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 인플레이션의 역설

2023년 11월 22일, explained

더 많은 이가 A를 받는데, 더 많은 이가 불행한 사회다.

서울대학교 정문 광장 야경. 사진: 서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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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연말 치러질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선거에 단독 출마한 선거운동본부가 교육 공약 중 하나로 ‘학점 포기 제도’를 내걸었다. C+ 이하의 성적을 받았는데 재수강이 가능한 강의가 개설되지 않거나 대체 과목이 없는 경우 연한 내 최대 6학점을 포기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C+ 이하의 학점은 삭제할 수 있으므로 평균 학점을 올릴 수 있다. 학점 인플레이션을 가속화할 것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WHY NOW

A+ 학점이 당연한 시대를 목전에 두고 있다. 이런 종류의 ‘스펙 인플레이션’에는 금리의 역할을 하는 자정 작용이 없다. 더 높은 스펙을 가진 이가 선택받는 시대에서 스펙 인플레이션은 알면서도 피할 수 없는 당연한 것으로 다져졌다. 공고한 인플레이션은 역설을 만든다. 더 많은 이가 A를 받는데, 이들의 불만과 어려움은 가중된다. 이 역설의 영향력은 점차 커질 것이다.

코로나 학번의 졸업

학점 인플레이션, 본격적인 시작은 팬데믹이었다. 갑작스레 시작된 비대면 수업 체제가 혼란을 불러 왔다. 대면 수업을 기반으로 이뤄지던 평가와 시험 시스템이 흔들리자 대학들은 발 빠르게 절대 평가로 평가 방식을 바꾸기 시작했다. 서울 주요 11개 대학의 A학점 비중은 2019년 43.8퍼센트에서 2020년 61.5퍼센트로 올랐다. 수도권 대학들이 높은 학점을 부여하기 시작하자 지방대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한국의 대학 대부분이 학점 맞기 좋은 대학이 되어 갔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2020년, 4년제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이 졸업을 앞두고 있다. 취업 시장, 대학원 입시판에 본격적으로 학점 인플레이션이 들이닥치기 시작한다.

꿀강의와 빌넣

모든 인플레이션이 그랬듯, 전조 현상은 있었다. 특히 상위권 대학의 문과 계열 학생들의 학점 인플레는 2010년대부터 꾸준히 지적받아 왔다. 2013년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에서 학점 A를 받은 학생의 비중은 58.9퍼센트였다. 공대는 42.6퍼센트, 의과대학은 37.5퍼센트에 불과했다. A의 가치가 하락하자 학생들은 예민해졌다. 미국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2000년대 이후 학점 인플레가 가속화한 미국 뉴욕대학교에서는 한 저명한 노교수가 “학점을 낮게 준다”는 이유로 학생의 반발에 부딪혀 해고당하기도 했다. 한국의 학생들은 소위 성적도 잘 주고, 학습량도 많지 않은 ‘꿀강의’를 찾아 배회하기 시작했다. 이 욕망은 ‘매크로’를 활용할 정도로 진심이 된 수강 신청 티켓팅과 교수에게 애원해 자리를 얻어 내는 ‘빌넣’ 문화를 만들었다.

강의 평가와 에브리타임

이런 학생들의 호오와 새로운 대학 문화는 시간 강사를 중심으로 강의가 이뤄지는 현재 대학교의 구조와 맞물렸다. 2023년 4년제 사립 대학의 강사 수는 2019년에 비해 20.6퍼센트 증가했다. 강사법 시행 이후, 법의 적용을 피할 수 있는 다른 형태의 비정규 교원을 채용하는 일도 늘었다. 내년의 임용 여부가 불안정하니 학생들로부터 선택받는 강의를 만들어야만 한다. 폐강되지 않도록 ‘꿀강의’라는 소문을 내야 하고, 좋은 학점을 주면서 학생들의 호의를 사는 편이 유리하다. 학내 익명 커뮤니티인 ‘에브리타임’을 타고 강사와 수업의 평판이 퍼져 나간다. 한 국립대학의 강사 임용 규정에 따르면 재임용 심사 평가에 강의 평가를 포함한 교육 활동의 항목 비중은 80퍼센트를 차지했다. A를 받는 학생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출발선

