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새로운 진화론이 필요하다
완결

우리에겐 새로운 진화론이 필요하다

진화론을 의심해 봐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종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찰스 다윈을 풍자한 19세기 프랑스의 만평 ©Photograph: Alamy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과학자들은 지구상에서 생물이 어떻게 진화했는지, 이에 관한 기본적인 질문에도 답하지 못하고 있다. 눈을 예로 들어보자. 도대체 눈은 어디에서 나타난 것일까? 우리 인간이 어떻게 이처럼 놀라울 정도로 복잡한 기관을 갖게 되었는지에 관한 설명은 주로 자연선택 이론에 의지하고 있다.

생물 수업 시간에 배운 내용을 떠올려 보자. 시력이 나쁜 어떤 생명체가 무작위적인 돌연변이에 의해 시력이 조금 더 나은 새끼를 낳게 된다면, 약간이긴 하더라도 그렇게 조금 더 나아진 시력은 그들에게 더욱더 많은 생존의 기회를 부여하게 된다. 그들이 더욱 오래 살아남을수록, 그들이 번식할 수 있는 기회는 더욱 늘어나며, 그렇게 해서 약간의 더 나은 시력을 가진 유전자를 후손에게 물려줄 가능성도 더욱 커지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후손 가운데 일부는 자기 조상들보다 더욱 나은 시력을 가질 수 있고, 그들 또한 그 덕분에 번식에 성공할 가능성이 더욱 커질 것이다. 이런 과정은 계속 이어진다. 세대에 세대를 거치면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기나긴 시간을 지나면서, 이처럼 미세하게 우월한 형질들은 점점 더 누적된다. 결국 수억 년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사람이나 고양이나 올빼미처럼 뛰어난 시력을 가진 생명체들을 볼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진화에 관한 기본적인 스토리이다. 그리고 이는 수많은 과학 교과서와 대중과학 베스트셀러를 통해서 수없이 반복되어 온 이야기이다. 그러나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과학자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설명이 터무니없는 정도로 엉터리이며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주류 이론은 진화에 관한 이야기를 중간 부분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들은 빛을 감지하는 세포나 수정체, 홍채 등의 존재를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지만, 그것이 애초에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이토록 민감하면서도 쉽게 부서질 수 있는 물질들이 어떻게 하나로 엮여서 단일한 기관을 형성하는 것인지에 관해서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 게다가 전통적인 이론이 무언가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을 겪는 건 단지 눈뿐만이 아니다. 인디애나대학교의 생물학자인 아르민 모체크(Armin Moczek)는 이렇게 말한다. “최초의 눈, 최초의 날개, 최초의 태반 등은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을까요. 이를 설명하는 것이 진화생물학의 근본적인 과제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정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어쩌다 일어나는 뜻밖의 행운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변화한다는 고전적인 설명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진화론의 핵심에는 어떠한 과학자도 진지하게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특정한 원칙들이 존재하고 있다. 돌연변이나 무작위적인 우연과 마찬가지로, 자연선택이 하나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모두가 동의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들이 정확히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는지, 그리고 여기에 관여하는 다른 영향들이 있는지가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예일대학교의 생물학자인 귄터 바그너(Günter Wagner)는 필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현재 가진 도구들로 무언가를 설명할 수 없다면,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 합니다.”

2014년, 여덟 명의 과학자들이 이러한 도전과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그들은 세계적인 저널 네이처(Nature)에 한 편의 글을 게재했다. 그들은 “진화론을 다시 생각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질문을 던졌고, 그들의 대답은 이것이었다. “그렇다, 그것도 긴급하게.” 이들 공동 저자는 강에 댐을 쌓는 비버처럼 생물들이 정상적인 자연선택의 압박을 줄이기 위하여 서식 환경을 바꾸는 방식에 관한 연구에서부터 인간의 DNA에 후천적으로 가해진 화학적 변화가 후손에게 전달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새로운 연구들에 이르기까지, 과학계에서도 최첨단으로 꼽히는 각종 분야에 몸담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진화에 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며, 이러한 발견을 모두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프레임워크에 대하여 ‘확장판 종합진화론(Extended Evolutionary Synthesis, EES)’이라는 다소 밋밋한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많은 동료 과학자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제안은 상당히 선동적인 것이었다.

2015년에 런던의 왕립학회(Royal Society)는 ‘진화의 새로운 트렌드(New Trends in Evolution)’라는 컨퍼런스를 주최하기로 했는데, 여기에서 위의 글을 쓴 저자 중 몇 명이 저명한 과학자들과 함께 발언할 예정이었다. 주최자들 가운데 한 명은 해당 행사의 취지에 대하여 “생물학에 관한 새로운 해석, 새로운 질문, 완전히 새로운 인과관계 등을 논의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참고로 왕립학회는 영국 내에서도 가장 역사가 깊으며 가장 높은 명성을 가진 과학단체이다. 그런데 이 컨퍼런스의 개최가 발표되자 왕립학회의 회원들 가운데 23명이 당시 회장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폴 너스 경(Sir Paul Nurse)에게 항의서한을 보냈다. 이 편지에 서명한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왕립학회가 그런 행사를 주최한다는 사실로 인하여 대중들에게 그쪽 진영의 생각이 주류로 편입되었다는 인식을 줄 수도 있다는 점이 수치스러웠습니다.” 너스 경은 이러한 반응에 깜짝 놀랐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제가 그 행사에 지나치게 많은 신뢰성을 부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렇지만 무언가를 논의하는 것 자체가 나쁠 건 없습니다.”

