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지각 변동
완결

페미니즘 지각 변동

페미니스트 다중의 탄생


미혼 대신 비혼, 자궁(子宮) 대신 포궁(胞宮), 경력단절녀 대신 임신·육아 사회적 해고 대상자. 밀레니얼이라는 새로운 세대의 페미니스트들은 성차별적인 언어를 대체하는 페미니즘의 언어를 새롭게 개발해 사용하고 있다. 시급한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을 빠른 속도로 공유하고 확산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리얼돌 수입 판매 허가 판결이 내려졌을 때는 자발적으로 이 판결의 부당함을 트위터나 다음 카페,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을 통해 알린 후, 정부의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리얼돌 수입 판매의 전면 금지를 위한 국민 청원을 제기하고, 이를 SNS에 활발히 공유하며 청원을 독려하는 방식으로 사회적 쟁점을 만들어 냈다. 온라인 공간에서 현안으로 부상한 여성 의제들을 논쟁 사안으로 발전시킨 후, 적극적으로 담론 형성을 주도하는 방식이다. 이들은 매우 빠른 속도로 여성 의제와 관련된 지식을 학습하고 공유한다. 탈코르셋 운동의 경우 페미니스트 다중이 탈코르셋의 정의, 지향점, 오해들에 대한 답변, 실천 방안 등을 빠르게 학습하고 공유했다. 탈코르셋 운동, 여성 소비 총파업, 리얼돌 전면 금지 시위, 디지털 성폭력 반대 시위 등 현재 한국 페미니즘의 의제 생성은 페미니스트 다중에 의해 선도되고 있다.

2015년 2월의 #나는_페미니스트입니다 트위터 해시태그 선언과 메갈리아의 탄생 이후, 페미니즘은 점점 많은 이들의 참여와 관심을 끌어들이면서 사회적, 정치적 감수성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와 함께 페미니즘의 지형도 변동하고 있다. 기존의 페미니즘이 극소수의 활동가들과 연구자 그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면, 현재 한국 페미니즘은 활동가와 연구가, 그리고 페미니스트 다중으로 개편되고 있다. 다중(multitude)은 대중(mass)과 다르다. 대중이 집단성을 가진 획일적 무리라면, 다중은 체제에 수렴되지 않으며 통치 단위로 쉽게 환원할 수 없는, 정치적 행위 구성력을 가진 이들이다.[1] 페미니스트 다중은 일방적으로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수동적인 수용자나 무지몽매한 대중이 아니라, 스스로 활동 방식을 개발하고, 정치적 쟁점을 만들어 가는 이들이다.

페미니스트 다중은 기존의 활동가나 연구가 그룹으로 유입되기도 하지만, 기존의 활동가 양성 시스템에 부합하지 않는 새로운 형태로 활동하기도 한다. 디지털 성폭력에 대항하는 DSO 팀이나 한국 사이버 성폭력 대응 센터, 서울이나 지방의 비혼 여성 네트워크 등이 그 사례다. 이러한 신생 페미니스트 단체들은 기존의 여성 단체로 들어가는 대신, 가장 중요한 여성 의제를 단일하게 설정한 후 구체적인 대응 방식과 실천 전략을 직접 기획하고 실행한다. 이를 통해 페미니즘 활동 생태계는 풍부해지고 있다.

새로운 페미니스트들은 기존의 연구자 양성 시스템과는 다른 방식으로 담론과 지식을 생산한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인터넷상에서 담론의 공간을 확보한 후, 리얼돌, 대리모, 낙태죄 폐지 등의 현안을 뒷받침하는 국외 저서나 논문, 해외 사례 등을 직접 번역하여 공유하는 것이다. 논의를 심화시키기 위해 오프라인 전문 세미나 팀을 조직해 쟁점이 되는 논쟁들에 대한 외국 논문을 발제하는 모임, 페미니스트 영화 보기 모임을 조직하기도 한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페미니스트 다중은 지금까지 극소수의 활동가와 연구자들에 의해 독점적으로 생산되어 왔던 페미니즘 의제와 운동에 새로운 변화의 에너지를 불어넣고 있다. 다시 말해, 페미니즘이 전문가가 생산하는 이론적 지식이 아니라, 다중의 실천 방식으로 재편된 셈이다.

