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인가 감정인가
완결

사실인가 감정인가

우리는 통계를 과감하게 묵살할 정도로 교만했다. 코로나19 위기는 통계가 없을 때 상황이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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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봄, 정확하고 시기에 딱 맞는 사실적인 통계의 중요성이 갑자기 너무 선명하게 드러났다. 신종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세계를 휩쓸기 시작했다. 정치인들은 최근 수십 년 동안 벌어진 문제 중에서 가장 중요할 수 있는 문제를 두고 신속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러한 결정의 상당 부분은 전염병학자와 의료 통계학자, 그리고 경제학자들이 앞다퉈 진행하던 일종의 ‘데이터 조사’에 의존하고 있었다. 수천만 명의 생명이 잠재적인 위험에 처해 있었다. 수십억 인구의 생계 활동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난 4월 초, 세계 각국은 몇 주째 봉쇄된 상태였다. 전 세계 사망자 수는 6만 명을 넘어섰고,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사망자가 급격히 증가하는 한편, 1930년대 이후 가장 심각하다는 경기 침체까지 진행되고 있었다. 인간의 특별한 능력이나 행운이 나타난다면 이런 종말론에 가까운 공포심은 우리 기억에서 사라질 수도 있었다. 많은 시나리오가 그럴듯해 보였다. 그리고 그게 바로 문제였다.

지난 3월 중순 전염병학자 존 이오어니디스(John Ioannidis)는 코로나 대응을 두고 “한 세기에 한 번 있을 만큼 근거 자료 수집에 완전히 실패했다”고 밝혔다. 물론 데이터를 조사하는 전문가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 하지만 생사를 가르는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확실한 근거를 마련하기엔 데이터가 들쑥날쑥하고, 일관성도 없으며, 비참할 정도로 불충분한 실정이다.

이러한 큰 실패에 대해서는 앞으로 몇 년 동안 자세한 연구가 이뤄질 것이다. 하지만 몇 가지는 이미 분명해 보인다. 이번 코로나 위기의 초기에 정치 분야에서 진실한 통계의 자유로운 흐름을 지연시킨 정황이 보인다는 점이다.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대만은 코로나 사태가 악화되기 전인 2019년 12월 말에 이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사람 간에 전염된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단서를 세계보건기구(WHO)에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WHO는 1월 중순이 될 때까지도 사람 간 전염에 대한 증거가 없다는 중국 당국의 조사 결과를 트위터에 올리며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있었다. 참고로 대만은 WHO 회원국이 아니다. 중국이 대만 영토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며 대만을 독립국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정학적 문제로 정보가 지연된 상황이 발생했을 가능성도 있다.

과연 대만의 주장이 중요한 문제였을까? 코로나는 가만 놔두면 2~3일마다 확진자가 2배로 늘어나기 때문에 사람 간 전염에 대한 경고를 몇 주 전에 미리 알았다고 해도 결과가 크게 달라졌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다만,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이 코로나 위협의 잠재적인 심각성을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는 점은 확실하다. 예를 들어서 트럼프 대통령은 2월 말에도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코로나는 사라질 것이다. 언젠가는 마치 기적처럼 전부 사라질 것이다.” 4주 뒤 미국에서 1300명이 사망하고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도 더 많은 확진자가 나타났지만, 트럼프는 여전히 모든 사람들이 부활절에 교회에 가도 된다며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9월 현재에도 거센 논쟁들이 벌어지고 있다. 신속한 검사와 격리, 감염 경로 추적은 코로나 확산을 무기한 억제할 수 있는가, 아니면 그저 며칠 동안만 지연시킬 수 있는 것인가? 소규모 실내 모임이나 대규모 야외 행사를 걱정해야 하는가? 휴교는 바이러스 확산 방지에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아이들이 취약한 조부모와 함께 지내야 하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되는가? 마스크 착용은 코로나 확산 억제와 감염 방지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이러한 수많은 질문들은 감염된 사람들에 대한 조사와 그들이 감염된 시점 등에 대한 양질의 데이터를 통해서만 답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판데믹의 초기 몇 달 동안 검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수많은 감염 사례가 공식 통계에서 누락됐다. 시행되던 검사마저도 의료진이나 중환자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부유하고 유명한 사람들에게만 집중돼 왜곡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경증 환자나 무증상 환자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그래서 이 바이러스가 실제로 얼마나 치명적인지 집계되는 데까지는 몇 달이나 걸렸다. 3월에는 영국에서만 사망자 수가 이틀마다 두 배로 증가하는 등 감염 사례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가만히 앉아서 지켜볼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각국의 지도자들은 경제를 인위적인 혼수상태에 빠트렸다. 3월 말 한 주 동안에만 300만 명 이상의 미국인들이 실업 수당을 청구했다. 이전 기록의 다섯 배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그 다음 주에는 상황이 더욱 악화돼, 650만 명 이상의 실업 수당 신청자가 몰려들었다. 건강에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를 감안하더라도, 코로나가 이토록 많은 사람들의 소득을 싹쓸이하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만큼 파멸적인 바이러스였을까?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전염병학자들은 지극히 제한된 정보로 최선의 추측만 할 수 있었다.