전통적인 진화론을 지지하는 학자들도 초대되었지만, 실제로 참석한 이들은 거의 없었다. 진화생물학자들에게는 가장 큰 영예라고 할 수 있는 다윈-월리스 메달(Darwin–Wallace Medal)을 2008년에 수상한 닉 바튼(Nick Barton)은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참석하지 않은 이유는 그런 기이한 활동에 더욱 기름을 붓게 될까 봐 염려되었기 때문입니다.” 에든버러대학교의 유명한 생물학자 부부인 브라이언 찰스워스(Brian Charlesworth)와 데보라 찰스워스(Deborah Charlesworth)는 그곳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가 그러한 주장의 전제가 “거슬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행사 이후에 진화이론학자인 제리 코인(Jerry Coyne)은 EES의 배후에 있는 과학자들이 그들 자신의 커리어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스스로 “혁명가”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썼다. 2017년에 발표된 어느 논문에서는 EES의 배후에 있는 이론가들 가운데 몇 명이 과학계 내부에서 점점 늘어나고 있는 “탈진실(post-truth) 성향의 과격파”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들에 대한 개인적인 공격과 비아냥거림이 “충격적”이며 “추악하다”고 말하는 과학자들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EES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은 계속되었다.

이처럼 격렬한 반발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선 이것은 현대의 기틀을 형성해준 위대한 이론 가운데 하나의 운명을 두고 벌이는 개념 싸움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과학계에서의 인정과 지위를 얻기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 이 분야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고 그렇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를 과연 누가 결정하게 되느냐를 두고 벌이는 승부이다. 메릴랜드대학교의 생명과학 및 생명공학연구소(IBBR)에서 근무하는 진화이론학자인 알린 스톨츠퍼스(Arlin Stoltzfus)는 “가장 중대한 문제는 생물학의 거대한 서사를 누가 쓰게 되느냐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의 이면에는 또 하나의 더욱 심오한 질문이 도사리고 있다. 바로 생물학에는 웅장한 서사가 있다는 생각이 한갓 동화에 불과할 수도 있으며, 우리가 결국엔 그러한 생각을 포기해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질문이다.

1. 종의 기원, 생명의 기원

진화론을 둘러싸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싸움의 이면에서 우리는 부서진 꿈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20세기 초에 많은 생물학자들은 자신들의 분야가 물리학이나 화학처럼 매우 엄격하며 기계론적인 과학의 반열에 들 수 있기를 바랐다. 당시, 물리학과 화학은 우주의 가장 근본적인 원칙들을 발가벗기고 있었다. 생물학도 그렇게 되려면 하나로 통일된 중심적인 이론이 필요했다. 그러한 이론이 없다면 생물학이 동물학이나 생화학과 같은 괴팍한 하위 분야들이 모여 있는 잡다한 학문으로 남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생물학은 어떠한 질문에 대해 답을 구할 때도 서로 간에 의견이 엇갈리는 수많은 전문가로부터 조언을 받아야 할 것이며, 그것마저도 논쟁의 사안이 될 수 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러한 상황에서 다윈의 진화론이야말로 바로 그 중심적인 이론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었다. 다윈의 진화론은 자연선택이라는 하나의 힘이 어떻게 지구상 모든 생명체의 발생을 뒷받침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주는 간단하면서도 우아한 이론이었다. 그러나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된 후 40년이 지나고 그의 사망으로부터 20년이 지나서 20세기로 넘어가던 무렵이 되자, 다윈이 제시한 아이디어는 점점 힘을 잃고 있었다. 당시 과학계의 간행물들에서는 ‘다윈설의 임종(The Death-bed of Darwinism)’과 같은 제목의 글들을 볼 수 있었다. 과학자들이 진화론에 흥미를 잃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많은 이들이 진화에 관한 다윈의 설명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던 것이다. 대표적인 문제는 바로 유전에 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다윈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생명체들이 환경에 더욱 잘 적응하기 위하여 변화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는 이처럼 미미한 변화들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어떻게 전달되는지를 밝혀내지는 못했다.

20세기 초가 되자 19세기의 수사(修士)이자 유전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그레고어 멘델(Gregor Mendel)의 연구가 재발견되면서 앞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유전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유전의 특성들을 지배하는 법칙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들의 발견은 다윈의 이론을 입증해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물리적인 형질을 설계하는 신비로운 단위인 유전자들이 번식 과정에서 놀라운 방식으로 재조합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붉은 머리가 아버지에게서는 나타나지 않았다가 손자에게서 다시 나타나는 경우를 생각해보라. 이렇게 작은 변화조차도 부모에게서 자식으로 확실하게 전달되지 않는다면, 자연선택은 대체 어떻게 작동한다는 것인가?