한국의 페미니스트 다중은 전 세계적 동향인 페미니즘의 제4 물결(the fourth-wave moment)[2]과 궤를 같이한다. 제4 물결 페미니즘은 인터넷을 정치적 투쟁과 논의의 공간으로 급격히 전환시킨다는 특징을 띤다. 일상이라는 미시 정치(micro politics)의 영역과 소셜 네트워크, 인터넷 등의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한 시민 기술(civic technology)이 결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시민 기술은 정치적 영역을 개선해 나가기 위한 여러 장치를 말한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다음 여초 카페 등을 중심으로 한 온라인 페미니즘은 가장 사적이고 미시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던 것을 가장 정치적인 현안으로 바꾼다는 점, 기존 정치 시스템의 남성 중심성과 연령주의, 업적주의 등을 강력히 비판하고 개선해 가고 있다는 점에서 미시 정치와 시민 기술의 조합물로 볼 수 있다.

제4 물결에서 페미니즘은 전문가 집단이라는 특화된 공급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생산되고 수직적, 위계적으로 유통되지 않는다. 수용자 계층으로 여겨졌던 페미니스트 다중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페미니즘 이슈의 생산자이자 운동의 조직자가 됨으로써 쌍방향성과 소통성, 수평성이 강화되었다. 이를 통해 페미니즘은 기존의 연구자나 활동가 그룹의 전문적인 영역으로 남지 않고, 일상의 시공간에 만연한 성차별주의에 대항하는 생존 기술이자 저항 기술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재 한국의 페미니즘은 기술과 형식 측면에서는 제4 물결 페미니즘이지만 정치적 의제의 내용 면에서는 제1 물결과 제2 물결[3]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양상을 띤다. 최근 페미니즘이 국민 청원 등을 통해 요구하고 있는 여성과 남성 간의 동일 임금, 동일 노동 요구와 여성 의무 할당제 도입 등은 여성의 공적 영역 진출과 제도적 개선책에 중점을 두는 제1 물결의 연장선상에 있는 의제다. 한편 탈코르셋 운동과 비혼, 비출산, 비연애, 비섹스를 지향하는 4B 운동은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라고 여기는 제2 물결 페미니즘의 특징을 보인다. 이처럼 현재 한국의 페미니즘에는 여러 세대 페미니즘의 의제와 기술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페미니즘은 이제 새로운 시대적 감각으로 부상했다. 한국 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페미니스트들은 스스로를 ‘지옥에서 온 페미니스트’, ‘헬페미니스트(Hell Feminist)’로 지칭한다. ‘헬페미(헬페미니스트의 약어)’들은 10대부터 20, 30대 여성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온라인과 오프라인 공간의 초연결성으로 인해 분초 단위로 여성 혐오 콘텐츠가 생산되고 놀이로 소비되는 상황에 노출되어 있었다. 매일 새롭게 등장하는 ‘~녀’라는 여성 혐오의 언어와 남성 역차별 담론 앞에서 설득의 언어는 무력했다. 설득이 실패한 지점에서 미러링이라는 반격의 언어가 개발되었다. 남성 중심적이었던 온라인 공간을 여성들이 자신의 것으로 가져온 것이다.

한국 사회의 일상적인 유머 코드, 상식과 통념, 전통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여성 혐오에 대항하기 위한 저항 기술로서 페미니즘을 체화한 새로운 세대는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이자 유희이기도 한 전투 기술을 직접 만들어 여성 혐오와 싸우고 있다. 이들은 처음으로 낙태죄 폐지 운동을 오프라인 시위로 조직한 페미니스트들이기도 하다. 이전의 영페미니스트 세대가 호주제를 폐지했다면 헬페미니스트 세대는 낙태죄 폐지를 이루어 내겠다고 선언했고, 실제로 낙태죄 헌법 불합치 판결을 이끌어 냈다. 헬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을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학문이나 전문화된 운동의 영역이 아닌, 일상을 바꾸는 저항 실천으로 이해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실행하고 확산시키고 있다.

헬페미는 1990년대 말부터 2000년 초중반까지 활동했던 영페미 세대와 구분된다. 영페미 세대에게 페미니즘은 진보적 사상의 하나로 대학 내 운동권 여성들을 중심으로 학습되던 이론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성폭력 특별법 제정과 호주제 폐지, 안티 미스코리아, 부모 성 같이 쓰기 운동 등을 실천하기도 했다. 영페미 세대 다수는 학계에 진출하거나 여성 활동가가 되어 이론가와 활동가라는 페미니즘의 중심 그룹을 구성했다. 반면 헬페미 세대는 이론가와 활동가뿐 아니라, 페미니스트 다중이 여성 의제를 제시하고 주도한다.