우리가 정확하고 체계적으로 수집된 수치들을 얼마나 당연하게 여기는지, 이번만큼 특별하게 보여 준 경우를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코로나바이러스 이전을 살펴보자. 성실한 통계학자들이 방대한 범위의 중요 사안들에 대해 공들여 통계를 수집했다. 이러한 통계들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무료로 다운로드받을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거짓말, 빌어먹을 거짓말, 그리고 통계”[1]라고 심드렁하게 말했듯, 우리는 통계를 과감하게 묵살할 정도로 교만했다. 코로나 위기는 통계가 없을 때 상황이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의도적 합리화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특정한 종류의 결론에 다다르려는 목표를 정해 놓고 그 주제에 관해서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우주변 세계를 해석하는 문제에 있어서, 전문성보다 감정이 앞선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이러한 특성은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사거나, 바람직하지 않은 상대와 로맨틱한 관계에 빠지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신뢰를 배반한 정치인들에게 왜 투표를 하는지도 마찬가지다. 특히, 얼핏 생각해도 거짓인 게 자명한 통계를 이용한 주장들을 그토록 자주 믿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가끔 속고 싶어 한다.

심리학자인 지바 쿤다(Ziva Kunda)는 실험을 통해서 이런 현상을 발견했다. 쿤다는 실험 대상자들에게 커피 같은 카페인 함유 식품이 여성의 몸에서 더 많은 유방 낭종(breast cyst)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증거가 담긴 기사를 보여 줬다.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당 기사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커피를 많이 마시는 여성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종종 마음에 들지 않는 증거를 묵살하는 방법을 찾아내곤 한다.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다. 가령 어떤 증거가 예상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이면, 그 증거가 가진 결점을 아주 면밀하게 살펴볼 가능성이 적다. 중요한 정보를 평가하는 동안 감정을 완전히 통제하기란 쉽지 않다. 감정은 우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서 길을 잃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감정이라고는 전혀 없이 수치 정보만 처리하는 기계가 될 필요는 없다. 대부분은 감정을 알아차리고 고려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판단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감정에 대한 초인적인 통제를 요구하기보다는, 그저 좋은 습관을 기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라. 이 정보는 나에게 어떻게 느껴지는가? 정당하거나 지나치게 자신감을 갖게 하나? 불안이나 분노, 두려움을 느끼는가? 주장을 부정할 이유를 찾으며 거부하려고 애쓰고 있지는 않나?

