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을 밟을 최초의 여성
완결

달을 밟을 최초의 여성

머지않아 여성 우주 비행사가 달을 밟을 것이다. 인류에게는 50년 만이지만, 여성에게는 처음이다.

©미드저니 생성 이미지: 권순문/북저널리즘

1. 반세기 만의 달세계 여행


미국이 다시 달을 찾아간다. 아르테미스 1호(Artemis 1)는 2022년에 발사되어 무인으로 달의 궤도를 성공적으로 돌아 거의 아무런 문제 없이 다시 지구로 돌아왔다. 이제껏 만들어진 가장 거대한 로켓인 미국 항공우주국(NASA·나사)의 우주 발사 시스템(SLS)을 이용해 추진력을 얻었다. 달 착륙을 위한 드레스 리허설이라고 할 수 있는 아르테미스 2호는 2024년의 임무를 위해 준비하고 있다. 그다음 해에 예정된 아르테미스 3호는 다시 달 표면에 우주 비행사들을 데려갈 예정이다. 인간이 최초로 그곳에 발을 디딘 이후 50여 년 만의 일이 될 것이다.

아폴로 프로젝트를 통해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모두 백인 남성으로 구성된 12명이 달에 다녀왔다. 이번에 아르테미스가 승무원을 데려간다면, 여성이 달 위를 걸을 것이고 유색 인종 한 명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마 동일한 사람일 것이다.

2022년 10월 5일, 니콜 아우나푸 만(Nicole Aunapu Mann)은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5개월 동안의 임무를 개시하면서 우주에 나간 최초의 미국 원주민 여성이 되었다. 오늘날 캘리포니아 북서부에 거주하는 와일라키(Wailaki) 부족 출신의 아우나푸 만은 ISS로 떠나기 전, 어렸을 때만 해도 우주 비행사가 된다는 게 불가능해 보였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인종과 성별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1977년에 태어났는데, 당시 제 생각에 그건 불가능의 영역이었어요.”

아우나푸 만은 아나폴리스(Annapolis)의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미 해병대에 입대했다. 그리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투기를 몰았다. 2013년에 그녀는 나사 우주 비행사 훈련 프로그램에 선발되었다. 그녀는 SLS 발사체 개발, 그리고 거기에 실려서 인간을 달에 데려다줄 오리온(Orion) 우주선 개발에 모두 참여했다. 이번에 ISS에서 돌아오면 그녀는 달에 직접 발을 내디딜 후보 가운데 한 명이 될 것이다.

아우나푸 만은 달에 발을 내딛는 최초의 여성이 되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을 거쳐야 한다. 나사는 이번의 달 재방문을 준비하는 우주 비행사 그룹인 아르테미스 팀의 초기 멤버 18명을 이미 발표했다. 그중 아홉 명은 여성이고, 아우나푸 만도 그 아홉 명 중 하나이다. 거기에는 최초로 3인 전원 여성 우주 유영(spacewalk)에 참여했던 크리스티나 코크(Christina Koch), 이미 우주에서 204일의 활동을 마친 노련한 앤 맥클레인(Anne McClain), 그리고 국제 럭비리그 선수 출신이며 2022년 4월에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ISS에 근무하는 기록을 세운 제시카 왓킨스(Jessica Watkins)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달 위를 걷게 될 최초의 여성이 누가 될지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워싱턴DC에 있는 국립항공우주박물관(NASM)과 매사추세츠에 있는 하버드-스미스소니언천체물리학센터(CfA) 두 곳에서 동시에 큐레이터를 맡고 있는 에밀리 마골리스(Emily Margolis)의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숙련되었을 것이고, 임무를 잘 수행할 것입니다. 아르테미스 팀에 있는 여성들은 모두 스템(STEM·과학·기술·공학·수학) 분야에서 고급 학위를 갖고 있으며, 우주왕복선 비행사와 민간항공사의 기장, 훈장을 받은 군 조종사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2. 날아라, 샐리 라이드