 

지금, 페미니즘의 대립각


2015년 이후부터 급속도로 대중화된 페미니즘의 세기는 페미니즘의 두 갈래를 만들었다. 2015년 이전까지만 해도, 페미니스트는 누구도 자처하지 않는 낙인의 이름이었다. 성공한 여성 CEO도, 여성 정치가도 자신이 페미니스트가 아님을 적극적으로 해명해야 했다. 이런 시기를 지나, 지금은 많은 여성들이 페미니스트임을 선언하고, 누구나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를 자처하는 시대가 되었다. 페미니스트 다중이 나타나면서 여러 논쟁도 생겨났다. 일상 속에서 자신이 실천하고 있는 페미니즘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 페미니즘 운동의 목표는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면서 페미니즘 내에서도 다양한 입장이 첨예하게 충돌하기에 이른 것이다.

현재 한국 페미니즘 진영은 크게 래디컬 페미니즘과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으로 나누어져 있다. 래디컬 페미니즘은 여성 의제의 시급성과 중요성을 강조하고,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한 강력한 비판론이자 여성 해방 운동으로 페미니즘을 정의한다.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은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즉 모든 차별들에 대항하는 총체적 해방론이자 포괄적 인권 운동으로 페미니즘을 정의한다.

두 갈래의 페미니즘은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다. 이러한 대립각은 인신공격이나 사적 다툼의 지점이 아니라, 페미니즘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새롭게 제시해 주는 전회(轉回)의 지점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페미니즘 진영 간의 갈등이 발생하는 원인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갈등과 대립이 발생하게 된 것은 두 진영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의 정의, 운동 주체, 사회의 불평등과 부조리가 발생하는 주요 원인, 연대에 대한 관점과 연대의 최소 조건 등이 다르기 때문이다. 래디컬 페미니즘과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은 지금, 여기의 한국 페미니즘의 지형 안에서 변용되고 재정의된 용어라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한국의 래디컬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을 여성 해방 운동으로 정의 내리며 이 사회의 부조리와 차별의 근본 원인을 여성과 남성 간의 불평등 구조로 분석하고 있다. 운동의 주체는 성차별이라는 구조적 폭력에 대항하는 여성들로 설정하며, 연대의 대상은 다양한 사회적 억압들(학력, 피부색, 성 지향, 장애 등)에 가로놓인 여성들로 둔다. 그리고 연대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여성 혐오적 요소에 대한 성찰과 개선 및 변화에 대한 의지를 지닌 이들로 규정하고 있다.

반면,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을 모든 차별에 대항하는 총체적 해방 운동, 포괄적 차별 반대 운동으로 확장한다. 이로써 운동 주체도 차별에 반대하는 모든 이들, 즉 여성은 물론 남성 성 소수자, 트랜스젠더, 장애인, 동물권자, 환경론자, 평화 운동가 등으로 확장된다.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이 진단하는 모순 구조의 주요 원인에는 모든 이가 차별받는 소수자라는 차별 확장론과 모든 차별은 연결되어 있다는 관점이 전제되어 있다. 따라서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에서 연대의 대상은 모든 차별받는 이들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페미니즘 역시 퀴어 혐오와 트랜스 혐오를 하지 않는 이들이어야 한다는 연대의 최소 조건을 설정한다. 포스트모던 페미니즘도 모든 연대에 열려 있는 입장이 아닌 셈이다. 이러한 차이 속에서 두 진영은 갈등을 거듭하고 있다. 페미니즘 대립각들이 끓어 올린 갈등의 지점들은 지금껏 제대로 제기되어 본 적 없었던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사유의 도전을 요청하고 있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의 오류들