코로나 유행 초기에는 유용한 정보처럼 보이는 ‘가짜 뉴스’들이 바이러스보다 더 빨리 퍼졌다. 페이스북과 이메일 뉴스 그룹을 통해서 널리 퍼졌던 어떤 SNS 게시물은 너무나 자신 있게 코로나와 감기를 구별하는 방법을 설명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코로나바이러스가 파괴된다고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게시물도 있었다. 얼음물은 되도록 마시지 말고, 대신 따뜻한 물을 마시면 어떠한 바이러스라도 죽일 수 있다는 부정확한 조언도 퍼졌다. 이런 게시물들은 때때로 “내 친구의 삼촌”, “스탠퍼드 병원 이사회”, 아니면 뜬금없이 애먼 소아과 의사를 출처로 거론했다. 가끔 내용이 정확한 게시물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추측성 정보였다. 하지만 평소에는 분별 있던 사람들마저도 그런 게시물을 공유하고 또 공유했다. 왜 그랬을까?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전대미문의 상황에서 혼란스러워하고 있던 차에, 때마침 유용해 보이는 조언을 발견한고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뿐이다. 순전히 인간적이고 선의를 가진 충동이었다. 하지만 현명하지는 못했다.
영국 에딘버러의 시위대들이 코로나19 예방 조치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Jeff J Mitchell/Getty Images
나는 특정 통계를 이용한 주장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전에, 먼저 나에게 어떻게 느껴지는지를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나 자신을 속이는 것을 막아 주는 확실한 방법은 아니다. 하지만 거의 해를 끼치지 않고, 때로는 커다란 도움이 되는 습관이다. 감정은 강력하다. 감정을 사라지게 만들 수도 없고, 그러기를 원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감정이 판단을 흐리게 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는 있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

경제학자인 린다 뱁콕(Linda Babcock)과 조지 로웬스타인(George Loewenstein) 교수는 1997년에 한 가지 실험을 진행했다. 참가자들에게 실제 법정 소송에서 다루었던 오토바이 사고 관련 증거를 줬다. 그리고 참가자들에게 무작위로 원고 측 변호인이나 피고 측 변호인의 역할을 맡겼다. 실제 재판에서 원고 측 변호인은 사고로 다친 오토바이 운전자가 피해 보상금으로 10만 달러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피고 측 변호인은 소송을 기각하거나 피해 보상금을 낮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뱁콕과 로웬스타인 교수는 실험 참가자들에게 모의재판에서 각자의 입장을 보다 설득력 있게 주장하고, 상대 주장보다 유리한 합의를 이끌어내도록 유도했다. 여기에 금전적인 인센티브도 내걸었다. 이와 별도로, 실제 판사가 판결을 내린 피해 보상금을 정확하게 맞추면 별도의 금전적 인센티브를 주겠다고 했다. 이들은 실제 보상금에 대한 참가자들의 예측이 각자 맡은 역할과는 무관하길 예상했다. 하지만 참가자들의 예측은 역할에 따라 사실이기를 바라며 펼친 주장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다.

심리학자들은 위 실험에서 나온 참가자들의 경향을 ‘의도적 합리화(motivated reasoning)’라고 부른다. 의도적 합리화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특정한 종류의 결론에 다다르려는 목표를 정해 놓고 그 주제에 관해서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축구 경기에서 우리는 상대편이 저지른 반칙은 지적하지만, 우리 편의 잘못은 못 본 척한다. 우리는 자신이 주목하고 있는 것과 관련한 부분을 더욱 잘 알아차릴 가능성이 높다. 전문가들도 의도적 합리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히려 어떤 상황에서는 그들의 전문성이 단점이 될 수도 있다. 프랑스의 풍자 작가인 몰리에르(Molière)는 이렇게 표현했다. “배운 게 많은 바보가 무식한 바보보다 더 어리석다.”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성을 가진 생명체라서 정말 편하게 산다. 왜냐하면 이성은 의지만 있으면 모든 것에 대한 이유를 찾거나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현대의 사회 과학 역시 몰리에르와 프랭클린의 견해에 동의한다. 심도 있는 전문성을 지닌 사람들은 속임수를 눈치채는 능력이 더 뛰어나다. 하지만 만약 전문가들이 의도적 합리화라는 덫에 걸리면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진정으로 믿고 싶은 것에 대해 왜 믿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수도 없이 끌어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즉, 각자의 선입견에 치우친 편향된 방식으로 어떤 주장을 검사하고 증거를 평가한다. 증거를 다룬 최근의 연구를 보면, 이러한 경향은 일반인뿐 아니라 소위 ‘지성적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흔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똑똑하거나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은 ‘의도적 합리화’를 막을 수는 없고, 어떤 상황에서는 오히려 약점이 될 수도 있다.

