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욘드 핸디캡
8화

고아라; 내게 정착한 세 가지 모국어

몸집이 큰 언어


고아라는 발레리나이자 모델이다. 어릴 적 고열로 청각이 소실된 뒤, 작은 입 모양에 집중하는 학교 수업보다 동작이 큰 발레에 흥미를 느꼈다. 서울 덕원예술고등학교에서 발레를 배우고 경희대학교 및 동 대학원 무용과를 졸업했다. 한국발레협회, 전국장애인체전 개막식 등에서 다수 공연 경력이 있으며 2018 평창 동계패럴림픽 폐막식 공연 〈우리가 세상을 움직인다 : 꽃이 된 그대〉에서 주역을 맡았다.

고아라에게 모국어는 세 가지다. 말로 하는 한국어, 손으로 표현하는 수어, 몸으로 보여 주는 발레다. 소통에서 중요한 것은 완벽한 문법이 아닌 각자의 개성과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프리랜서로서 발레뿐 아니라 현대 무용, 컨템포러리 댄스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 가고 있다. 장애인 예술가와 비장애인 예술가가 동등하게 활동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고민한다.
어릴 적 나는 무용 학원 봉고차가 집 앞으로 오는 시간만을 기다렸다. 서예, 피아노, 컴퓨터, 속셈 등 안 다녀 본 학원이 없는데 그중 유일하게 무용 학원 가는 날을 기다렸다. 어머니 손에 이끌려 처음 학원에 간 날, 나는 어머니와 원장 선생님이 나누는 이야기는 한 귀로 흘린 채 한 면이 전부 거울로 된 벽과 마룻바닥만 신기한 듯 구경했다.

한국 무용과 발레 둘 다 배울 수 있는 학원이었다. 귀가 들리지 않는 내겐 국악의 장구 소리가 진동처럼 명확하게 들려 따라 하기 수월했지만, 한국 무용보다 발레가 훨씬 예뻐 보였다. 우산 모양의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발끝으로 날아다니듯 춤을 추는 것이 마치 동화 속 한 장면 같았다.

또 발레는 공부보다 쉬웠다. 특수 학교 유치원에서 청각 장애가 있는 친구들과 같은 속도로 말하던 나는, 일곱 살 때 일반 유치원으로 옮기며 처음으로 ‘장애’라는 단어를 알게 됐다. 새로운 환경에서 만난 친구들은 나보다 말하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ㄴ데’, ‘~ㅆ어’와 같은 말의 어미나 조사만 들리기 시작했고 정작 중요한 단어는 잘 들리지 않았다. 사람의 입 모양을 관찰해 가며 공부해야 했던 내게, 커다란 몸동작을 따라 하는 발레는 이해하기 쉬운 언어였다.

하지만 강원도 시골의 무용 학원에서 발레를 제대로 배웠을 리가 없다. 특히 몸의 뼈와 근육을 인위적으로 돌리는 고난이도 기술들을 말이다. 당시 동네에서도 나름 크고 유명한 학원을 찾아간 것이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발레 기술에 대한 아무런 지식 없이 그저 유연성만 기르면 다인 줄 알았다.

열네 살, 하루는 어머니가 잡지에서 모스크바 국립 발레 학교(구 볼쇼이 발레 학교)에 객원 교수로 계시던 한 교수님의 인터뷰를 보셨다. 그분은 대한민국의 1세대 발레리노로서 명망 높은 유니버설 발레단 출신에 당시 러시아 발레 학교 교수로도 위촉되신 분이었다. 인터뷰엔 러시아 발레 학교에 연수를 다녀올 학생을 모집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개천에서 난 자식을 잘 키워 보겠다는 마음인지 어머니는 내게 그 교수님을 만나러 가자고 하셨다. 어머니는 내가 세 살일 때부터 나를 데리고 서울과 원주를 오가며 구화 교육을 시킬 정도의 강단이 있는 분이었다. 이번에도 교수님을 뵙기 위해 서울 기행 한 번쯤은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강남이라는 곳은 서울 시내 중에서도 가장 복잡하기로 손꼽는 곳 아닌가. 어머니는 무더운 여름날 찰옥수수 한 박스를 들고 어린 딸과 함께 강남 한복판을 30분간 헤맨 끝에 교수님을 만날 수 있었다.