다윈주의자들에게 더욱 불길하게 다가온 것은 1910년대에 등장한 ‘돌연변이주의자(mutationist)’들이었는데, 이들은 유명한 스타였던 토머스 헌트 모건(Thomas Hunt Morgan)으로 대표되는 유전학자 집단이었다. 모건은 수백만 마리의 초파리 교배 실험을 통해서, 그리고 때로는 방사성 원소인 라듐을 먹이에 첨가하는 방법을 통해서 새로운 눈 색깔이나 다리를 추가하는 등의 돌연변이 형질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현상은 다윈 이론의 근거가 되는 무작위적이며 미세한 차이가 아니라, 갑작스럽고 급격한 변화였다. 그리고 이러한 돌연변이는 유전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돌연변이주의자들은 생명을 창조하는 진정한 힘을 확인했다고 믿었다. 물론 자연선택이 부적합한 변화들을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의 역할은 돌연변이라는 대서사시 일부를 단조롭게 편집하는 것에만 그치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다윈은 이렇게 썼다. “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Natura non facit saltum).” 그러나 돌연변이주의자들의 의견은 달랐다.

진화를 두고 벌어지는 이러한 논쟁은 신학적 분열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가장 첨예한 지점은 모든 창조 행위를 지배하는 힘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특히 다윈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진화론은 ‘모 아니면 도’였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만약 자연선택이 아닌 다른 어떤 힘으로 생명체들 사이에 발견되는 차이점을 설명할 수 있다면, 생명에 관한 그의 모든 이론은 “완전히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 썼다. 생물학적인 모든 변화를 지배하는 단 하나의 힘이 존재하지 않고, 그리고 돌연변이주의자들의 주장이 옳다면, 과학자들은 자연선택이 아니라 돌연변이의 원리에 대해서 더욱 깊이 파고들어야만 할 것이다. 돌연변이는 다리와 허파에서 다르게 작동하는가? 개구리에서의 돌연변이는 올빼미나 코끼리에서의 돌연변이와는 다르게 작동하는가?

1920년에 생물학자이자 철학자인 조지프 헨리 우저(Joseph Henry Woodger)는 생물학이 “정파”와 “분열” 때문에 고통받았으며, 이러한 특징은 “화학처럼 통합이 잘 된 학문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적었다. 그는 생물학계서는 서로 다른 그룹들끼리 자주 다투는데, 그 정도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생명과학의 분열 양상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으며, 공통의 언어로 이야기할 가능성은 점차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1942년 런던동물학회(ZSL)에서 연설하고 있는 영국의 생물학자 줄리언 헉슬리 ©Photograph: Felix Man/Getty Images

2. 권력에의 의지

이렇게 다윈주의가 묻혀버릴 수도 있을 것처럼 보였지만, 통계학자들과 동물 사육자들로 구성된 특이한 조합의 사람들이 그것을 되살리기 위해 나타났다. 1920년대와 30년대에 각각 개별적으로 연구했지만 그래도 느슨하게 서신으로 왕래하던 영국 과학 통계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로널드 피셔(Ronald Fisher)와 미국의 가축 육종 전문가인 시월 라이트(Sewall Wright)는 진화론의 수정된 버전을 제안했다. 그들은 다윈의 사후에 과학적으로 새롭게 밝혀진 내용들을 모두 설명하면서도 여전히 간단한 몇 가지의 규칙만으로 생명의 모든 신비를 설명하겠다고 공언했다. 1942년에 영국의 생물학자인 줄리언 헉슬리(Julian Huxley)는 이러한 이론에 ‘현대종합진화론(modern synthesis)’이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8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 이론은 진화생물학의 기본 프레임워크를 제공하고 있으며, 매년 수백만 명의 어린 학생들과 학부생들도 그 내용을 공부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대종합진화론의 전통 안에서 연구하는 생물학자들을 ‘주류’로 간주하며, 그것을 거부하는 이들은 비주류로 취급받는다.

이름은 그렇게 붙였지만, 이 이론이 실제로 두 개의 분야를 종합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한 분야를 다른 분야에 비추어 정당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종합진화론은 유전학과 돌연변이의 법칙을 설명할 수 있는 동물 집단의 통계적 모델을 만들어서, 시간대를 장기간으로 늘리면 자연선택설이 여전히 다윈이 예측했던 것처럼 작동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들에게는 자연선택설이 여전히 중심이었다. 시간을 충분히 길게 설정하면 돌연변이는 극히 드물게 발생하여 거의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 유전법칙은 자연선택이라는 대세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월한 형질을 가진 유전자는 점진적인 과정을 거치며 살아남았지만, 별다른 우위를 갖지 못하는 유전자들은 시간이 경과하면서 도태되었다.

