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위험한 레트로
8화

북저널리즘 인사이드 ; 새로운 한일 관계를 그리다

“대한민국에 일본은 ‘걸림돌’이 아닙니다. 깨어 있는 시민의 힘으로 내일의 대한민국을 만들어 나갈 ‘디딤돌’일 뿐입니다.”

지난 2019년 어느 여름날 버스에 올랐을 때 유리창에 붙은 한 포스터를 보고 놀란 기억이 있다. 서울특별시버스운송사업조합에서 공식적으로 내건 일본 불매 운동의 캠페인 포스터였다. 당시 한일 무역 분쟁의 여파로 국내 노재팬 운동의 열기는 뜨거웠다. 번화가의 유니클로 매장은 전례 없이 한산했고, 무인양품 쇼핑백을 들고 거리를 걷는 것은 공공연한 금기였다. 기린 이찌방, 아사히 등의 일본 맥주는 편의점 한 켠에서 자취를 감췄고 원산지 표시 및 대체 상품 정보를 제공하는 웹사이트 ‘노노재팬’까지 등장했다. 이에 더해 유니클로 본사 임원 오카자키의 “한국 불매 운동의 영향은 오래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발언은 한국 국민의 공분을 사, 공식 사과문을 두 차례 이상 발표하는 해프닝으로 번졌다.

이러한 일제 불매 열풍은 다수 국내 기업이 반등하는 계기가 됐다. 일본 브랜드가 점유하고 있던 SPA 패션, 맥주와 같은 라이프 스타일 산업뿐 아니라 대일 의존도가 높던 소재·부품·장비 산업의 국산화는 본격화했다. 아스플로, 엑시콘, PSK 등 국내 강소기업이 반도체 부품 및 장비 산업에서 두각을 보였고 삼성 및 SK하이닉스와 같은 관련 대기업에 대한 정부 지원도 확대됐다. 국내 소부장 시장에선 솔브레인, 동진쎄미켐, 인텍플러스와 같은 기업들이 새롭게 들어서며 일본의 소부장은 대체 불가능한 것이라는 믿음은 빠르게 깨졌다.

그러나 경제·산업적 분쟁과는 별개로 일제 불매 운동은 내게 여전히 이례적인 현상이자 의문으로 남아 있다. 강요할 수 없고 하기도 어려운 “국산품 애용”이라는 의제가 그전까지만 해도 낡고 공허한 의제로 들린 탓도, 저자의 말처럼 일본이 식민 지배의 전범국이 아닌 “전 세계 200여 개국 중 하나”로 인식되던 탓도 있다. 혹은 세련된 디자인과 정교한 품질을 자랑하는 제품을 양산해 내는 나라로 일본을 그리던 와중, 개인의 선택에 앞서 국가적 차원의 불매를 장려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위압적으로 느껴진 까닭도 있다.

실제 한국 사회 내 반일 정서는 청년 세대를 중심으로 감소하는 추세다. 글로벌리서치가 2021년 6월 전국 만 18~39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가장 싫어하는 나라’를 조사한 결과 ‘일본’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31.2퍼센트였으나, 해당 표본을 만 18~24세로 좁혔을 때 그 비율은 22.8퍼센트로 약 10퍼센트 감소했다. 일본에서도 한일 관계에 대한 인식은 연령에 따른 차이가 벌어지고 있다. 일본 동아시아연구원 2021년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대중문화 소비와 한국에 대한 인상’을 물었을 때 “좋은 인상을 갖게 된다”는 60세 이상의 응답자는 11.4퍼센트에 불과했던 반면 20대 응답자는 30.9퍼센트, 20세 미만 응답자는 66.7퍼센트로 매우 높았다.

2019 무역 분쟁 그 이후, 각기 새 정부를 맞이한 한국과 일본은 3년치 외교 성적표를 앞에 두고 새로운 관계 설정의 모멘텀을 맞고 있다. 이때 저자는 경제적 지표만큼이나 국민적 정서를 강조하며, 그 정서의 핵심엔 일본의 젊은 세대가 있다. 리만 브라더스 사태를 겪으며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전제로 한 세대, 소셜 미디어로 연결되는 감각이 자연스러운 세대. 가치와 체험을 추구하며 지속 가능한 미래에 목소리를 내는 이들은 한국의 젊은 세대와도 많은 부분 닮아 있다.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연결하고 표현하는 한국과 일본의 젊은 층은 기존 ‘일본관’, ‘한국관’의 틀을 깨고 있다. 이들에게 상대국은 외교 분쟁의 걸림돌도, 경제 성장의 디딤돌도 아니다. 한일 관계의 구조적 불평등을 역사로 학습해 온 기성세대와 달리, 기술과 콘텐츠로 한국의 젊은 층과 정서적 교감을 나누는 신세대로부터 우리는 새로운 한일 관계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다혜 에디터
추천 콘텐츠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