손가락 서너 마디 길이의 까만 수염과 달리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게 깔끔하게 넘긴 머리. 한없이 온화한 인상의 교수님께서 로비에 나와 우리를 맞이해 주셨다. 그는 자신이 갖고 있던 책이라며 내게 러시아 발레 잡지 한 권을 건네주셨다. 오페라 〈카르멘〉의 붉은 의상을 입고 머리에 장미꽃을 단 외국인 발레리나가 실린 표지는 아직도 내 머릿속에 선명하다.

나는 교수님의 지도하에 열 명의 학생들과 함께 연수에 참가하게 됐다. 한국과 러시아 수교 이래 최초로 우리나라 학생들이 러시아로 가서 2주간 연수에 참여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겨울 방학 연수 기간이 다가오는 내내 내 마음은 이미 러시아에 있었다. 그렇게 고대하던 출국일, 장장 9시간을 날아 러시아 발레 학교에 도착한 나는 로비에 걸린 졸업생들의 사진에 압도당했다. 사진 속 발레리나들은 6시 정각 시계 모양으로 한쪽 발은 토슈즈 끝으로 서고, 다른 발은 높게 쳐들고 있었다. 그러고서 한 손에는 탬버린을 들고 완벽한 균형을 잡고 있던 모습에 나는 단 한 장의 사진만으로도 노력과 열정의 위압감을 느꼈다.

2주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러시아에서의 경험은 신선한 충격과 동시에 부끄러움을 안겨 주었다. 러시아 타 지역과 해외 각국에서 유학 온 학생들과 함께 연습했다. 수준 높은 실력은 물론 수업 전후로 자발적으로 훈련하는 모습, 사소한 걸음걸이까지 다르던 학생들에게선 존재 자체만으로도 아우라가 느껴졌다. 발레를 시작한 지 무려 8년이 지나서야 내가 알던 발레는 진짜 발레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한국에 돌아온 뒤 어머니는 내게 예술 고등학교 진학을 제안하셨다. 나 또한 제대로 발레를 배우고 싶던 욕심에 1초의 고민도 없이 그러고 싶다고 했다. 마침 교수님께서 서울에 모스크바 국립 발레 학교의 분교를 열어, 어머니는 주말마다 나를 서울로 레슨을 보내 주셨다. 그곳에서 나는 러시아인 선생님을 만나 발레를 처음부터 다시 배웠다. 발레 기술의 기본이 되는 속 근육 ‘코어’를 키우는 법도 처음 배웠다. 하루에 레슨을 두 번 받는 날도 있었다. 실기 시험이 가까워지는 동안 나는 거의 서울에 살다시피 하며 연습한 결과 간신히 예술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눈으로 듣고 마음으로 읽다


주변 사람들은 나를 보며 “고아라는 꿈꾸는 대로 이루어질 사람”이라고 얘기했다. 청각 장애를 가진 아이가 발레를 하겠다며 시골에서 서울까지 간 것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단체 실기 시간에는 친구들의 동작을 보며 따라 할 수 있었으나 개인 레슨 때는 선생님과 얼굴을 가까이 마주하고 막힘 없이 대화해야 했다. 입시철에는 스트레스가 더 컸다. 장애인은 수능의 경우 특별 전형으로 국어, 외국어 영역에서 대본을 받아 시험을 치를 수 있지만 발레 실기의 경우 특별 전형이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대학 예체능 입시는 일반 전형으로만 지원할 수 있었다.

산 넘어 산이라고, 대학에 가니 스스로 해결할 것들이 더 많아졌다. 2007년 대학 무용과에 입학했을 당시 갓 생긴 학내 장애학생지원센터는 지금만큼 통역 지원 제도가 잘 갖춰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가장 먼저 강의실에 도착해 맨 앞자리에 앉고, 수업이 끝난 뒤에도 강의 내용 중 듣지 못한 부분을 교수님께 따로 질문하는 학생이었다.