나사, 더 나아가 미국은 그들이 우주에서 거둔 성과에도 불구하고 여성을 우주로 보내는 일에 있어서는 많은 난관을 겪어 왔다. “당연히 여성들이 우주 비행에 관심이 적다거나 능력이 부족한 건 아니었습니다.” 마골리스는 말했다. “나사가 우주 비행단에 여성을 처음 받아들인 건 1978년이었습니다. 기관이 설립한 지 20년이나 지나서였죠. 나사가 그전에도 우주 비행사 후보에 여성들이 지원하는 걸 명시적으로 금지하지는 않았지만, 자격 요건을 통해 암묵적으로 여성의 참여를 배제했습니다. 당시에는 오직 군에 있는 테스트 파일럿에게만 자격이 있었는데, 군부가 해당 직군에서 여성들을 차단했습니다. 그러나 여성에게 적합한 직업이 무엇인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뀌고 시간이 지나면서, 우주 비행사에 대한 자격 요건도 바뀌었습니다. 나사가 처음으로 우주 왕복선 비행사를 공개 모집했을 때, 그들은 사상 최초로 여성을 명시해놓고 선발했습니다.” 1978년의 일이었다.

일부 논평가들은 나사가 여성 우주 비행사들을 우주로 내보내기 꺼리던 이유가, 만약 끔찍한 사고라도 발생하고 하필 거기에 여성이 포함되어 있을 경우 역풍이 불어닥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불행하게도 1986년에 실제로 그런 상황이 발생했다. 미국인들 중에서 두 명의 국회의원[1]을 제외하고 우주 임무를 수행한 최초의 민간인이었던 현직 교사 크리스타 매컬리프(Christa McAuliffe)가 우주 왕복선 챌린저호 폭발 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챌린저 우주 왕복선은 발사 73초 후에 외부의 고체연료 추진기 한 개가 고장 나면서 폭발했다.

그녀의 죽음은 거의 군 소속의 전문가였던 다른 동료 우주 비행사들보다도, 미국의 대중에게 거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마골리스는 그녀의 성별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교사이자 민간인이었기 때문에 충격이 더욱 컸을 것이라고 말한다. “전문 우주 비행사였던 주디 레스닉(Judy Resnik) 역시 그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마골리스의 지적이다. “매컬리프의 죽음이 큰 영향을 미쳤던 이유는, 그녀가 우주로 나간 미국 최초의 교사가 될 예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여정은 매우 많은 기대를 받았습니다. 수많은 교사와 학생들이 발사 장면을 텔레비전 생중계로 지켜봤습니다. 그때가 학교에서 수업이 있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추락한 것이고, 그래서 그토록 충격이었던 겁니다.”

매컬리프의 죽음으로 인해 결국 나사가 추진하던 ‘우주의 민간인(Civilians in Space)’ 프로그램이 취소되었다. “나사는 우주 탐사가 민간인들에 너무 위험해서 지속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마골리스의 말이다. “미국은 언제나 자국의 우주 비행사들은 안전하게 지구로 귀환 시켰습니다. 그러니 승무원들의 죽음은 충격이었죠. 대중들은 우주 왕복선이 궤도 비행을 안전하며 편안하게 해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챌린저호는 우주 비행의 위험성을 비극적으로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뉴 사이언티스트》는 “매컬리프의 죽음이 특히나 고통스러웠다”고 썼다. “우주 비행사는 많은 일반인이 꿈꾸는 대상이다. 그것은 웃음을 짓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뉴햄프셔 교사였던 매컬리프의 사례로 인해 이제 나사는 우주로 보내기로 선발한 사람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엄청난 압박을 받게 되었다. 어쩌면 다시는 민간인을 보내지 않기로 선택할지도 모른다.” 그들의 선택은 반대였지만, 자기반성은 가혹했다.