현대종합진화론을 지지하는 이들은 개별 유기체와 그들의 특수한 서식 환경으로 이루어진 혼잡한 세계에 매몰되지 않고, 집단유전학이라는 고귀한 관점에서 이 사안을 관찰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생명의 서사란 결국 진화가 이루어지는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아남거나 소멸하는 유전자 집단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현대종합진화론이 나타난 시점은 아주 절묘했다. 현대종합진화론이 왜 나타났는지를 살펴보면, 그것이 진화에 관해 설명해줄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점 외에도 두 가지의 이유가 더 있었다. 그 이유는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좀 더 역사적이며, 심지어는 사회학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우선 종합진화론은 수학적으로 엄격하다는 점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는데, 그것은 이전의 생물학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역사학자인 베티 스모코비티스(Betty Smocovitis)가 지적하듯, 현대종합진화론은 생물학 분야를 물리학과 같은 ‘대표 과학(exemplar science)’의 지위에 더욱 가까이 데려다주었다. 동시에 스모코비티스는 그것이 과학의 통합이라는 “계몽 프로젝트”가 크게 유행하고 있던 시기에 생명과학을 통합하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말한다. 1946년에 생물학자인 에른스트 마이어(Ernst Mayr)와 조지 게일로드 심슨(George Gaylord Simpson)은 진화연구학회(Society for the Study of Evolution)를 설립했다. 이곳은 자체적인 저널을 발간하는 전문기관이었으며, 심슨의 말에 의하면 생물학의 하위분야들을 “진화 연구라는 공통의 기반”하에 통합하고자 했다. 그는 나중에 이 목표들이 모두 실현 가능한 것이었다고 회고한다. “우리는 마침내 통합된 하나의 이론을 갖게 될 것처럼 보였다. (중략) 그것은 생명의 역사에 대한 모든 고전적인 문제들에 답변할 수 있으며, 그러한 각각의 문제에 관하여 적절한 인과관계를 가진 답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는 생물학이 주요 과학의 반열에 올라가고 있던 시기였다. 대학교에서는 관련 학과가 개설되었고, 연구 자금이 흘러들었으며, 새롭게 학위를 받은 수천 명의 과학자가 짜릿한 발견을 해내고 있었다. 1944년에 캐나다계 미국인 생물학자인 오즈월드 에이버리(Oswald Avery)와 그의 동료들은 유전자를 구성하며 유전에 관여하는 물리적인 실체가 DNA라는 사실을 입증했고, 1953년에는 제임스 왓슨(James Watson)과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이 로절린드 프랭클린(Rosalind Franklin)과 미국의 화학자인 라이너스 폴링(Linus Pauling)의 연구에 크게 힘입어 결국은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했다.

그 어떤 과학자도 그것을 완전히 소화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정보들이 쌓여 가는 동안, 현대종합진화론은 그 모든 것들을 관통하면서 꾸준히 명맥을 이어 나갔다. 이 이론은 결국 유전자가 모든 것을 만들어내며, 자연선택은 생명이 가진 모든 부분을 정밀히 검증하여 우위를 가진 형질을 결정하는 힘이라고 말한다. 어떤 연못에서 꽃을 피우고 있는 수초를 보든, 아니면 짝짓기 의식을 거행하고 있는 공작새를 보든, 거기에는 모두 유전자에 대하여 자연선택의 과정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느덧 생명의 세계는 다시금 단순하게 이해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1959년에 시카고대학교는 《종의 기원》 출간 100주년을 기념하는 컨퍼런스를 개최했는데, 이 자리에서 현대종합진화론 진영은 의기양양했다. 행사장은 사람들로 가득 찼고, 전국 일간지의 기자들이 진행 과정을 취재했다. 헉슬리는 이렇게 외쳤다. “이번 컨퍼런스는 공개적인 행사로서는 거의 처음으로 현실의 모든 측면이 진화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솔직하게 마주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현대종합진화론은 그 이론을 만드는 데 일조한 바로 그 분야의 과학자들로부터 거센 공격을 받게 된다.

3. 생물학계의 분열

반대하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늘 존재했다. 1959년에 발생생물학자인 C. H. 워딩턴(Waddington)은 “현대종합진화론이 다른 귀중한 이론들을 배제했고, 극단적인 단순화를 통해 진화 과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관하여 부정확한 그림을 제시했다”며 한탄했다. 개인적으로도 그는 진화에 관한 새로운 “당의 노선(party line)”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현대종합진화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배척당하고 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던 와중에 새로운 발견들이 연달아 거세게 몰아치면서 이 이론의 근간에 의문이 제기된다. 60년대 말부터 시작된 이러한 발견들은 분자생물학 분야에서 터져 나왔다. 현대종합진화론자들이, 이를테면 망원경을 통해 생명을 관측하면서 영겁의 시간에 걸쳐서 무수한 생명체들이 발생하는 과정을 연구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분자생물학자들은 현미경을 들여다보면서 분자 하나하나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관찰을 통해서 그들은 많은 이들의 추정과는 다르게 자연선택이 그다지 전능한 힘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인간의 세포 안에 있는 분자들이,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의 배후에 있는 유전자들의 염기서열이 매우 빠른 속도로 돌연변이를 일으키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런 사실은 예상 밖이긴 했지만, 주류 진화론에 반드시 위협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현대종합진화론에 의하면, 비록 돌연변이가 흔한 것으로 밝혀진다고 하더라도, 장기간의 관점에서 보면 자연선택이 여전히 변화의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유용한 돌연변이는 보존하고 쓸모없는 변이들은 폐기하게 된다. 그러나 실제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변화하고 있는 것은 (형질이 아니라) 유전자였다. 다시 말해서 유전자가 진화하고 있었던 것이며, 자연선택이 역할을 하는 건 아니었다. 유전적 변화들 가운데에서는 순전한 우연 외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보존되는 것들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자연선택은 마치 졸음운전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진화생물학자들은 깜짝 놀랐다. 1973년 데이비드 애튼버러(David Attenborough)는 BBC의 다큐멘터리에 출연하여 현대종합진화론 진영의 대표적 인물 가운데 한 명인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Theodosius Dobzhansky)를 인터뷰했다. 도브잔스키는 당시에 일부 과학자들이 주장하고 있었던 ‘비-다윈적 진화론’에 대해서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그들의 주장이 옳다면, 진화라는 건 거의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며, 특정한 방향성도 없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전문가들 사이의 말싸움에서 그치는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는 인간에게는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가 타당한 것입니다.” 한때 기독교계에서 다윈의 진화론을 두고 삶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며 비판했던 것처럼, 이제 다윈주의자들은 다윈설에 반대하는 과학자들을 향해 똑같은 비판을 쏟아냈다.