이에 대한 실제 사례는 정치학자인 찰스 테이버(Charles Taber)와 밀튼 로지(Milton Lodge)가 2006년에 펴낸 연구에서 볼 수 있다. 이들은 미국인들이 정치적으로 논쟁적인 사안에 대해서 추론하는 방식을 검토하고자 했다. 이들이 고른 두 가지의 주제는 총기 규제와 차별 철폐 조치였다.

테이버와 로지는 실험 참가자들에게 양쪽의 입장에 관한 여러 가지의 주장을 읽게 한 다음, 그 각각의 주장이 가진 장점과 단점을 평가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렇게 장단점을 모두 검토해 달라는 질문을 받으면, 참가자들이 반대편의 입장까지 고려해서 보다 넓은 인식을 가질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새롭게 얻은 정보는 참가자들 사이를 더욱 멀어지게 만들었다.

참가자들은 각자가 가진 기존의 믿음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찾기 위해 주어진 정보를 파헤쳤다. 보다 많은 정보를 찾아 달라는 요청을 받아도, 이미 갖고 있던 생각을 뒷받침해 줄 데이터를 찾았다. 반대되는 주장의 장점을 평가해 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참가자들은 반대 주장을 무너뜨릴 방법을 생각해 내는 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다.

이 실험이 ‘의도적 합리화’를 보여 주는 유일한 연구는 아니다. 하지만 테이버와 로지의 실험에서 특히 흥미를 끄는 점은 전문 지식이 합리화를 심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지적 수준이 높은 사람들일수록 평소 가졌던 선입견을 뒷받침하는 자료들을 더 많이 찾아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지적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생각과 반대되는 자료는 오히려 덜 찾았다는 점이다. 마치 전문성을 활용해서 불편한 정보를 적극적으로 회피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자신들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주장을 더 많이 내놓았고, 반대 주장의 약점을 더 많이 집어냈다. 전문가들은 애초에 도달하고 싶은 결론에 다다를 수 있는 훨씬 더 뛰어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과 가치에 일치하는 결론에 다다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다. 지식이 풍부하다는 것은 원하는 결론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무기를 더 많이 갖고 있다는 의미다.



‘의도적 합리화’ 가운데 정치적으로 가장 가까운 정서적 반응은 당파성(partisanship)에서 동기를 부여받는 모습이다. 정치적 연대 의식이 강한 사람들은 여러 사안들에 대해서 ‘각자의 옳은 편’에 서기를 원한다. 특정 주장을 대했을 때, “우리 편이 생각하는 방식”인지 아닌지에 따라 다르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기후 변화에 관한 주장을 생각해 보자. “인간의 활동이 지구의 기후를 따뜻하게 만들면서, 다가올 삶의 심각한 위협을 초래하고 있다.” 상당수는 이런 주장을 정서적으로 받아들인다. 지구부터 화성까지 거리가 얼마인지를 계산하는 것처럼 숫자와 정확성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는 얘기다. 기후 위기를 믿고 말고 하는 문제는 정체성의 일부분이다. 우리가 누구며, 친구들은 누구며, 살고 싶은 세상은 어떤 곳인지에 관한 내용들이 담겨 있다. 만약 내가 기후 변화와 관련한 어떤 주장을 기사로 쓰거나 보기 편한 그래프로 만들어서 소셜 미디어에 공유한다면, 사람들의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주장이 사실이나 거짓이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기후 위기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 얘기가 의심된다면, 갤럽(Gallup)의 2015년 여론 조사 결과를 곰곰이 생각해 보기 바란다. 갤럽 조사에서는 기후 변화를 두고 미국 내 민주당원과 공화당원 사이에 거대한 간극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러한 결과에 어떤 합리적인 이유가 있을 수 있을까?