이제는 모두가 자신이 페미니스트임을 선언한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하는 페미니즘을 가짜이자 허위인 것으로 선고하고 있다. 나의 페미니즘이 올바르고 진짜이며, 너의 페미니즘은 혐오와 분란, 가짜라고 주장하는 논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는 페미니즘이 시대적 감각으로 떠올랐다는 신호이지만, 페미니즘의 개념마저 남성 중심, 엘리트 중심, 기성세대 중심으로 개편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많은 여성들이 어디에서나 페미니즘 의제를 화두로 삼고, 자신의 일상 곳곳을 페미니즘 프리즘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의 미시 정치는 남성들의 엄청난 백래시(backlash)에 부딪힌다. 여전히 여성들은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부당 해고나 신변의 위협에 노출되기도 한다.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는 점점 정교해지고 있다. 페미니즘이라는 기표마저 남성들이 재전유해 올바른 페미니즘과 올바르지 못한 페미니즘, 진짜 페미니즘과 가짜 페미니즘으로 양분한 후, 페미니스트들에게 전자에 속함을 끊임없이 입증할 것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백래시의 흐름은 기계적인 중립을 강조하면서 페미니즘을 누구도 불편하게 하거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으로 등치시킨다. 소수자가 착함, 배려, 희생, 평화 등의 덕목을 가질 때에만 진정한 페미니즘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수자에게만 적용되는 이처럼 엄격한 도덕률은 소수자들이 지배 질서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막고, 이들을 사회에 순응하고 편입되는 존재로 축소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점, 즉 ‘진정한 페미니즘’이 체제 순응적이라는 점을 비판하는 순간, 그 입장은 남성 혐오이자 혐오 세력으로 단정되고 만다.

페미니즘의 위상이 올라간 것처럼 보이지만, 페미니즘의 관점으로 기존 권력 체계의 치부를 드러내고 지금껏 제대로 제기되지 못했던 지점들을 지적하는 순간 분란을 일으키는 혐오주의자로 몰리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누구의 귀청도 아프게 하지 않는 것, 상냥하면서 모두를 배려하는 입장이 페미니즘이라고 오인되고 있다. 여기에는 페미니즘 역시 남성의 지배가 가능한 영역으로 남겨 두려는 의도가 전제되어 있다. 이는 남성 중심 사회가 위협적이거나 과격하지 않다고 인정한, 올바름의 문법에 머무르는 것만이 페미니즘의 영역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백래시는 안티 페미니즘이라는 선명한 얼굴이 아니라, 가장 페미니즘적인 염려의 얼굴로 다가오고 있다.

페미니즘은 도덕적으로 우월하고 숭고한 것이어야 한다는 페미니즘 도덕론,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제기되는 온갖 염려와 힐난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는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의 오류로부터 산출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의 첫 번째 오류는 여성과 남성이 겪는 억압을 동질화한다는 점이다. 남성 중심적인 질서 아래, 여성과 남성은 억압받는 강도도 다를 뿐만 아니라, 가부장제에 종속된 양태와 정도도 같지 않다. 그런데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은 가부장제 내에서 위계적으로 차등 분배된 억압과 종속으로 인한 여성과 남성 간의 차별은 은폐한 채, 마치 모두가 동등한 억압을 겪는 것처럼 동질화해 버린다. 여성과 남성이 모두 가부장제 아래 고통받는 자가 됨으로써 불평등한 성별 계급제의 현실이 지워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남성이 갖는 특권은 특정한 남성 개인들이 이익을 보는 개별적인 현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남성이라는 성별을 가진 이들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지배 계급의 정체성을 나눠 가지면서 특권의 구조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성과 남성 모두 가부장제로 고통받고 있다는 시각은 이러한 구조를 간과하게 만든다. 남성이 가부장제에서 억압당하고 있다는 근거로 주로 제시되는 것은 맨박스(manbox)[4]다. 맨박스는 규범적인 남성성을 강요하고 강자와 승자로서의 남성 문화에 편입시키는 장치다. 남성 역시 가부장제 안에서 ‘남자는 울면 안 돼’, ‘남자는 성공해야지’, ‘남자라면 강해야 해’, ‘남자는 돈을 많이 벌어야 해’ 등의 강요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맨박스가 남성들에 대한 억압의 기제로만 기능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맨박스는 남성들의 특권 구조를 구성하는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가부장제하에서 남성들이 장착하게 되는 맨박스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을 억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남성으로서의 힘과 권위를 강화하고, 타자인 여성들을 일방적으로 착취하는 것을 당연한 남성됨의 절차로 여기게 만드는 것이다. 맨박스를 장착하는 것은 남성들에게 더 많은 자유, 힘, 권위를 선사한다. 이로 인해 남성들이 얻는 불이익보다 이득이 많다는 의미다.[5] 즉 맨박스는 오히려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이 남성들의 통치 공간임을 확인시키는 방식이며, 여성들에 대한 폭력과 착취 행위를 남성 또래 문화의 유희 정도로 여기게 한다. 반면, 여성이 사회가 규정한 규범적 여성성을 장착하는 것은 자기혐오로서의 여성성 수행에 지나지 않는다. 규범적 여성성을 수행하는 여성은 교환 가치가 높은 소비재, 대체재가 될 뿐 남성 지배자와 동일한 위상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이 겪는 억압의 강도와 사회적 위상이 다름을 증명한다.