정통파 진화론에 대한 공격은 계속해서 뒤를 이었다. 영향력 있는 고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와 나일스 엘드리지(Niles Eldredge)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화석 기록(fossil record)을 살펴보면 진화라는 것이 짧은 기간에 폭발적으로 집중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고 주장했다. 진화의 과정이 반드시 느리고 점진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연구에서 현대종합진화론은 거의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생물학자들도 있었다. 생명에 관한 연구가 점점 더 복잡해지면서, 여러 다양한 환경에서 어떠한 유전자가 선택되는지에 기반을 둔 현대종합진화론은 서서히 중심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태초에 바다에서 어떻게 생명이 발생했는지를, 또는 태반과 같은 복잡한 기관이 어떻게 발달하였는지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예일대학교의 발생생물학자인 귄터 바그너는 태반의 발달에 대한 문제를 설명하기 위하여 현대종합진화론이라는 렌즈를 들이대는 것은 “마치 열역학 법칙으로 두뇌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려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에너지가 어떻게 전달되는지를 설명하는 열역학 법칙을 두뇌에 적용할 수는 있지만, 우리의 기억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또는 우리가 감정을 왜 느끼는지를 알고 싶다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려했던 대로, 생물학 분야는 갈라졌다. 70년대 들어서면서 많은 대학의 분자생물학자들은 일반 생물학과에서 빠져나와 별도의 학과를 만들고 자체적인 저널을 창간했다. 고생물학이나 발생생물학 같은 하위 분과들도 역시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거대한 주류의 진화생물학 분야는 여전히 건재했다. 당시에 이르러서는 각 대학의 생물학과를 장악하고 있었던 현대종합진화론 진영이 잠재적으로 체제를 뒤흔들 수도 있는 새로운 발견들에 대처하는 방식은 그런 프로세스가 가끔 발생한다고 인정하거나, 내심 인정하지도 않는 일부 전문가들에게는 유용할 수 있다며 그것을 마지못해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현대종합진화론에서부터 이어진 생물학의 기본적인 지식을 근본적으로 바꿀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속마음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예전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새로운 발견들은 가볍게 즐길 수 있는 호기심 거리 정도로 치부되었다.

진화생물학자인 더글러스 퓨투이마(Douglas Futuyma)는 2017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주류의 관점을 옹호하며, 오늘날의 현대종합진화론이 “필요한 부분만 약간 수정되었을 뿐, 현대 진화생물학의 핵심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라고 적었다. 이 이론의 현재 버전에서는 돌연변이와 무작위적인 우연을 받아들일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여지를 남겨 두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진화라는 것을 거대한 개체군에서 살아남은 유전자의 이야기로 바라보고 있다. 20세기 중반의 영광스러웠던 시절 이후 가장 큰 변화는, 아마도 유전자와 자연선택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이해할 수 있다는 그들의 가장 야심 찬 주장에서 한발 물러선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들에 대한 비판이나 예외적인 상황에 대하여 좀 더 진지하게 대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러한 변화마저도 달갑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현대종합진화론의 아이디어들은 여전히 생물학 분야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그것이 실패했거나 분열되었다는 공식적인 판단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현대종합진화론은 선거공약을 어긴 대통령과 비슷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연립정부 전체를 만족시키겠다는 당초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더 이상 제공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권력을 손에 쥔 채로 대통령직을 유지하고 있다.