과학적인 근거는 그야말로 과학적인 근거다. 기후 변화에 대한 생각은 좌파나 우파 같은 성향에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흔들린다. 특히 기후 변화에 대한 인식 차이는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 사이에서 더욱 컸다.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는 민주당원의 45퍼센트와 공화당원의 23퍼센트가 기후 변화에 대해서 “대단히” 우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는 기후 변화를 대단히 우려하는 응답이 민주당원 50퍼센트, 공화당원 8퍼센트였다. 과학적인 문해력(literacy)을 고려해 봐도 비슷한 양상이 유지된다. 과학적인 문해력이 높은 공화당과 민주당원이 가진 인식의 차이는 그렇지 않은 당원들에 비해서 훨씬 크게 나타난다.

정서적인 측면이 없다면, 더 높은 수준의 교육과 더 풍부한 정보는 사람들이 진실을 두고 합의하는 데 확실하게 도움이 될 것이다. 최소한, 현재의 조건에서 최선의 의견에 다다르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후 변화라는 주제에 주어지는 더욱 많은 정보는 오히려 사람들을 양극화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사실만으로도 감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과 가치에 일치하는 결론에 다다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다. 지식이 풍부하다는 것은 원하는 결론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무기를 더 많이 갖고 있다는 의미다.
2011년 호주에서 개최된 탄소세 반대 시위 ©Torsten Blackwood/AFP/Getty Images
확신에 가득 차 단언할 수는 없더라도, 기후 변화의 경우 객관적인 진실이 존재한다. 하지만 지구에 사는 80억 명 중 단 한 명의 마음속에 드는 생각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다. 설령 중국의 국가 주석이라고 하더라도, 언행에 관계없이 기후 변화는 예정된 경로를 밟아 나갈 가능성이 높다. 자기중심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아무리 틀린 의견을 내도 실질적으로 드는 비용은 ‘0’에 가깝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이 사회에 미치는 결과는 현실적이며 즉각적으로 나타난다.

미국의 몬태나에서 보리농사를 짓는 농부를 상상해 보자. 뜨겁고 건조한 여름이 지속되면서 농사를 망치는 경우가 많아지는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런 경우 기후 변화는 중요한 문제이다. 하지만 몬태나의 시골은 보수적인 지역이며, ‘기후 변화’라는 단어는 정치적인 함의를 갖고 있다. 기후 변화에 대해서 단 한 명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저널리스트인 아리 르보(Ari LeVaux)는 농부인 에릭 소머펠드(Erik Somerfeld)가 무기력해지는 과정을 이렇게 묘사한다. “소머펠드는 들판에 서서 시들어 가는 농작물을 보고면서 피해 원인이 무엇인지 명백하게 알 수 있었다. ‘기후 변화’였다. 하지만 친구들과 함께 술집에 들어가면, 그의 어조가 바뀌었다. 그는 ‘변덕스런 날씨’와 ‘더 건조해지고 뜨거워진 여름’이라는 단어들을 사용하지 않았다. 입 밖에 꺼내선 안 되는 단어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대화 방식은 요즘 농촌에서 드물지 않다.”