두 번째로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에서 ‘모두(everybody)’에 방점이 찍히게 될 때 발생하는 오류를 들여다보자. 이렇게 되면, 여성 우선 페미니즘이라는 용어가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의 대척점으로 등장하여 온갖 힐난의 대상이 된다. 여성 우선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는 장애인 우선 장애인 운동, 동성애 우선 동성애 운동, 아동 우선 아동 인권 운동과 같은 동어 반복적인 용어다. 여성이라는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사회적 부조리의 주요한 근간으로 보고 이에 대항하기 위한 실천과 이론을 만드는 것이 페미니즘인데, 여성이 우선이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페미니즘의 성립 조건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 표현이 성립하는 것은 페미니즘을 여성 해방 운동으로 정의 내리지 않을 때뿐이다. 여성 우선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페미니즘이 여성 해방 운동일 수 없으며, 여성 운동으로 정의 내리면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한다는 관점을 전제하고 있다. 이것은 페미니즘이 여성만이 아닌 다른 소수자들을 위한 운동이 되어야만 보편성을 획득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은 여성들 간의 정치적 연대를 특수한 것, 주변화된 것, 이기적인 것이자 사익을 추구하는 행위로 몰던 가장 여성 혐오적인 인식을 내면화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여성들에 의한 정치적 구성체의 정당성이 입증될 수 없다고 보는 관점은 여성들을 특수자의 위치에 가둬 두었던 남성 중심적인 관점의 재생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의 《성의 변증법》에서 이미 비판되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성들의 의제를 그것 자체로 정당하며 급진적 의제로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성 인권 운동을 다른 것, 더 중요한 정치적인 것과 접점이 있는 것으로만 파악함으로써, 스스로를 결함 있는 남성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여성 의제들은 특수하고 편파적인 것으로 여겨진 데 반해, 남성에 관한 의제들은 인간적이며 보편적인 것처럼 여겨졌다.”[6]

파이어스톤의 관점에서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의 주장은 여성 인권 운동을 그 자체로는 모자란 것이라고 보는 시각에 가깝다. 이는 남성의 의제를 보편적인 것, 여성 의제를 특수한 것으로 이분화하는 관점에 입각해 있다. 이처럼 여성 인권 운동마저 여성 우선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여성들만의 정치 세력화와 의제 결정권을 여성들이 가지는 것에 대한 불신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자기혐오로서의 여성 혐오를 깊숙이 내면화한 것이자 남성들로부터의 승인 없이는 보편자의 위상에 도달할 수 없다는 인식 한계를 드러낸다. 이는 곧 정치적인 것, 즉 공적 영역과 보편적인 진리의 영역을 남성만이 누릴 수 있는 공간으로 단정 짓는 논리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을 표방하는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은 남성 소수자 의제와 여성 의제의 접점을 과도하게 부각시키려 하거나, 그러한 접점 없는 여성 의제가 페미니즘의 주요 의제가 될 수는 없다고 주장하면서 여성이라는 운동 주체를 지워 버린다. 낙태죄 폐지 운동의 구호마저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운동으로 명명하기도 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소수자 정치학은 남성, 이성애자, 엘리트, 중산층, 백인, 비장애인, 내국인 등 주류에 의해 주변으로 내몰린 특수자의 자리로부터 이탈하는 것이다. 기득권이 독점해 왔던 기존의 폭력적이고 편향적이며 일방적인 보편성의 장을 재편하고 재정의함으로써 발전해 온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페미니즘을 여성 운동으로 정의 내리고, 여성이라는 범주는 남성의 지배와 억압에 대한 경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항하고 새로운 의미를 만드는 지점임을 인정하는 일이야말로 남성 중심적인 보편성의 의미를 해체하고 새로운 보편성을 발명해 내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특수한 것, 사적인 것, 비정치적인 것으로 규정되어 왔던 여성들이 보편성의 장에 난입하여 균열을 일으키고,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정치적인 것과 비정치적인 것의 구분을 뒤흔들며 재정의하려 하는 운동이 페미니즘인 것이다.

