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의 주간이었습니다.
윤석열 정부가 공식적으로 출범한 것입니다. 날씨도 좋았고,
상서로웠다는 얘기까지 나왔습니다. 지금이 중세도 아니고, 이런 단어의 선택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삐딱한 생각도 들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원해 봅니다. 우리 모두를 위해 이 시작이 좋은 방향을 향하고 있기를, 그리고 5년 뒤 우리의 궤적이 옳고 현명했다고 평가할 수 있기를 말입니다.
취임식 이모저모가 생중계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취임사에 많은 관심이 쏟아졌죠. 사실, 대통령의 취임사는 언제나 분석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새 정부의 철학과 정책 방향을 대내외적으로 선언하는 연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번 윤석열 정부의 취임사에 쏠린 관심에는 ‘윤석열’이라는 정치인에 관한 관심도 섞여 있었습니다. 정치 입문 1년 만에 대통령이 된 윤 대통령에 대해, 우리는 아직 잘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윤석열 대통령의 첫 일성은 ‘자유’와 ‘반지성주의’였습니다.
‘자유’라는 단어는 사실 어느 정도 예측 가능했던 내용입니다. 윤 대통령은 미국 신자유주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의 저서 《선택할 자유》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벌써부터 경제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새 정부의 기조는 규제 완화, 작은 정부라고 분석을 내놓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반지성주의’는 의외였습니다. 뜬금없다는 느낌마저 들게 한, 예상을 뒤엎은 내용입니다.
사실, 대다수의 언론사는 엠바고가 걸린 취임사를 받기 직전까지는 ‘통합’이 주요한 키워드가 될 것으로 보고 관련 기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뒷이야기를 들어보면, 참모들이 작업했던 취임사 초안에는 ‘통합’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받아 든 윤 대통령이 직접 수정한 결과, ‘통합’이라는 단어는 사라지고 ‘반지성주의’라는 단어가 추가된 것입니다. 물론 윤 대통령은 ‘통합’이 언급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라고 추후 단서를 달았습니다만, 그럼에도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통합’을 이야기하는 대신 ‘반지성주의’를 이야기한 대통령에게, ‘반지성주의’는 대체 무엇이며 누가 ‘반지성주의’를 주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말입니다.
반공하기 위해, 혐오하기 위해
반지성주의라는 용어를 가장 처음 사용한 것은 미국의 역사가, 리처드 호프스태더입니다. 모두가 극단적인 반공주의에 사로잡혀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부정당했던 1960년대, 《미국의 반지성주의》라는 저서를 통해 자신과 견해가 다른 이들을 감시하고 색출, 탄압했던 매카시즘을 비판했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세워진 ‘반공’이라는 가치 앞에 그 어떤 논리도, 지성도, 비판도 힘을 가질 수 없는 현실을 고발했습니다.
모두가 어떤 이념을 ‘믿도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외부의 적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공포와 혐오가 섞여 만들어 낸 적대적인 기운이 사회를 지배하게 되면 더 이상 그 어떤 의심도, 질문도 허용되지 않는 전체주의적 체제가 완성됩니다. 1960년대의 미국이 그러했습니다.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풍경입니다.
지성은 의심과 질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모두가 옳다고 믿고 있는 ‘진리’가 정말 옳은 것인지 의심하고 질문하는 것이 이른바 ‘지성인’의 의무입니다.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새로운 진리를 만나기도 하고, 혁신의 씨앗이 되는 발견을 손에 쥐게 됩니다.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지성인의 역할은 의심하고 질문하여 답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반공을 위해 설계된 사회에서는 그 어떤 의심도, 질문도 죄악시되었습니다. 그리고 의심하고 질문하는 사람들, ‘지성인’에 대한 조직적인 무시가 팽배했습니다. 호프스태더는 바로 이러한 풍조를 지적했습니다. 전문가를 혐오하고 아마추어를 옹호하는 것, 쓸모를 모르겠다면서 순수과학을 멸시하는 것, 대학이나 연구소 등의 지적 독립성을 비난하는 것, 전위적 예술 사조를 무시하는 것, 과학보다 종교를 우위에 놓는 것 등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당시에는 국가를 위해, 체제를 지키기 위해 이 모든 행위가 정당화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반지성주의입니다. 계속해서 믿기 위해 더 알기를 거부하는 행위, 혐오하기 위해 지성을 거부하는 행위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런 상황을 지난주에 마주했습니다. 위안부 피해 배상금을 ‘밀린 화대’에 빗대거나 “동성애는 정신병의 일종”이라는 글을 자신의 SNS에 개재했던 김성회 전 종교다문화비서관의 이야깁니다. 불행한 이야기입니다만, 우리 사회에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러한 ‘신념’을 지켜나갈 수 있는 까닭이 바로 반지성주의입니다. 연구와 논리를 근거로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해도 듣지 않습니다. 지성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자신이 믿어온 것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그럴 만한 용기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