만약 소머펠드가 미국 오리건의 포틀랜드나 영국 이스트서식스의 브라이튼에 살고 있었다면, 동네 술집에서 말조심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기후 변화를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친구들과 어울렸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런 친구들 사이에서 기후 변화는 중국의 거짓말이라며 시끄럽게 외치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곧바로 따돌림 당하기 마련이다.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기후 변화라는 주제에 대해서 양극단으로 갈린다는 사실은 결국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인류는 수십만 년 동안 진화하면서 주변 환경에 어울리는 일을 깊이 신경 쓰게 됐다. 이런 사실은 정보를 더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정치적으로 의견이 나눠지는 주제에서 ‘의도된 합리화’의 덫에 걸릴 위험성이 더 높다는 테이버와 로지의 연구 결과를 설명해 준다. 주변 지인들이 이미 믿고 있는 사실을 보다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다면, 더욱 존중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도널드 트럼프가 사람들이 잠시 멈춰서 차분히 생각하게 유도하는 내용을 트위터에 올린 적이 있었던가. 그린피스(Greenpeace)도 마찬가지다.


‘잘못된’ 무언가로 인한 사회적인 결과가 심각하다고 하더라도, 실질적인 결과가 미미하다면 잘못된 길로 이끌리기 쉽다. 수많은 논란들이 정치적 성향에 따라 분열되는 상황은 우연은 아니다.

“나는 정치적인 신조가 있지만 당신은 편향돼 있다” 혹은 “그는 비주류 음모론자다” 같은 ‘의도된 합리화’는 그저 남일이라고 생각되기 쉽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때때로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현명하다.

킹스칼리지런던(King’s College London)의 신경과학자 크리스 드 메이어(Kris De Meyer)는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여 줬다. 마치 환경 운동가가 기후 변화를 부정하는 입장에 대해 문제의식을 설명하는 내용처럼 보인다.
부정하는 이들의 활동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그들의 노력은 공격적이었던 반면, 우리의 노력은 방어적이었다. (2)부정하는 이들은 마치 철저한 행동 계획을 세워 놓은 것처럼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 나는 부정적인 세력들이 열심히 노력하는 기회주의자이라고 특징지었다. 그들은 신속하게 행동했다. 과학계를 공격하며 사용하는 정보의 유형에는 전혀 원칙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우리가 관련 사안을 다루고 언론 매체와 대중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은 의심의 여지없이 서툴렀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마찬가지였다.

글을 읽은 학생들은 모두 기후 변화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연막작전과 냉소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에 격하게 동의했다. 학생들은 모두 기후 위기에 전적으로 동조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 메이어가 공개한 글의 출처는 최근에 주고받은 이메일이 아니었다. 기후 변화가 아닌 1960년대 담배 업계에 종사하던 한 마케팅 임원이 쓴 악명 높은 내부 메모 중 일부를 그대로 발췌한 글이었다. 메모는 ‘기후 변화 부정론자들’이 아니라 ‘담배 반대 세력’을 비판하는 내용이었지만, 아무것도 바꿀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기후 변화가 사실이라고 맞는 주장을 하든, 또는 담배와 암 발병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틀린 주장을 하든 상관없다. 위의 예시와 동일한 글로 서로의 주장을 펼치며 각자가 옳다고 똑같이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민감해질 수밖에 없긴 하겠지만, 개인적으로 겪은 사례를 하나 들어 보겠다. 좌파 성향이며 환경 문제를 의식하는 내 친구들은 기후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을 향한 인신공격을 당연히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기후 학자들을 공격하는 내용은 뻔하다. 과학자들이 정치적인 편향성을 갖거나, 큰 정부(big government)에서 연구 자금을 받아 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기후 데이터를 조작한다고 주장하는 식이다. 간단히 말해서, 증거를 갖고 따지기보다는 개인을 비방한다.

기후 학자 공격을 비판하는 내 친구들은 동료 경제학자들을 공격할 때 위와 비슷한 유형의 전략을 받아들이고 더욱 확장시킨다. 경제학자들이 정치적인 편향성 때문에, 또는 대기업들에게 돈을 받아 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기 때문에 데이터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나는 평소 이성적인 지인에게 기후 과학자 공격과 경제학자 공격의 비슷한 점을 이해시키려고 애썼지만, 아무런 소득도 얻을 수 없었다. 지인은 내 얘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가능은 하겠으나, 이런 지인의 태도를 이중 잣대로 부르는 건 정당하지 않다. 이중 잣대에는 고의적이라는 암시가 들어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의도적 합리화’는 타인에게서는 쉽게 발견할 수 있지만 스스로 깨닫기는 매우 어려운 무의식적인 편견이다.

