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키신저, 1923-2023

2023년 12월 1일, explained

헨리 키신저가 세상을 떠났다. 한 시대가 끝났다.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오른쪽)과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1973년 6월 26일 나토 회담이 열리는 벨기에 브뤼셀로 향하는 에어포스원에서 대화하고 있다. 사진: Bettmann,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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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11월 29일 미국 코네티컷 자택에서 10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키신저는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 외교 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핑퐁 외교로 닉슨과 마오쩌둥의 정상 회담을 성사시켰고, 중국을 지렛대 삼아 소련을 견제하고 핵 군축 협상을 성공시켰다. 그는 오직 미국의 이익을 위해 복무했다. 민주주의와 인권은 그다음 가치였다.

WHY NOW

헨리 키신저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설계자였다. 세계는 미국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키신저는 셔틀 외교를 창안하고, 냉철한 현실 정치 개념을 주도했다. 민주주의와 인권보다는 미국의 이익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미국을 지지하고 미국에 이익이라면 독재 정권과도 손을 잡았다. 남미의 반미 감정을 부채질한 것도 그였다. 그런 키신저가 2023년 11월 29일 별세했다. 한 시대가 끝났다.

정치 현실주의

헨리 키신저만큼 찬사와 비난이 교차하는 외교관은 드물다. 미국 역사상 가장 막강한 권한을 휘둘렀던 국무장관인 키신저는 이념보다 현실을 중시했다. 그는 말했다. “미국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오직 국익만이 있을 뿐이다.” 키신저는 미국에 도움이 된다면 좌파든 우파든 가리지 않았다. 독재 정권과도 손을 잡았다. 반미 정권을 전복하기 위해서라면 쿠데타 지원도 꺼리지 않았다.

미국 시민

키신저는 1923년 독일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1938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미국 시민으로서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전쟁이 끝난 뒤 하버드대학교에 입학해 정치학을 공부했다. 학부 졸업 논문이 383페이지에 달했는데, 이후 하버드에선 논문 길이 제한이 생겼다. 하버드에서 석사와 박사 과정을 마치고 국제정치학 교수로 재직했다.

공직 생활

키신저는 1969년부터 1977년까지 리처드 닉슨 대통령, 제럴드 포드 대통령과 함께 일했다. 이 기간 그는 국가 안보 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지냈다. 공직 생활을 마친 뒤에도 미국 대통령에게 외교적 자문을 했다. 케네디부터 바이든까지 미국 역대 대통령의 4분의 1이 넘는 12명에게 영향을 미쳤다. 1982년에는 국제 컨설팅 회사 ‘키신저 어소시에이츠’를 설립하고 다국적 기업의 자문 역할을 맡았다.

중국

키신저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을 활용했다. 키신저는 1971년 베이징에서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와 만났다. 그리고 이듬해 닉슨 대통령의 역사적인 중국 방문을 주선했다. 미국과 중국이 화해하면서 냉전 시대의 역학이 바뀌었다. 소련은 미·중 파트너십을 경계했고, 이로 인해 미국은 소련과의 외교에서 돌파구를 찾을 수 있었다.

소련

키신저는 소련을 대화로 끌어들여 양국 간 최초로 핵 군축 조약을 성사시켰다. 당초 소련은 핵무기 제한에 소극적이었지만, 닉슨의 중국 방문 이후 태도가 달라졌다. 닉슨의 방중 두 달 후인 1972년 5월,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닉슨은 전략 무기 제한 협정(SALT) 1차 조약에 서명한다. 데탕트(détente)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베트남

같은 시기 미국은 베트남전에서 발을 빼려 하고 있었다. 이길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질 수도 없는 무의미한 전쟁에서 키신저는 북베트남과 협상을 시작한다. 그러면서도 북베트남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중립국이던 캄보디아를 폭격했다. 최소 5만 명의 민간인이 죽었다. 당시 키신저는 “날거나 움직이는 모든 것”을 공격하라고 했다. 어쨌거나 협상은 타결돼 미군은 철수한다. 이 공로로 키신저는 197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다.

칠레

키신저는 작은 국가를 체스 말처럼 취급했다. 남미 국가들이 대표적이다. 1970년 칠레에선 사회주의자 살바도르 아옌데가 대통령에 당선된다. 미국은 쿠데타를 지원했는데, 이 작전을 주도한 사람이 키신저였다. 결국 칠레에는 피노체트 독재 정권이 들어서고, 17년간 철권통치를 하게 된다. 키신저는 똑같은 일을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 볼리비아, 브라질에서 수행한다.

IT MATTERS
 
키신저의 외교는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논란이 있을 것이다. 중국의 개방을 이끌었고, 소련과 핵 군축에 합의했고, 아랍과 이스라엘의 갈등을 조율하는 등 큰 성과를 남긴 건 분명하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을 캄보디아로 확산해 결국 '킬링필드'의 원인이 되게 했고, 칠레에선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를 지지한 것은 가혹한 평가를 받는다. 키신저는 미국 외교관 중에서 이름이 가장 많이 알려진 사람이다. 20세기 미국 외교가 그랬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제 그 시대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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