많은 이들에게 있어서 찰스워스 부부는 현대종합진화론의 정통성을 계승한 대제사장들로 여겨진다. 그들은 진화생물학 분야에서 새로운 이론들이 갖는 위치에 관하여 광범위하게 저술해 온 저명한 사상가이며, 그 이론의 근본에서 어떠한 수정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일부에서는 그들이 지나치게 보수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단지 신중할 뿐이라고 말한다. 근거가 빈약한 이론들 때문에 이미 검증된 프레임워크를 해체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그들은 진화에 대한 근본적인 진실에 관심이 있는 것이지, 그 과정에서 다양하게 일어나는 모든 결과들을 일일이 설명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브라이언 찰스워스는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코끼리의 코나 낙타의 혹에 관해 설명하려고 여기 있는 게 아닙니다. 설령 그러한 설명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대신에 그는 진화론이 보편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생명체의 발생 원리에 적용할 수 있는 몇 가지의 중요한 요인들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데보라 찰스워스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저를 두고 ‘어떤 특정한 시스템이 왜 그렇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했다’고 말하는데, 그런 말에 쉽게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굳이 그 모든 세세한 부분까지 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외적인 사례들이 흥미롭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런 모든 예외까지 전부 다 중요하게 여길 수는 없다는 것이다.
4. 진화론을 둘러싼 문화전쟁

앞서 소개한, 논란의 왕립학회 컨퍼런스를 주최한 과학자인 케빈 랠런드(Kevin Laland)는 그간 도외시되어 왔던 진화론 진영의 하위 분과들이 서로 뭉쳐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랠런드를 비롯한 확장판 종합진화론(EES) 진영의 동료들은 진화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요구한다. 가장 단순한 설명이나 보편적인 해석을 찾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생물학의 주요한 질문들에 대해서 가장 좋은 해석을 제시할 수 있는 다양한 접근방식들을 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가소성(plasticity) 연구, 진화발생생물학(evolutionary developmental biology), 후성유전학(epigenetics), 문화진화(cultural evolution) 연구 등의 하위 분과들을 단지 인정받는 것만이 아니라, 생물학의 계율 내에 그런 내용들을 정식으로 포함하는 것이다.

이들 진영 내에도 몇몇 선동가들은 존재한다. 유전학자인 에바 야블롱카(Eva Jablonka)는 다윈의 진화론이 등장하기 이전이었던 19세기 초에 유전이라는 아이디어를 널리 퍼트렸던 장-바티스트 라마르크(Jean-Baptiste Lamarck)의 이름을 따서 자신을 스스로 ‘신-라마르크주의자’라고 부른다. 참고로 라마르크는 과학사에서 상당히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반면에 생리학자인 데니스 노블(Denis Noble)은 전통적인 진화론에 맞서는 ‘혁명’을 요구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과 관련한 수많은 논문에서 주요 저자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랠런드의 주장에 따르면,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저 진화에 관한 현재의 정의를 더욱 확장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혁명가가 아니라 오히려 개혁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EES 진영의 주장은 간단히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는 자연계에 대해서 많은 놀라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으며, 따라서 생물학의 핵심 이론에서도 그런 발견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에 가장 흥미롭게 여겨지는 연구 분야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가소성(plasticity)이라고 알려진 것인데, 일부 유기체들이 한때 여겨졌던 것보다 더욱 빠르게 더욱 급진적으로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가소성에 관한 설명을 살펴보면 상당히 놀라운데, 그것은 마치 만화책이나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거친 변신 과정을 떠오르게 한다.

오타와대학교의 과학자인 에밀리 스탠든(Emily Standen)은 폴립테루스 세네갈루스(Polypterus senegalus) 또는 세네갈 비처(Senegal bichir)라고 부르는 물고기를 연구하고 있는데, 이 물고기는 단지 아가미만이 아니라 원시적 형태의 허파도 갖고 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일반적인 폴립테루스들은 수면에서 공기를 들이마실 수도 있긴 하지만, 물속에서 “훨씬 더 만족스럽게 살아간다”고 한다. 스탠든은 생후 몇 주 동안 물속에서 지낸 폴립테루스들을 데려다가 육지에서 키우기 시작했는데, 그러자마자 그들의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 지느러미에 있는 뼈들이 길어지고 더욱 날카로워졌으며, 관절 부위가 넓어지고 근육이 커지면서 마른 땅 위에서도 몸을 더욱 잘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목 부분은 유연해졌다. 원시적이었던 허파는 더욱 커졌고, 그렇게 커진 허파가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다른 기관들이 위치를 옮겼다. 결국 그들의 겉모습이 전체적으로 바뀌었다. 스탠든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화석 기록에서 발견되는 바다와 육지 사이에 걸쳐 있는 과도기의 종들을 연상시킵니다.” 전통적인 진화론에 의하면, 이런 유형의 변화에는 수백만 년의 시간이 소요된다. 그러나 확장판 종합진화론이라는 단어를 제안한 아르민 모체크는 이러한 폴립테루스가 “한 세대 만에 육지에 적응하고 있다”고 말한다. 마치 이 물고기를 자랑스러워하는 것처럼, 그는 말했다.

모체크의 전문 분야는 놀라운 가소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생물인 쇠똥구리이다. 그의 동료들과 함께 모체크는 향후의 기후변화를 염두에 두고 다양한 기온에서 쇠똥구리들의 반응을 실험했다. 쇠똥구리들은 날씨가 추울수록 날아오르는 것을 힘들어했다. 그러나 연구진은 쇠똥구리들이 날개를 더욱더 자라게 만들어서 이러한 조건에 대응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진화에 관한 전통적인 이해 방식을 거스르는 이러한 관찰에서 더욱 중요한 부분은, 이처럼 갑작스러운 변화들이 모두 동일한 기본 유전자들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런 유전자는 몇 세대에 걸쳐서 서서히 변화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동일한 유전자 내에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가능성이 그들을 여러 다른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게 해준다.

