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박사하기
6화

에필로그 ; 《경향신문》 박은하 기자의 추천사

대학원에 진학해 역사학자가 되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2000년대 중반, 진학을 본격적으로 준비하려니 설렘보다 불안감이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직업으로서 학문을 선택한다는 것의 중압감, 불확실한 미래와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걱정, 부조리한 대학 체제와 국가의 고등 교육 정책, 다른 분야에 관한 관심…. 결국 신문 기자로 진로를 틀었다. 기자로서 대학의 문제점을 파헤치고 비판하겠다고 다짐했다.

입사한 뒤 다짐대로 대학에 관한 기사를 많이 쓸 수 있었다. 대학생들의 등록금 부담과 취업난이 가장 관심을 받았지만 2015년 무렵 불거진 대학원생 인권 침해, 이른바 갑질 교수에 대한 공분도 뜨거웠다. 이런 기사에서 대학원생은 피해자이거나 처우 개선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제한적인 모습으로 등장했다. 학계의 주인공은 대체로 교수였다. 대학이라는 기관과 학계라는 장을 떠받치는 재정과 행정, 평가 체제 등의 제도는 더욱이 언론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2010년대 한국의 가장 큰 정치적 격변 사건인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국면에서도 대학이 중심에 있었다. 최서원의 국정 농단 사태에서 처음으로 구속된 사람은 이화여자대학교의 류철균(필명 ‘이인화’) 교수였다. 최 씨가 학사 비리와 관련된 직권남용과 업무방해죄로 구속되면서 이화여대는 학사 관리 업무를 방해받은 피해자가 됐다. 그러나 학생들의 캠퍼스 점거 시위를 촉발한 원인이었던 미래라이프대학 추진 배경을 다룬 기사는 많지 않다. 정권의 단기적 시책과 교육부의 대학 재정 지원을 미끼로 한 통제 시스템은 거론할 만한 문제이긴 하지만 불법은 아닌 사안에 그쳤다. 온갖 불법과 위법을 캐내고 단죄하는 데 모두의 시선이 팔린 사이, 제도로서의 대학 교육은 슬그머니 시야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기자로서 대학 교육이란 주제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던 것이 이 무렵이다. 등록금 문제가 소위 반값 등록금 정책으로 해결되면서, 교육 지면에는 중·고등학생의 입시 문제가 가득했다. 국가가 연구 중심 대학 육성을 표방해 30만 명의 대학원생이 존재하고, 경력과 문화자본을 갖기 위한 논문 표절 시비가 횡행해도 대학원을 제대로 다루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대학원은 반복되는 문제 속에서 해결 방법은 없는 곳으로 인식됐다. 언론의 집단적 게으름 속에서 교육은 점차 입시의 동의어가 됐고 대학원, 아니 그 이전에 대학 자체가 한국 사회의 담론과 내 관심에서 지워졌다.

《한국에서 박사하기: 젊은 연구자 8인이 말하는 대학원의 현실》은 이런 현실을 온몸으로 겪고 있는 연구자들이 나눈 대화의 기록이다. 대담자들의 전공은 인문사회과학과 도시계획, 과학정책 등으로 다양하다. 석사 과정을 마치고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 직장 생활과 대학원 공부를 병행하는 사람, 대학에 자리 잡아 평생 연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람 등, 위치와 계획도 조금씩 다르다. 각기 다른 곳에 있던 이들이 대학원생 인권 침해 사건 등을 겪으면서 연결됐다. 이후 10년 가까이 공부와 활동을 병행해 나간 기록을 대담으로 풀어냈다. 내가 기자로서 대학/대학원이란 주제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을 무렵이 이 책의 시작점이다.

책은 전공 분야와 공부하는 이유를 중심으로 한 대담자들의 자기소개로 시작해 앞으로의 계획과 다짐으로 끝난다. 부조리한 현실에도 놓지 않았던 ‘배움의 즐거움’과 ‘연구자의 정체성’을 바탕에 두고 “못 살겠다, 갈아 보자”라고 이야기한다. 그 출발점은 냉소와 체념에 대한 경계다. 대학원의 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 ‘대학원생 밈’이나 자조 유머를 꺼낸 이유일 것이다.

책에서 대학원생이 겪는 곤경은 사회의 다른 문제와 연결돼 한층 더 구체성을 띠게 된다. 취업 위주의 커리큘럼으로만 채워진 학부 교육을 겪은 학생들이 대학원에서 기초적인 학문적 역량을 축적하는 데 추가로 들어가는 시간은 청년 세대의 경제적 어려움과 이어진다. 인권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 대학 전체가 교수 직군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현상을 짚으며, 교수의 역할 변화를 고민해 보자고 제안한다.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불이익과 여성 구성원의 소외 등을 짚은 대목에서는 대학원의 문제가 결국 한국 사회 일반의 문제임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으로 대담자들이 주고받는 대화는 학문과 지식의 역할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하다. 연구자들의 대담이다 보니 자신이 공부하는 분야를 예로 든 논평이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고등학교 때 역사적 사실이라고 배우고 외웠던 고려 시대 귀족은 사료에는 존재하지 않고 연구사 속에서 정립된 개념”이라고 말하는 대목은 지식이 탄생하는 메커니즘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 대담자는 딥러닝이 득세하는 현상의 배경으로 학계나 업계가 성능에 대한 이해보다는 일단 빠르게 서비스를 개발하려는 경향을 짚으며 AI를 비롯한 “모든 분야가 이론 없이 바삐 굴러가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지점은 다량의 기사를 생산해야 한다는 압박에 쫓기는 기자의 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학원 바깥에서도 동료 집단을 만들어 학술적 표현 능력과 사회 문제의 분석과 해결 능력을 키우는 과정”의 중요성을 공유하고, “학술장을 열린 공간으로 여겨야겠다”고 다짐하는 대목은 대학원생으로서 자신의 미래를 고민하는 누군가에게 삶의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정갈하고 단단하게 벼려 낸 말들로 자신이 선 자리를 바꿔 나가려는 대담에서 독자는 학문과 지식의 본질적 의미에 대해 함께 생각하는 경험을 한다. “과학기술은 국가 경쟁력의 근간”이라는 서술이나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을 걷어낸 자리에 나의 경험과 이들의 연구가 맞닿아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연구자를 양성하고 학문을 생산하는 시스템의 문제는 외면할 수 없는 주제가 된다. 불쌍한 대학원생과 시간 강사만을 내세웠던 언론은 책에서 직접적으로 거론되지 않지만, 내게는 그 어떤 질타보다 매섭고 묵직했다. 《한국에서 박사하기: 젊은 연구자 8인이 말하는 대학원의 현실》은 학생과 연구자, 고등 교육 정책 담당자에게 깊은 고민을 불러일으키는 책이다. 그 외에도, 지식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이들에게는 이 책이 유의미한 기록이 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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