인플레이션은 A의 가치를 낮춘다. 낮은 가치는 취업과 진학을 위해서라면 무조건 충족해야 하는, 당연한 출발선이 되기 쉽다. 대학 진학이 대표적인 예다. 교육통계연보에 따르면 1991년의 대학 진학률은 33.2퍼센트였다. 1990년대 대학 정원이 본격 확대되기 시작하며 대학 진학률은 당연한 것의 자리에 놓이기 시작했다. 2001년에는 최초로 70퍼센트를 넘어섰고, 2022년의 대학 진학률은 73.3퍼센트에 달한다. 2020년대 이후의 평균 출발선은 높은 학점이다.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모든 학생이 수능을 준비했던 것처럼 모든 대학생이 높은 학점을 받아 비로소 출발하기 위해 공부한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학점을 받지 못한 학생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출발선에 서지조차 못 한다.

쉬는 청년

출발선이 멀어지니 출발조차 못 한 채 탈락하는 이들이 늘어난다. 지난 11월 15일 발표된 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일도, 구직 활동도 하지 않는 ‘쉬는 청년’의 규모가 41만 4000명을 기록했다. 전체 청년 인구의 4.9퍼센트다. 전통적으로 쉬는 청년은 20대 후반, 고졸 이하의 남성이 많았다. 올해는 조금 달랐다. 20대 초반, 대졸 이상의 여성 비중이 상대적으로 커졌다. 전문가들은 청년층 상당수가 자신의 “눈높이에 맞는 일자리를 찾지 못해 쉬는 것”이라 지적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 일자리와 노동 환경의 격차로 인해 좋은 직장을 얻지 못한 청년들이 아예 노동 시장 바깥으로 밀려나는 것이다.

점수만을 위한 점수

출발할 자격을 얻기 위해 걸어왔던 트랙을 다시 한 바퀴 도는 청년도 등장했다. 지난 11월 16일,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른 졸업생은 전체 응시생의 35.3퍼센트다. 1994학년도 수능 도입 이래 세 번째로 높았다. 한 청년은 인터뷰를 통해 처우가 더 나은 회사로 가기 위해 “수능을 다시 볼까 고민 중”이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학점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 이른바 ‘학점 세탁’을 위해 졸업 이후 학점은행제 학교에 다시 입학하는 것이 일종의 노하우로 통용된다. 편입, 대졸자 전형, 대학원 입학을 위해서는 성적 관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몇몇 대학생은 A를 받지 못할 바에야 D를 받는다. 재수강 기회를 얻기 위해서다.

1만 3000명의 로스쿨

지난 6월, 국민의힘은 청년정책네트워크 특위를 통해 대학별 학부 성적 평균(GPA) 환산식 개선안 마련을 위한 회의를 열기도 했다. GPA는 대학별 학점의 만점이 다른 것을 고려해 학교 간 비교가 가능하도록 환산한 점수를 말한다. 문제는 각 대학의 수식에 따라 계산 방법이 달라지는 탓에, 같은 점수를 받아도 환산 점수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로스쿨 입시에서 잡음이 크다. 올해 로스쿨 입학을 위해 법학적성시험에 응시한 학생은 1만 5647명이었다. 그중 2000여 명만이 로스쿨 입학 자격을 얻는다. 1만 3000명이 학점으로 인해, 적성 시험 점수로 인해 탈락의 고배를 마신다. 0.1점을 얻기 위해 학생들은 재수강을 하고, 수능을 다시 보고, 사교육으로 향한다.

IT MATTERS

높은 학점은 성실하다는 증거가 되지 않지만, 낮은 학점은 불성실의 확실한 증거가 된다. A가 넘치는 평가 구조 아래에서는 장기적으로 학부 성적 자체가 무력화할 가능성이 크다. 하나라도 놓치면 탈락자가 되는 시대는 패배감을 양산할 수밖에 없다. 설령 완벽한 학벌에 학점을, 심지어는 완벽한 ‘플러스 알파’를 갖춘 이라도, 패배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점차 더 많은 청년 세대가 그저 출발선에 ‘서기 위해서’ 시간을 쏟을 것이다. 장기적으로 사회적 손실과 비효율은 심화할 수밖에 없다. 풍선은 학점 바깥으로도 부푼다. 대기업은 이미 인재를 솎아 내기 위해 다자 면접, 장기간 인턴 전형을 고려 중이다. 역설이다. 더 많은 이들이 A를 받는데 오히려 쌓아야 할 스펙도, 박탈감도 더 늘어난다.
김혜림 에디터
#explained #사회 #교육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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