 전망을 내놨다. 앞으로 한미일 북핵 공조가 쉬워지고,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의 재건 논의에 참여할 수 있고, UN 조달 시장에 한국 기업이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두 틀리지 않은 얘기다. 그러나 한국은 이제 세계 경제 규모 10위권의 나라다. UN 분담금도 세계 9위다. 안보리 멤버로서 우리가 국제 사회를 대표해 가장 우선할 일은 안보리 개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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