채플힐의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 소속 데이비드 페니그(David Pfennig)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것이 다양한 종에 걸쳐서 흔히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장난감 자동차 크기의 양서류인 쟁기발개구리(spadefoot toad)를 연구하고 있다. 쟁기발개구리는 일반적으로 잡식성이지만, 그 올챙이는 오직 육식에만 의존하여 성장한다. 그것의 올챙이들은 육식만 하면서 이빨을 더욱더 자라게 하고 턱의 힘을 더욱더 강하게 키우며 내장을 더욱 튼튼하고 복잡하게 만든다. 이 시기의 올챙이들은 개구리의 유생이라기보다 단단한 갑각류나 심지어 다른 올챙이들을 먹고 자라는 힘이 센 육식동물과 비슷하다.

가소성이라는 특성이 오랫동안 미세한 변화들이 쌓여서 점진적인 변화가 진행된다는 주류의 아이디어를 완전히 무효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진화에는 그 나름의 원리를 가지고 관여하는 또 다른 체계가 있음을 알려준다. 일부 연구자들은 가소성이 아마도 최초의 눈이나 최초의 날개처럼 생물학적으로 새로운 형질의 출현이라는 난해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쥐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페니그는 이렇게 말한다. “가소성은 어쩌면 새로운 형질의 원시적인 형태를 촉발하는 요인일 수도 있습니다.”

가소성은 현재 발생생물학 분야에서는 널리 인정받고 있다. 가소성 연구의 선구적 이론가인 메리 제인 웨스트-에버하드(Mary Jane West-Eberhard)는 2000년대 초부터 진화를 이끄는 핵심 추진력이 가소성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물학 내의 다른 많은 분야에서는 아직까지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태이다. 대학에서 생물학을 배우기 시작한 학생들도 가소성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가능성은 별로 없으며, 대중적인 과학 저술 분야에서도 아직은 훨씬 더 존재감을 높여야 한다.

생물학 분야에는 현재 이와 같은 이론들이 가득하다. EES가 관심을 두는 연구에는 ‘유전자 외적 유전(extra-genetic inheritance)’, 또는 ‘후성유전학(epigenetics)’이라고 알려진 분야도 있다. 후성유전학이란 심리적 외상이나 질병처럼 부모가 경험하는 어떤 사건이 그들의 DNA에 작은 화학 분자 형태로 들러붙어서 그들의 아이들에게서도 다시 나타난다는 발상이다. 과거에는 이러한 현상이 일부 동물들에게서 여러 세대에 걸쳐 일어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세대를 뛰어넘는 트라우마(intergenerational trauma)’의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논란을 일으켰다. 또한 EES 진영에서는 돌고래 집단이 새로운 사냥 기법을 개발하고 그것을 서로에게 가르쳐주는 습성과 같은 문화가 전승되는 과정이나, 또는 동물의 내장이나 식물의 뿌리에 서식하는 유익한 미생물 군집들이 마치 하나의 도구처럼 소중히 간수되면서 세대를 거쳐 전해지는 현상을 추적하는 이들도 있다. 이 두 가지 모두의 사례에서 연구자들은 해당 요인들이 진화에 있어서 더욱 중심적인 역할을 할 정도로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발상들 가운데 일부는 잠시 각광을 받기도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어떤 연구자들은 수십 년 동안 칩거한 채 자신의 통찰력을 소수의 전문가 집단에게만 제공하기도 한다. 20세기로 접어드는 시기에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생물학은 수백 개의 하위 분야들로 나뉘어 있는데, 이들은 각자 자신의 분야 외에는 거의 알지 못한다.

이 문제는 EES 진영이 시급히 해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유일한 해결책은 더욱 방대한 통합 이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여기에 속한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연구를 더욱 확장하는 한편, 그들을 의심하는 사람들을 반박하기 위한 데이터를 열심히 수집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도 이런 식으로 문헌상에 결과를 기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기존의 현대종합진화론은 연구자금 네트워크, 다양한 직위, 교수사회 등 과학계 전체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비엔나대학교 이론생물학과의 학과장을 맡고 있으며 EES 진영의 주요한 후원자인 게르트 B. 뮐러(Gerd B. Müller)의 말이다. “주류의 진화론은 하나의 완전한 산업입니다.”