대학 2학년이 되며 학교 발레단에서 주역의 기회가 찾아왔다. 주변 사람들은 물론 나 스스로도 의아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실력이 아닌 나이와 학번 순으로 주역이나 솔리스트 역할을 선발하는 관습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역을 맡게 된 기쁨은 잠깐, 커다란 문제가 생겼다. 이제까진 다 같이 춤을 춰왔기 때문에 옆 사람의 눈치를 보며 동작을 맞추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주역은 춤을 혼자서 추는 것은 물론, 음악도 혼자 들어야 했던 것이다.

들을 수는 없어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음악 편집 프로그램을 다운로드해서 스크린에 뜨는 음악의 속도와 박자를 눈으로 익혔다. 눈을 감고도 머릿속으로 음악을 따라갈 수 있는지 스스로 시험해 봤다. 4분 길이의 음악에 처음부터 끝까지 안무를 맞추고 익숙해지는 데 무려 3개월이 걸렸다.

그만큼 꿈을 위해 포기한 것이 많았다. 친구들끼리 맛있는 것을 사먹고 쇼핑을 다니는 시간보다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주변 사람들의 관심과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이미지 관리에 급급했다. 졸업 시기가 다가왔을 때 결국 내가 택한 곳은 대학원이었다. 학업을 연장하라는 교수님의 권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대학을 나오면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던 이유가 컸다.

대학원으로 가며 조금씩 어긋났다. 외부 활동을 하려 할 때마다 교수님께 거절당하기 십상이었고, 강사분들의 비위를 맞추기도 어려웠다. 이게 과연 내가 원하던 방향이었는지 회의감이 들었고 세상이 벅차게 느껴졌다. 결국 슬럼프가 찾아왔다. 불안한 마음을 안고 대학원 졸업 논문을 쓰는 내내 도망칠 곳을 찾았다. 논문 심사를 앞두면서 가벼운 공황 장애와 우울증이 찾아왔다. 이즈음엔 오히려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제약보다도 내가 처한 상황을 잘 버텨낼 수 없다는 불안감이 컸다.

그때 나의 플랜 B는 몽골이었다. 청각 장애인 미인 대회 미스 데프 코리아(Miss Deaf Korea)에서 만난 한 친구가 몽골에 살고 있었다. 영상 통화에서 ‘몽골로 오라’는 그의 손짓 하나에 마음이 흔들렸다. 논문 심사를 통과한 즉시 나는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고 옷가지만 챙겨 무작정 몽골로 2000킬로미터를 날아갔다. 어디를 가고 무엇을 먹는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그저 내가 달려온 길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오프로드, 몽골로


기대했던 청명한 이미지와 달리 몽골의 첫인상은 스산한 잿빛이었다. ‘칭기즈 칸 공항’이라는 거창한 이름에 걸맞지 않게 내가 도착한 낡고 한산한 공항의 크기는 버스 터미널만 했다. 영상 통화로만 얘기를 나누던 몽골인 친구가 마중 나와 있었고, 나는 친구의 집에 머무르기로 한 참이었다. 친구의 가족이 모는 차에 몸을 싣고 아침부터 해 질 녘까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종일 달렸다. 어차피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하고 연락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몽골인의 머릿속에는 GPS가 달렸을까? 도시를 벗어나며 바라본 차창 밖으론 뿌연 안개와 연기가 마구 뒤섞여 날리는데도 친구의 가족은 능숙하게 차를 몰았다. 어설프게 포장된 아스팔트 도로가 끊기고 모래 먼지 속으로 들어서며 나는 오프로드가 시작되리라 예감했다. 몽골 대제국을 세운 칭기즈 칸의 고향인 헨티 아이막(Khenti aimag)을 거쳐, 가장 먼저 다다른 곳은 칭기즈 칸이 왕으로 추대된 신성지 후흐 (노르Khukh Lake)였다. 모든 곳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여도 걷다 보면 멀리 있었다. 높은 건물이 빽빽이 들어선 한국이 오히려 이질적인 풍경처럼 느껴질 정도로 이곳은 겪어 본 적 없는 세상이었다. 누군가 나를 끌고 한참을 돌아다니다 지구의 민머리 한가운데에 던져 놓은 것 같았다.