통계를 근거로 하거나 과학적인 주장을 대하는 감정적 반응은 중요하지 않거나 부차적인 문제가 아니다. 감정은 어떠한 논리보다도 우선해서 믿음을 형성할 수 있고, 또 자주 그렇게 작용한다. 정치적 당파성이나 계속해서 커피를 마시고 싶은 욕망, HIV 진단이라는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마음 등, 확고한 근거는 의심하고 낯선 사실을 믿는 일이 벌어진다. 감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여러 원인들이 우리 스스로를 설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절망해선 안 된다. 감정을 조절하는 법은 배울 수 있다. 성장하는 과정의 일부분이다. 첫 번째 간단한 단계는 감정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통계를 근거로 한 주장을 접하면, 반응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만약 격분, 환희, 부정 등의 기분을 느낀다면, 판단을 잠시 멈추고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감정이 없는 로봇이 될 필요는 없지만, 느낌만큼 생각을 해야만 한다. 할 수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유리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속이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특정한 결론에 도달해야 하는 이유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이라는 요소 또한 중요하다. 수많은 사람들은 스타 영화배우나 억만장자가 되길 원한다. 숙취에 면역력을 갖고 싶어 한다. 하지만 실제로 이뤄지리라고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무언가를 갈망하는 욕망에는 한계가 있다. 판단을 내리기 전에 셋을 세는 버릇을 들이고 무릎 반사처럼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상황을 더 많이 알아차릴수록, 진실에 더욱 가까워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보겠다. 교수들로 이루어진 어떤 연구 팀에서 수행한 여론 조사를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지한 저널리즘과 가짜 뉴스를 완벽하게 구분할 수 있다. 거짓이 아닌 진실을 널리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데에도 동의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500명이 넘는 이민자 집단이 자살 폭탄 조끼를 입은 채로 체포됐다”와 같은 기사를 기꺼이 공유한다. ‘공유하기’를 클릭하기 전에 잠시 멈춰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게 사실일까?’라거나 ‘내가 이 사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라고 자문하지 않았다.

대신에 모든 사람은 인터넷이 정신을 끊임없이 산만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인터넷 서핑을 하면서 감정과 당파성에 휩쓸린다. 하지만 잠시 멈춰서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수많은 거짓 정보를 걸러낼 수 있다는 사실은 그나마 다행이다.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이다. 해야 할 일은 잠시 멈춰서 생각하는 습관을 갖는 것뿐이다.

선동적인 밈(meme)이나 열변을 토하는 발언들은 사람들을 고민 없이 잘못된 결론으로 건너뛰게 만든다. 침착해져야 한다. 수많은 논조들은 욕망과 동정심, 분노를 끌어 올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도널드 트럼프가 사람들이 잠시 멈춰서 차분히 생각하게 유도하는 내용을 트위터에 올린 적이 있었던가. 그린피스(Greenpeace)도 마찬가지다.[2] 오늘날 누군가를 설득하려는 사람들은 상대방이 멈춰서 생각해 보길 원하지 않는다. 대신 다급함을 느끼기를 원한다. 그러니 서두르면 안 된다.
[1]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 자전적 수필인 〈내 자서전의 몇 가지 장들(Chapters from My Autobiography)〉에서 “거짓말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거짓말, 빌어먹을 거짓말, 그리고 통계다”라고 쓰면서 유명해진 표현이다.
[2]
그린피스는 선명한 명분을 가지고 있지만, 때로는 군사 조직과도 같은 과격한 행동주의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 - 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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