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세 시나리오
1화

프롤로그 ; 갈림길에 선 인류

“우리는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에 살고 있습니다.” 네덜란드 대기 화학자이자 1995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파울 크뤼천(Paul Jozef Crutzen)이 2000년 한 학술회의장에서 이같이 선언한 후, 인류세라는 낯선 용어가 이 시대의 새로운 화두가 됐다. 인간이 지구 환경을 바꾸는 지질학적 힘이 된 시대, 이것이 바로 인류세다.

인류세란 대체 어떤 시대이며 우리는 이를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 한동안 우리 시대를 정의한 대표적인 명칭은 ‘정보화 시대’였다. 이 시기를 주도한 4차 산업 혁명은 인공지능, 자동화, 사물 인터넷, 유전 공학 등 화려한 최첨단 기술들을 앞세웠고, 이것들은 인류가 꿈꾸던 모든 것이 현실이 되는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 듯했다. 그러나 4차 산업 혁명의 실체에 관한 논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른 목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점차 심화하는 지구 온난화, 기후 재앙, 해수면 상승, 생물 다양성 감소, 환경 오염, 물 부족, 자원 고갈 등의 문제들이 낙관적인 미래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이런 불길한 분위기에 정점을 찍은 것이 2020년 초 시작해 2022년 현재까지 아직 완전히 종식되지 않은 코로나19 판데믹이다. 바이러스라는 미미한 존재 앞에서 인류는 모든 경제, 사회 활동에 큰 타격을 받으면서도 속 시원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무력하기만 했다.

인류세가 어떤 시대인지 이해하려면 우리 삶을 관통하는 이 빛과 어둠, 희망과 절망, 진보와 후퇴라는 상반된 흐름이 실은 하나의 근원에서 나왔고, 깊이 상호 연관되어 있음을 인식해야만 한다. 자연을 유용한 자원으로서 최대한 이용하고, 환경을 인간의 이익을 위해 통제하고 조작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지구 전체의 모습을 지금과 같이 바꾸어 놓았다.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이제 지구상에는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고, 인간의 힘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운 생명이 없다. 인류세를 ‘자연의 힘에 대한 인간의 승리’로 경축하는 이들도 있지만, 과도하게 커진 인류의 힘과 감당할 수 없는 욕망으로 인해 지구 시스템의 균형이 깨졌다는 어두운 측면도 함께 존재한다.

지구는 우리가 머물 유일한 집이지만, 인간만을 위해 존재하는 곳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류세에 들어선 지금, 우리는 갈림길에 서 있다. 금세기 들어 인류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물질적 풍요와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마주하는 인류세의 수많은 문제들은 더 많은 기술, 더 진보한 문명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기술과 문명의 고삐 풀린 발전으로부터 비롯된 문제들이다. 인간을 중심에 놓고, 오로지 인간의 필요와 욕구만을 앞세운 문명이 낳은 결과다. 세계의 중심이 인간이라고 너무 오래 믿어온 나머지 풀과 나무, 하늘과 바다, 흙과 지렁이가 인간을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며, 긴 세월 지구상에서 인간과 무관하게 자기들만의 자리를 갖고 존재해 왔다는 당연한 사실마저도 인류는 잊어버렸다.

인류세에 살고 있다는 주장이 인간의 위대함을 찬양하라는 뜻은 결코 아니지만, 그렇다고 인류의 마지막 시대에 도달했다는 불길한 예언도 아니다. 갈림길에 서서 우리는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고 다시 방향을 잡을 수 있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고,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일찍이 우리 자신을 포함해 이렇게 많은 지구상의 다른 생명체들의 운명이 인류의 손에 걸린 적은 없었다. 많은 힘은 그만큼의 책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류세의 전개 양상이 전에 겪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이다 보니, 우리의 힘이 미치는 범위와 그 파장, 책임의 무게를 잘 실감하지 못한다. 그래서 인류세의 위기는 보통 과도한 낙관 속에서 과소평가되거나 혹은 지나친 비관과 회의 가운데 외면을 당한다. 결국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진짜 위기가 아니라고 믿거나, 어차피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으니 모래 속에 머리를 파묻는 타조처럼 회피한다. 마치 넷플릭스 오리지널 〈돈 룩 업Don’t Look up〉에서 과학자들이 지구를 향해 혜성이 날아오고 있다고 아무리 목이 터져라 외쳐도 한사코 하늘로부터 고개를 돌렸던 사람들처럼 말이다. 혜성 이야기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붙잡고 하늘을 좀 올려다보라며 분노를 터뜨리는 대학원생 케이트의 말처럼, 지금은 듣기 싫다고 해도 다른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이다.

인류세에 관해 이야기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지질학 용어이니만큼 지구 과학 관점에서 접근할 수도 있고, 환경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주제이니 생태학이나 환경 운동과 연관지어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 기후 변화를 해결할 지구 공학적 방법에 관심 있다면 탄소 저감과 같은 기술적 측면에서 볼 수도 있으며, 환경 정책을 다루는 정치학의 관점에서도 할 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최근에는 지속 가능한 발전 또는 탈탄소 경제 등 경제학에서도 점차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다시 말해, 인류세는 우리 삶의 모든 국면을 포괄한다.

그러나 정치, 경제, 사회, 과학 기술의 관점에서만 인류세에 접근하기에는 부족하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인류세의 다양하고 복잡한 국면들을 한데 모으고, 우리가 원하는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하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직접 관계 맺고 인식할 수 있는 일차원적 현실을 넘어 더 크고 넓은 세상을 인식하도록 하고, 더 추상적인 층위에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장치가 바로 ‘이야기’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수한 힘들, 마치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수많은 관계로 구성된 이 세상을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상상할 수 있다. 인류세는 전 지구적인 통신 네트워크와 교통망의 확산으로 연결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화된 시기이다. 인간 이외에도 무수한 생명체들이 우리와 서로 연결되고 운명을 공유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인류세 이야기의 출발점이다. 그 출발이 가능할지 여부에 따라 인류세는 기후 변화와 환경 재앙, 대량 멸종으로 이어지는 인류 역사의 마지막 장이 될지, 인간 아닌 것들까지 포함한 모든 존재와의 공존과 공생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지구 이야기의 첫 장이 될지 결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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