우주로 나간 최초의 미국인 여성은 샐리 라이드(Sally Ride)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참사가 발생하기 3년 전이었던 1983년 6월 18일, 그것과 동일한 챌린저 우주 왕복선을 타고 궤도를 비행했다. 당시에 라이드는 나사가 새로운 우주 비행사를 찾고 있으며 여성들이 지원하기를 바란다는 신문 보도를 보고 그 요청에 응했다. 라이드가 비행을 하기 전, 그녀에게는 “이 비행이 당신의 생식 기관에 영향을 미칠까요?”와 같은 다소 직설적인 질문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가 성공적으로 귀환함으로써 이런 질문은 불식되었다. 참고로 미국 최초의 우주 비행사였던 앨런 셰퍼드(Alan Shepard)와 같은 남성 우주 비행사들은 이런 질문을 받지 않았다. “작업 중에 무언가 잘못되면 당신은 울음을 터뜨리나요?”처럼 다분히 바보 같은 질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또한 화장품 가방을 가져가는 걸 거부했다. 긍정적인 기록을 보자면, 라이드의 비행은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티셔츠에 ‘날아라, 샐리 라이드(Ride, Sally Ride)’라는 페미니즘적인 슬로건을 새기게 만들었다.



3. 세계 최초의 여성 우주 비행사, 발렌티나 테레시코바


샐리 라이드가 미국인으로서는 우주로 나간 최초의 여성이었지만, 여성 전체로서는 세 번째였다. 라이드가 플로리다의 케네디 우주 센터에서 발사되기 20년 전, 소련 공군의 중위였던 발렌티나 테레시코바(Valentina Tereshkova)가 보스토크 6호(Vostok 6)를 타고 궤도에 오르면서 우주를 비행한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그녀의 비행은 유리 가가린(Yuri Gagarin)이 남성 최초로 같은 일을 해낸 지 불과 2년 만이었던 1963년 6월 16일에 이뤄졌다.

테레시코바는 당시 페미니즘의 아이콘으로 추앙 받았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그렇지만 그녀의 비행은 많은 이들이 바랐던 우주 비행에서의 여성 해방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상당히 놀라운 사실은, 지금까지도 그녀가 우주선을 타고 단독으로 비행한 유일한 여성이자, 우주를 비행했던 최연소의 여성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발렌티나 테레시코바의 우주 비행 성공을 기념하는 우표 ©Adobe Stock
그때는 확실히 다른 시대였다. 뉴스 통신사인 국제합동통신(UPI)은 “우주에 나간 최초의 여성이 공산주의자 여성들로부터 환영받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발행했다. “여성의 권리, 평화, 군축을 촉진한다는 공개적인 목표를 갖고 열린 4일간의 회의에서 여성들이 그녀의 업적을 인정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소련의 선전 매체들은 서방에 비해 공산주의 체제에서 여성들에게 기회가 더 많다는 증거로 테레시코바 양의 사례를 이용하고 있다. 소련 당국은 서방에서 수백만 명의 여성들이 억압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보도 역시 거만하며 삐딱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삐딱한 시선이 틀린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매체의 보도를 보면 소련의 수장이었던 니키타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가 “테레시코바 양으로부터 키스를 얻어내기 위하여 자랑스러운 연설을 방해했다”고 한다.

사실 소련에게는 여성을 우주로 보내려는 의도가 딱히 없었다. 그러나 1961년, 우주 비행사 훈련 담당 국장이었던 니콜라이 카마닌(Nikolai Kamanin)은 미국이 그런 계획을 고려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것이 “소련 여성들의 애국심에 대한 모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카마닌의 정보는 잘못된 것이었다. 미국은 여성을 우주로 보내려는 계획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사와는 별개로, 의사인 윌리엄 랜돌프 러블레이스(William Randolph Lovelace)는 개인적으로 ‘우주의 여성들(Women in Space)’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13명의 미국 여성들이 우주 비행을 위한 심리 평가를 받고 있었는데, 이것이 아마 카마닌에게 전달된 부정확한 정보의 원천이었을 것이다.