현대종합진화론은 상당히 어마어마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때로는 완전히 잘못된 아이디어조차도 그 오류를 바로잡기까지는 반세기가 걸리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돌연변이가 실제로는 진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이미 수십 년 전에 증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돌연변이주의자들은 철저하게 외면받았으며 그들의 아이디어는 계속해서 의심의 눈길을 받았다. 비교적 최근인 1990년까지만 하더라도 진화를 다루는 가장 영향력 있는 대학 교재들 가운데 한 곳에서는 “새로운 돌연변이의 역할은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물론이고 당시에도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과학자들은 거의 없었다. 개념 전쟁은 개념 자체만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뉴욕에 있는 스토니브룩대학교의 진화학 교수였던 마시모 피글리우치(Massimo Pigliucci)는 생물학을 현대종합진화론의 유산으로부터 해방하려면 그것을 심판할 수 있는 다양한 전술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적극적으로 설득하고, 새로운 개념을 배우려는 학생들이 있어야 하고, 관련 연구에 자금을 지원해야 하고, 교수직도 확보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성적인 사고와 함께 열린 마음가짐도 필요하다. 2017년의 어느 컨퍼런스에서 피글리우치는 청중들과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는데, 방청객 한 명이 EES의 지지자들과 보수적인 생물학자들 사이의 갈등이 때로는 과학적인 의견 대립보다는 이념적인 문화전쟁처럼 보일 때가 있다고 지적했다.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참석자에 따르면, 피글리우치는 이런 취지로 말했다고 한다. “맞습니다, 문화전쟁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길 것입니다.” 그러자 행사장 내의 절반에서만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폴립테루스 세네갈루스 ©Photograph: blickwinkel/Alamy

5. 진화의 정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주의자들과 확장판 종합진화론자들 사이의 싸움을 무의미하게 여기는 과학자들도 존재한다. 그들은 현대의 생물학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불필요하다고 말한다. 영향력 있는 생화학자인 포드 둘리틀(Ford Doolittle)은 지난 10년 동안 다수의 에세이를 통해서 생명과학을 새롭게 집대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비판해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는 그딴 새로운 종합이론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예전에도 기존의 종합이론은 전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둘리틀을 비롯하여 그와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더욱더 급진적이다. 그것은 바로 거창한 이론들이 완전히 사멸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러한 통합 프로젝트들을 20세기 중반이나 심지어 근대 시기에나 어울릴 법한 ‘자만심’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그런 사고방식이 전혀 설 자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둘리틀은 진화를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두고 “20세기의 유물이며, 아마도 당시에는 유용했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그는 다윈의 이론을 존중한다는 것은 다윈의 모든 발상들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다윈의 통찰력을 기반으로 현재의 생명 형태가 과거의 형태로부터 어떻게 급진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둘리틀을 비롯하여 전산생물학을 연구하는 알린 스톨츠퍼스와 같은 동료들은 60년대 후반부터 무작위성과 돌연변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주류의 현대종합진화론에 도전했던 과학자들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다. 중립진화론(neutral evolution)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견해를 주도하는 현재의 슈퍼스타는 애리조나대학교의 유전학자인 마이클 린치(Michael Lynch)이다. 린치는 대화할 때의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과학자들이 ‘문헌’이라고 부르는 것에서는 상당히 호전적이다. 그의 저서들은 현상 유지에 안주한 채로 그의 연구를 뒷받침하는 엄격한 수학을 이해하지도 못하는 과학자들을 격렬하게 비난하고 있다. 그는 2007년에 이렇게 썼다. “압도적 다수의 생물학자에게 있어서 진화는 그저 자연선택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맹목적 수용은 (중략) 수많은 엉성한 생각들로 이어졌으며, 어쩌면 사회의 많은 사람이 진화론을 자연과학이 아니라 사회과학 계열에 속하는 소프트사이언스(soft science)라고 여기게 만든 주된 이유일 수도 있다.” 린치도 EES를 크게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가 모든 책임을 맡았더라면, 현재의 생물학은 현대종합진화론자들이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환원주의적으로 되었을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린치는 우리의 세포 내에서 DNA가 체계화되는 수많은 복잡한 방식들이 어쩌면 무작위로 발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는 자연선택의 원리가 생물계를 형성해 온 것은 맞지만, 특정한 형체 없이 우주를 유영하다가 가끔 무질서의 상태에서 질서를 부여하는 요인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말한다. 필자와 나눈 대화에서 린치는 세포 단위에서부터 생물체의 기관과 온전한 유기체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연구를 생물학 내의 다양한 분야들로 최대한 많이 확장해 나가서 이러한 무작위적인 프로세스가 보편적이라는 점을 입증할 것이라고 밝혔다.

오늘날의 진화생물학자들을 갈라놓고 있는 수많은 주장은 결국 무엇을 강조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좀 더 보수적인 생물학자들도 무작위적인 프로세스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진 않지만, 둘리틀이나 린치가 생각하는 것만큼 중요하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전산생물학자인 유진 쿠닌(Eugene Koonin)은 사람들이 서로 잘 들어맞지 않는 이론들이 존재하는 상황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모든 걸 통합하겠다는 기대는 신기루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보기에 진화를 설명하는 단 하나의 이론은 없으며, 있을 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설명하는 단 하나의 이론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물리학에도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론은 없습니다.”

이 말은 사실이다. 물리학자들은 양자역학을 적용해서 소립자들을 해석하고,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을 적용해서 좀 더 커다란 물체들을 파악한다. 그러나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아인슈타인은 생애 말년에 이 두 가지를 통합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성공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수많은 물리학자가 동일한 목표에 도전했지만, 좀처럼 진전을 이뤄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어쩌면 그것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만약 오늘날의 물리학자들에게 통합된 이론이 필요한 것인지에 관해 묻는다면, 그들은 아마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볼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왜 그래야 하는 것이냐고 되물어볼 수도 있다. 어쨌든 과학이라는 분야는 연구되어야 한다. 그래서 연구는 지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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