세 번째로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에서 ‘위한(for)’에 방점이 찍히게 될 때 발생하는 오류를 살펴보자. 페미니즘을 모두를 위한 것, 즉 누구에게나 혜택을 주는 것으로 정의하게 되면 누구도 자신의 몫을 내려놓을 필요조차 없어진다. 기존에 얻어 왔던 부당한 취득을 문제 삼지 않고 누구에게나 추가적인 이득을 주는 보너스 취득 행위로 페미니즘이 이해되기 때문이다. 즉, 기존 질서에서 가졌던 기득권이나 통념, 편견 어린 태도들을 그대로 유지해도 되며, 어느 것 하나 변화시키지 않고서도 무언가를 취할 수 있는 이득 생산 체제로 페미니즘을 오인하게 된다. 이 경우 기존 질서에서 누렸던 모든 것을 페미니즘으로 포장할 수 있다. 그리하여 체제를 유지하는 관성과 통념을 용인하고 강화하는 것마저 페미니즘으로 탈바꿈해 버린다. 이러한 관점은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이 되기 위해서는 누구의 기분도 상하게 하지 않아야 하며, 나에게 이득을 주지 않으면 진정한 페미니즘이 아니라는 결론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이런 결론하에서는 페미니즘이 기득권의 입맛에 맞는, 기득권이 재전유해 버리는 영역으로 포섭될 수밖에 없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의 오류들을 고려하면, 페미니즘은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명제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해 내가 억압받은 지점은 물론 쾌락을 느꼈던 지점마저 남성 중심적인 질서에서 얻은 것임을 직시해야 한다는 의미다. 사소한 습관과 취향, 존재 양식과 가치 체계, 인식의 질서, 욕망 등에 의문을 던지고 문제를 제기하며 그 안에 있는 남성 중심적인 관점을 비판하는 것이 페미니즘이기 때문이다. 즉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현재 희소가치의 배분판에서 자신이 얻은 부당 취득분을 내려놓아야 할 뿐 아니라, 남성 중심 사회에서 얻었던 안정과 인정의 기반조차도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다. 즉 페미니즘은 기성 질서에 대한 도전이자 자기 자신의 관성적 나태함과 여성 혐오적인 일상을 매번 자각하고 바꾸는 과정을 시작하는 일이다.

 

호명되지 않고 호출하는 여자들


헬페미니스트라는 새로운 페미니스트 여성들은 일상적인 여성 혐오를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으며, 성차별적인 구조를 파헤치고 문제를 제기한다. 그 방법으로는 성차별적인 사회 현실을 호출하는 것이 있다. 기존의 성차별적인 문화는 여성들을 일방적으로 호명해 왔다. 여성들은 개념녀 또는 무개념녀, 성녀 또는 창녀, 미녀 또는 추녀 등으로 불린다. 김치녀, 김여사, 메갈, 창녀, 보슬아치 등은 온라인과 오프라인 공간에서 여성들이 쉽게 경험하는 낙인적 호명이다. 이럴 때 대부분의 여성들은 이 이름을 적극적으로 부인하고 해명하려 애쓴다. 하지만 이런 반응 자체가 이미 호명에 응답하는 방식이 되고 만다. 낙인적 불러 세움은 여성들에게 모멸감과 수치심을 주고, 행동 교정과 자기 검열을 강요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반면 개념녀, 미녀, 성녀 등의 호명은 승인적 불러 세움이다. 이렇게 불릴 때 여성들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 찰나의 희열을 누림으로써 부름에 응답하게 되고, 동시에 그 승인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군분투하게 된다. 다른 여성들에 비해 높은 자리를 부여받은 여성들이 자리를 빼앗길까 봐 끝없이 불안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사회의 지배자 그룹인 남성들이 일방적으로 여성에게 승인을 부여하거나 거둬들일 수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억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여성들은 호명에 대답하는 대신, 일상에 만연한 성차별과 여성 혐오를 직접 다시 호출(call-out)하는 문화[7]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 호출 문화는 크게 세 가지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로는 자신이 겪은 성차별과 여성 혐오를 혼자서 삼키거나 애써 기억에서 몰아내는 대신, 차별의 현장을 고발, 폭로, 기록하는 아카이빙 단계[8]가 있다. 다음은 이러한 일상의 부조리를 개인적인 불운이 아니라 제도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로 해석해 공통의 감정과 비판적인 문제의식을 이끌어 내는 인식 공유 단계이다. 세 번째 단계로는 문제가 되는 상황과 차별적인 관습에 대항하기 위해 온라인 탄원이나 시위 등의 저항 행동을 빠른 속도로 조직화하는 것이 있다. 이러한 단계를 거친 사례로, 혜화역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한 여성의 폭로에서 시작된 개선 요구가 있었다. 해고를 당한 여성은 이를 개인적인 불운이 아닌 사회적 문제로 보고, SNS를 이용해 적극적으로 폭로하며 사회적인 문제의식을 발생시켰다. 한 개인이 겪은 사건은 여성들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보편적인 문제로 인식되면서 뉴스에 보도되었고[9], 많은 여성들이 조직적인 온라인 항의와 해당 회사에 대한 피드백 요구에 참여했다. 이를 통해 점주에게 공식적인 사과를 받아냈을 뿐 아니라, 이 사안이 근로 고용 평등법에 어긋나는 제도적 불평등이었다는 점 역시 인정받게 되었다.[10]