첫 며칠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몽골과 나 사이에 어색함이 감돌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몇 시인지도 모른 채 해가 뜨고 지는 풍경을 보며 아무런 할 일이 없다는 게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만큼 시간으로부터 멀어진 적도 처음이었다. 함께 지내는 몽골인들로부터 몽골의 사회주의 혁명, 급격한 도시화에 대한 역사를 전해 들었으나 그보다 나를 감명시킨 건 그들 생활에 배어 있던 안온함이었다. 시큼한 아롤[1]과 아이락[2] 삭는 냄새가 좋았고 물이 귀한 초원에서 물을 길으러 멀리까지 이동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평화로웠다.

잠깐의 몽골 생활은 한국에 돌아온 이후 내 삶의 방식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어차피 감당치 못할 것은 내려놓고, 무리한 요구를 거절하는 법도 터득하며 나름의 안식년을 즐겼다. 시간이 약이었는지 나를 찾아 주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기 시작했고, 마음의 여유가 생긴 덕에 이전처럼 부담스럽지 않게 공연 제안에 응했다. 2018 평창 동계패럴림픽이 다가올 즈음, 폐막식 공연의 주역으로 서달라는 섭외까지 들어왔다. 연락이 올 거라곤 꿈도 꾸지 못했다. 제안받은 공연은 ‘꽃’을 주제로 한 무대였다. 60명의 무용수와 50명의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이 호흡을 맞추는 큰 무대였고 무엇보다 모든 음악과 의상, 조명이 나를 중심으로 관객 앞에 서는 기회였다. 나는 장애와 비장애를 포함한 모든 경계를 허무는 꽃이자 세상을 움직이는 역할을 맡았다. 그저 TV에 나오는 홍보 무대를 볼 때마다 ‘나도 저런 무대에 한번 서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무대에, 내가 주역이 되어 폐막식 공연을 마무리했다.
 

랑그와 파롤의 새로운 규칙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어릴 때까지만 해도 수어가 동물들이나 나누는 야만적인 대화라고 생각했다. 대학원 시절 출전한 미스 데프 월드(Miss Deaf World)[3]에서 외국 농인 친구들과 교류하며 처음으로 국제 수어를 배웠다. 이후 한국에 돌아왔을 때, 한 지인으로부터 “너가 아무리 말을 잘해도 언젠간 수어도 네게 필요한 언어가 될 거야”라는 말을 들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무리 기술과 인터넷이 발달하고 보청기나 인공 와우만으로 발화가 가능하다 해도 대화의 어려움을 100퍼센트 해결해 주지 않는다. 그 불편을 해결하기 위해 문자 통역과 시각적인 수어가 필요했다. 반오십이 넘은 후에야 나는 손로도 말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2016년, 수어로 대화할 수준이 됐을 때였다. 수어를 권유했던 지인의 추천으로 여러 농인이 함께 스쿠버 다이빙을 배우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다이빙 풀에서 기본 기술에 익숙해질 때쯤 진짜 바닷속으로 들어가게 됐다. 바닷속에서는 음성 언어가 불가능한 대신 수어로 소통이 가능했다. 비장애인들은 스쿠버 다이빙에서 몇 가지 수신호를 주로 사용한다. 하지만 수어는 차원이 달랐다. 본인의 안전이나 감정은 기본이요,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수다 수준의 이야기까지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수면 위에선 농인만의 언어인 수어가 물속에 들어가면 장애인, 비장애인 할 것 없이 함께 사용하는 언어였다. 환경에 따라 언어의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는 그렇게 쉽게 깨질 수 있다는 것을 부지불식간에 깨달았다.
수어에 익숙해지며 정체성의 혼란이 찾아왔다. 나는 농인인가 난청인인가?[4] 음성 언어를 쓰기도 하니 비장애인 아닐까? 또 나의 모국어는 무엇일까. 한국 음성 언어일까, 20년 넘게 나를 표현해 온 춤일까, 아니면 제일 늦게 배운 수어일까? 내 안에서 세 가지 언어가 충돌하기 시작했다. 늑대 무리에서 발견된 아이가 사회로 이끌려 나와서도 여전히 늑대처럼 행동하며 평생 문명의 말을 배우지 못했다는 이야기처럼, 나도 ‘평생 어느 한 언어도 완전히 익히지 못한 채 세 가지 언어를 불완전하게 구사하며 살아가진 않을까’라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런 나를 위로해 준 건 소쉬르의 언어 이론이었다. 언어학자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는 언어를 랑그와 파롤로 나누었다. 랑그(Langue)는 추상적인 언어 체계로, 문법과 같이 우리가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여러 사람 사이에서 약속된 것이다. 반면 파롤(Parol)은 구체적인 발화이자 개인의 언술이다. 우리가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할 때, 목소리나 억양 등 개인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발화를 파롤이라 한다. 나는 청력의 소실이 많지 않은 청인으로 비장애인의 랑그를 배우며 자랐다. 하지만 그 속에서 나만의 규칙들이 점차 침범을 만들어 냈다. 그게 춤이나 몸짓, 늦게나마 배운 수어와 같은 나만의 파롤이고 오히려 내가 발레에서 가진 큰 장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정체성에 대한 고민, ‘다른 사람들이 쓰는 말을 완전히 배우는 건 영원히 불가능할까’와 같은 고민은 필요 없어졌다.