이유가 어떻든 간에 그는 행동으로 옮겼다. 1962년 1월까지 400명의 후보생이 선발되었는데, 그들은 모두 낙하산 부대원들이었다. 한 달 뒤에 그 수는 다섯 명으로 줄어들었다. 그쯤 되자 그들은 자신들 가운데 오직 한 명만이 우주를 비행할 것이며, 나머지는 은퇴할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는 그들이 그저 선전 사업의 일부였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이 비행에서 테레시코바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발렌티나 포노마료바(Valentina Ponomaryova)는 최종 단계에서 탈락했다. 면접에서 그녀가 소비에트의 정치적인 견해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력한 페미니즘적 견해를 갖고 있음이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소련이 우주 탐사 프로그램에서 공언하던 평등주의는 언제나 허울뿐이었다.

1991년에 소련의 미르(Mir) 우주 정거장으로 날아가서 우주를 비행한 최초의 영국인 헬렌 샤먼(Helen Sharman)은 이렇게 말했다. “전부 최초를 두고 미국과 벌이는 경쟁이었습니다. 지구 궤도에 올라간 최초의 우주선, 우주로 나간 최초의 인간. 참고로 당시에는 언제나 남자들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우주로 나간 최초의 여성, 최초로 우주를 유영하는 사람 등이 그렇습니다. 비록 소련에서 여성들이 기술자, 의사, 농부로 일하는 것이 흔했다 하더라도, 그곳은 여전히 가부장적 사회였습니다. 여성들을 어머니이자 가정주부로 규정한 전통적인 가치들은 여전히 지속되었습니다.”

카마닌은 여성 우주 비행사들을 “치마 입은 가가린”이라고 멸시하듯 말했다. 그에게 있어서 여성을 우주로 보내는 것은 그저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한편 테레시코바가 비행하는 동안 그녀가 너무 아파서 자신의 직무를 아무것도 수행하지 못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이 소문의 진원지 또한 카마닌이었을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나중에 여성 우주 비행사들을 추가로 우주에 보내지 않기 위한 핑계로 사용되었다. 테레시코바는 언제나 이런 소문을 부인했으며, 현재는 역사학자들도 그 소문이 사실이 아니었다고 인정한다.

테레시코바의 비행에는 이런 시시한 뒷말이 따라붙었지만 이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업적은 놀라운 것이었다. 정치적 목적이 작용한다더라도 뛰어난 업적은 그 배경의 동기를 압도한다. 그녀는 소련 관료 체제의 의도치 않은 꼭두각시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녀는 다른 모든 남성 우주 비행사들과 동등한 수준으로 공부하고 훈련하고 시뮬레이션 비행을 해야만 했다. 이는 심지어 남성들도 통과하기 어려운 훈련이었으며, 당시는 안전을 최우선으로 다루거나 보장해주지도 않을 때였다.

실제로 자신을 실어 나를 우주선에 대한 예리한 시각과 이해가 없었다면 테레시코바는 어쩌면 우주에서 사망한 최초의 여성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발사 직후에 그녀는 지구 재진입을 위한 캡슐 시스템이 지상의 엔지니어들에 의해 잘못 설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관제 센터와 논쟁을 벌였다. 결국 그들은 그녀가 옳다는 걸 깨달았고, 그녀의 임무 연장을 위해 필요한 새로운 설정을 보냈다. 그들은 또한 그녀에게 그걸 비밀로 하라고 욕설을 하기도 했다. 테레시코바는 전원 남성으로 구성된 지상의 직원들은 그들의 잘못을 여성 한 명이 발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원하지 않았을 거라고 추정한다.

테레시코바는 레닌 훈장(Order of Lenin)을 받았고, 소비에트연방 영웅(Hero of the Soviet Union)이 되었다. 그녀는 1991년에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될 때까지 공산당의 헌신적인 당원으로 남아 있었으며, 소비에트의 마지막 수장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의 개혁에 맞서는 확고한 반대자였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결국 그녀를 우주로 보냈던 국가의 붕괴로 이어졌다. 그녀는 요즘에도 자신의 견해를 묻는 인터뷰에서 종종 이렇게 말한다. “저는 그의 이름을 듣고 싶지 않습니다. 소비에트연방이 실수하긴 했지만, 그들의 업적까지 무시하는 건 잘못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에게 소비에트는 위대한 국가였습니다.”