호출하기는 현실의 부조리를 철저히 해부해 내는 문화다. 일상의 수사학, 광고, 영화, 텔레비전, 문학, 미디어 등에 등장하는 성차별주의와 여성 혐오에 도전하는 것이다.[11] 이러한 관점에서 페미니스트 다중은 가정과 학교, 직장 등에 만연한 성차별적 언어와 관습의 여성 혐오적인 면모를 철저히 재검토하고 있다. 또한 대중 매체를 통해 제시되는 이상적인 여성상이 누구의 관점에서 묘사되어 있는지, 어떤 여성 서사가 의도적으로 누락되어 있는지 등을 낱낱이 해독해 낸다. 이는 호명당한 자리에서 가만히 있길 강요받았던 이들이 자리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는 사회적 신호다. 성차별적인 호명에 순응했던 기존의 응답 방식을 변경하려는 욕망의 실천이자, 호명된 자리의 부조리함을 밝힘으로써 응답 자체를 거부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사회 구조상 우위를 가진 남성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품평당해야 하는 성차별적 질서 자체를 다시 불러 세워 그 유효성을 멈추게 만드는 행위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호출하기는 부름 받는 자에서 부르는 자로 단순히 위치를 바꾸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현실의 좌표축 자체를 구부러뜨리고 휘저어 버리는 난입의 혁명성이 있다. 페미니스트 다중은 사회의 뿌리 깊은 여성 혐오적 인식과 실천들 앞에서 체념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여성 억압을 통해 작동하고 있는 일상의 지반을 성평등한 의식으로 다시 직조하려 시도한다.

 

페미니즘은 사이다 서사가 아니다


페미니즘은 나를 속박하는 외부의 사슬을 부수는 것일 뿐 아니라, 나의 일부를 부수는 일이다. 어느새 받아들여 버린 일상의 관성, 가부장제에 편입되어 있으면서 얻은 안전과 쾌락, 타협의 만족감을 파괴해야 한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뼈아픈 여정이자 쉽지 않은 길이다. 다시 말해, 페미니즘은 나를 고통스럽게 하던 지점들만 모두 도려내면 되는 통쾌한 사이다 서사가 아니다. 오히려 나 자신의 뼈와 살, 피부 조직이 되어 버린 남성 통치 질서를 하나하나 발견하고 분해하는 지난한 작업이다. 나의 존재 기반으로 자리 잡은 남성 지배 체제를 부수는 것은 곧 내 살점을 도려내는 고통을 수반한다. 이 과정은 매 순간 질문을 거듭하게 하고, 매번 우리를 멈추게 만든다. 여기까지만 하면 될 거야, 이건 단지 내 만족이야, 이것까지 여성 혐오였어? 라는 숱한 내면의 아우성과 직면하는 일이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한 험난한 경로다.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되는 길은 여성 혐오적인 구조에 직간접적으로 복무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철저히 직시하고 인정하는 용기를 요구한다. 어느새 적응해 버린 노련하고 안온한 몸에서 벗어나, 의식적으로 부적응자이자 봉기하는 자가 되고자 하는 정치 의식화의 실천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은 우리를 북돋아 주는 힐링 담론이 아니다. 자신과 불화하게 만드는 가장 치열한 계쟁(係爭)의 장이다. 무엇이 옳은 길인지 최종적으로 선고하는 단정의 장이 아니라 다층적인 논쟁의 터이며, 가장 치열한 쟁점들을 공론장에 올리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페미니즘은 섣부른 화해와 평화로 현실을 꾸며 내거나 어느 진영의 윤리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장이 아니라, 새로운 사유를 여는 논쟁과 각축의 장이다. 이를 존재론적 폭력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론적 폭력[12]은 ‘지금까지 말해지지도, 생각되지도 않았던 것들을 드러내고 전개하는 투쟁’이자, ‘창조자와 시인, 사유하는 자, 위대한 정치가에 의해 지속되는 것’[13]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존재론적 폭력을 구사하는 이들은 사유의 시작을 여는 사람들이며, 페미니스트들도 이에 속한다. 페미니스트는 새로운 세계의 문법을 발명하고자 하는 이들이자 기존의 남성 중심적 문법을 뒤틀어 버리는 시인이며, 주어진 통념과 진리 체계의 모순과 한계를 지적하며 끝없는 질문을 던지고 철저히 사유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정치적인 것의 의미가 지금껏 남성에 의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합법과 불법의 구분에 의존해 왔음을 드러내고, 정치적인 것을 새롭게 정의하고 있다.