대신 내가 가진 언어가 어떤 새로운 꿈과 연결될지 고민한다. 한 공영 방송국 라디오에 게스트로 참여했을 때, 담당 PD가 “장애인 관련 프로그램을 10년 넘게 맡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나처럼 구화를 하는 청각 장애인은 처음”이라고 했다. 청각 장애인이 수어로만 대화할 거라고 생각하는 비장애인의 인식이 내겐 충격적이었다. 그때부터 여러 기관에 강연을 나서기 시작하고, 청각 장애인 학생들의 진로 고민을 돕는 멘토링 프로그램도 참여했다. 언젠가는 장애인 예술계 단체를 만들어, 창작 활동을 하는 장애인들이 사회에 나갈 기회를 직접 만드는 CEO가 되겠다는 결심도 했다.

최근엔 지휘 인지 장치 ‘버즈비트’를 사용해 공연했다. 버즈비트는 원래 지휘자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시각 장애인 연주자를 위한 것으로, 지휘자가 팔을 움직일 때 지휘봉에서 나오는 동작을 감지해 진동하는 장치다. 내가 참여한 프로젝트는 청각 장애인을 위한 기술을 추가한 버즈비트를 손목에 착용하고 공연하는 것이었다. 비록 아직은 지휘자의 몸짓에 의존한 장치이지만, 기술이 발달한다면 지휘자 없이 음악에 맞는 진동을 느끼며 마음 편히 연습할 날도 올 것이다.

나는 꿈을 세 가지로 생각한다. 되고 싶다, 하고 싶다, 돼야 한다. ‘되고 싶다’는 건 막연한 바람이다. 누구나 어릴 적 커서 무엇이 되고 싶다고 상상할 수 있다. ‘하고 싶다’는 그보단 구체적인 행동이 드러나는 의지다. 하지만 정말로 그 꿈을 이루고자 마음먹으면 내가 생각하는 바로 그 사람이 ‘돼야 한다’는 부담감이 생긴다. 나는 발레에 있어서는 세 가지 꿈을 이미 이뤘다. 그래서 이젠 다른 꿈을 고민한다. 나는 앞으로 발레리나 말고 무엇이 되고 싶고 어떤 일을 하고 싶으며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사회적 랑그를 유연하게 넘나들며 나의 세 가지 파롤을 가장 잘 전하는 일을 하고 싶다.
[1]

우유를 끓일 때 위에 뜬 기름을 걷어 굳히고 남은 우유를 다시 끓여 만든 몽골식 간식.

[2]

말의 젖을 발효시켜 만든 마유주의 일종.

[3]

청각 장애인 비영리 단체 미스 앤 미스터 데프 월드(Miss and Mister Deaf World)가 주관하는 세계 청각 장애인 미인 대회.

[4]
청각 장애인은 흔히 농인과 난청인으로 나뉜다. 농인의 사전적 의미는 청력이 거의 손실된 사람이다. 난청인의 사전적 의미는 귀만으로 말을 듣고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다. 그러나 농인 세계에선 ‘청각 장애’ 등 장애를 포함하는 차별적인 언어 사용은 지양한다. 따라서 대다수의 농인은 수어라는 고유한 언어 체계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농인’이라 지칭하고, 음성 언어를 쓰는 사람들을 ‘구화인’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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