소비에트에 대한 애국심은 그녀가 이후에 취하게 되는 정치적 방향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 테레시코바는 러시아의 권위주의적 지도자인 블라디미르 푸틴을 지지해 왔다. 적어도 서방의 시선에서 보기에 자신의 평판을 다소 더럽혀 온 셈이다. 그녀는 푸틴이 속한 통합러시아당의 후보로 출마하여 국가 두마(State Duma·러시아 연방의회 하원)에서 의석을 차지했다. 85세의 그녀는 여전히 엄격한 인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종종 보이는 웃음기 없는 표정은 마치 그녀가 60년 전에 보스토크 6호에 올라서던 그날처럼 투지에 넘쳐 보인다.

“제가 모스크바 북쪽의 스타시티(Star City)에서 훈련할 때였습니다. 저는 언제나 초기 우주 비행사들에 대한 경외심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발렌티나 테레시코바에게 그랬습니다.” 샤먼의 말이다. “그곳에서 그녀를 개인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저를 비롯한 승무원들의 송별 조찬회에 오겠다고 약속했는데, 그 행사는 우리가 발사를 위해 카자흐스탄으로 떠나기 전에 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언제나 여성 우주 비행사들에 대한 지지를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세계 전역에서 열리는 다양한 행사에서 서로 마주칩니다. 최근에는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그러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발렌티나는 언제나 모든 여성 우주 비행사들이 함께 모여서 사진을 찍자고 합니다.”

이제 미국은 테레시코바의 현시대 후계자를 찾으려고 하고 있다. 달 표면을 걷는 최초의 여성은 우주로 나간 최초의 여성이 그랬던 것처럼 열렬히 찬사를 받을 것이다. 최초로 달 위를 걸었던 닐 암스트롱, 최초의 우주인이었던 가가린이 오늘날 찬양받는 것만큼이나 많은 찬사를 받을 것이다. 마골리스는 선발 절차가 철저할 테지만, “그것은 나사의 우주 비행사 사무국의 권한이며, 나사는 이 절차에 대해서 대체로 언급을 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그저 누가 선발되는지를 기다리면서 지켜봐야 할 것이다.

샤먼은 그게 발표될 날, 그리고 여성이 달 위를 걷게 될 날을 고대하고 있다. 한편 샤먼은 테레시코바의 업적이 그에 상응할 만큼 탁월함에도 때로는 그녀의 성취가 우주 탐사 경쟁국 사이의 선전전에 파묻힌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나사의 언론과 홍보 시스템이 좋기 때문에 우리는 샐리 라이드를 잊지 않고 있으며, 두 명의 미국 여성이 함께 우주 유영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영국의 정치는 러시아보다는 미국 쪽에 더 기울어 있어서 우리의 교육과 문화에는 미국의 업적이 러시아의 성취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녀는 테레시코바의 위업이 오늘날 때로는 과소평가 된다고 느낀다.

그 이후로 여성들이 해방을 위해 싸워 온 60년이라는 시간과 역사를 돌이켜 보자면, 그녀가 우주 비행을 하게 된 배후의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발렌티나 테레시코바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보스토크 6호에 탑승한 그녀의 비행은 남성 동료들이 한 것만큼이나 성공적이었으며 완벽했다. 현재까지 75명의 여성이 수행한 우주 비행의 역사에서 그녀는 기준점을 세웠다. 그리고 페미니즘의 롤 모델로도 여전히 남아 있다. 머지않아 한 명의 여성이 달 위를 걸을 것이다. 그리고 한때 테레시코바에게 주어졌던 명성은 그녀의 어깨로 옮겨갈 것이다. 그 무게감은 엄청날 것이다.
[1]
제이크 가른(Jake Garn), 빌 넬슨(Bill Nelson)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신가요?
프라임 멤버가 되시고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 이용하세요.
프라임 가입하기
추천 콘텐츠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