현재 한국 페미니즘 판을 달구고 있는 래디컬 페미니즘과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이라는 페미니즘 진영 간의 대립과 논쟁은 지금까지 제대로 논쟁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대한 치열한 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갈등의 공간은 페미니즘의 세기가 열어젖힌 새로운 세계에 대한 초대이기도 하다. 직면하지 않으려 했던 가장 불편한 지점들에 대해, 우리는 더 깊이, 더 뜨겁게, 더 첨예하게 논의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페미니즘의 세기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위기이자 기회이기 때문이다.
[1]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조정환 외 譯), 《다중》, 세종서적, 136쪽.
[2]
Jennifer Baumgardner, 《F’em!: goo goo, gaga, and some thoughts on balls》, Seal Press, 2011.
Kira Cochrane, 《All the Rebel Women》, Guardian Books, 2013.
Elizabeth Evans, 《The Politics of Third Wave Feminisms》, Palgrave Macmillan, 2015.
Jonathan Dean and Kristin Aune, 〈Feminism resurgent? Mapping contemporary feminist activisms in Europe〉, 《Social Movement Studies》 14(4), 2015.
[3]
제1 물결 페미니즘은 1900년대 초반에 일어났으며 평등주의에 입각한 페미니즘이다. 여성들이 겪는 성차별과 성별 불평등 구조에 대항하기 위한 것으로 여성들의 교육권과 투표권 획득이 중요한 목적이었다. 서프러제트(suffragette)들의 운동이 대표적인 예다. 나아가 여성들이 사회의 다양한 분야로 진출하도록 하는 것이 목표였다. 여성들의 공적 영역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것이 운동의 핵심이었으며 역사, 노동조합, 문학 등 여성들에게 오랫동안 허가되지 않았던 영역으로 진출하고자 하였다. 제2 물결 페미니즘은 미국과 영국, 캐나다, 프랑스에서 1960년대 말부터 나타난 것으로 가부장제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이 개념은 남성이 여성을 공적 영역만이 아니라 사적 영역에서도 지배하는 시스템을 지칭한다. ‘사적인 것이 정치적이다’라는 구호와 함께 사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여성 억압 구조(임신 중절권과 피임 권리 박탈, 여성의 몸 통제, 아내에 대한 폭력 등)에 대한 비판과 이러한 구조 변화에 중점을 두었다.
[4]
토니 포터(김영진 譯), 《맨박스: 남자다움에 갇힌 남자들》, 한빛비즈, 2016, 131쪽.
[5]
Prudence Chamberlain, 〈Affective temporality: towards a fourth wave〉, 《Gender and Education》 28(3), p. 462.
[7]
Ealasaid Munro, 〈Feminism: A Fourth Wave?〉, 《Political insight》 4(2), 2013, pp. 22-25.
[8]
윤김지영, 〈페미니즘 윤리학의 새로운 지평 - 전투적 자기윤리와 자기방어〉, 《한국여성학》 34(1), 217-226쪽.
[9]
Shulamith Firestone, 《The Dialectic of Sex: The Case for Feminist Revolution》, William Morrow and Company, 1970, p. 19.
[10]
[11]
Ealasaid Munro, 〈Feminism: A Fourth Wave?〉, 《Political insight》 4(2), 2013, p. 23.
[12]
Slavoj Zizek, 《Violence, six sideways of reflections》, Picador, 2008, p. 68.
[13]
Martin Heidegger, 《Introduction to metaphysics》, Yale University Press, 2000, p.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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