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가치를 찾아서
완결

잃어버린 가치를 찾아서

우리를 둘러싼 현실에서 문학의 쓸모와 가치는 당연한 것이 아니다. 프루스트는 그럼에도 여전히 문학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말한다.

©일러스트: 권순문/북저널리즘

 

1. 마들렌의 축복


“어젯밤 ‘끝’이라는 단어를 썼어요.” 1922년 이른 봄, 피로에 지친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가 가정부에게 말했다.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그는 눈을 빛내며 덧붙였다. “이제 나는 죽을 수 있어요.”[1] 하지만 작가는 작품과 헤어질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작품을 떠날 권리가 없었다. 작품은 자체로 그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프루스트는 작품의 완성보다는 자신의 소진을 향해 나아갔으며, 얼마나 더 고치고 다시 쓸 수 있을지 가늠하며 남은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많지 않은 것 같으면 작품을 출판이 가능한 형태로 정리하는 데 매달렸다. 얼마 더 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자, 그는 작품의 구조에 틈을 내고 새로운 이야기를 끼워 넣으려 했다. 평생 온전한 건강을 누린 적이 없던 작가의 고투는 해를 넘기지 못한다. 집필은 죽음에 쫓기며 이뤄지는 동시에 죽음을 재촉했다. 11월 18일 프루스트는 51세로 세상을 떠나고,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1913-1927)는 유작으로 남았다.

작품은 작가 사후 조금씩 잊히는 것처럼 보였다. 유럽의 1922년은 분명 ‘다리가 부러지거나 해야 읽을 수 있는’(프루스트의 동생이 한 말이다) 3000쪽짜리 소설을 읽기에 좋은 시기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갓 끝난 제1차 세계 대전의 후유증에 시달렸고, 기술 문명의 숨 가쁜 발전에 쫓겼다. 초현실주의를 비롯한 1920년대의 전위적인 예술은 낡은 세계를 거부하며 꿈속으로, 혹은 미래를 향해 줄달음쳤다. 역사의 무게 앞에서 유년의 추억, 연인들의 심리, 귀족 사교계를 그리는 프루스트의 소설은 좋았던 옛 시대의 기념물처럼 보였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현대 문학에 초석을 놓은 고전으로 인정받은 것은 훗날의 일이다. 그렇지만 누구도 프루스트의 위대함을 부인하지 못하는 오늘날에 와서도, 사람들이 그의 책을 읽을 만큼 한가하기는 쉽지 않다. 동시대인 아나톨 프랑스(Anatole France)가 말하듯, “인생은 짧고 프루스트는 길다.”

하지만 프루스트의 신화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적이 없다. 그러니 그의 작품이 어째서 훌륭한 고전인지 설명하기보다 작가를 둘러싼 신화에서 시작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프루스트의 신화, 그것은 무엇보다 마들렌이다. 조가비 모양의 틀에 넣어 구운 통통한 과자를 차와 함께 맛보자 기억의 축복이 쏟아진다. 유년의 한때가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사라진 세계를 문학 작품으로 바꾸는 연금술이 시작된다. 프루스트와 함께 마들렌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과자가 되었고, 문학이 얼마나 감각적으로 풍요로운 예술인지 말해 주는 기호가 되었다. 동시에 작가는 섬세하고 집요한 기억력의 화신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 방대한 소설의 모든 것이 어떻게 한 사람의 기억일 수 있는지 물으며 놀라워한다.

또 하나의 신화는 글을 쓰는 작가 자신의 모습이다. 믿을 수 없이 병약한 몸으로, 코르크로 방음 처리를 한 방에서 매일같이 밤을 지새워 글을 쓰는 남자가 있다. 과자 한 조각의 맛에서 출발한 작품은 한없이 길어져 세상에서 가장 방대한 소설, 소설가의 힘으로 닫을 수 없는 우주가 된다. 그 끝에서 작품의 주인공은 남은 생을 문학 창작에 바쳐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프루스트와 마찬가지로 유폐의 삶을 택하고, 글쓰기의 힘으로 재창조한 세계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자서전이 아니지만, 프루스트만큼 자기 소설의 주인공과 동일시되는 작가는 없다. 요컨대 프루스트의 신화는 자신의 평생을 작품으로 바꿔 낸 작가의 신화다. 죽음은 그의 신화를 완성해 주는 것 같다.

 

2. 잃어버린 시간의 얼굴


프루스트의 신화는 오랜 시간 독자들을 유혹했을 뿐 아니라 어떤 진실을 담고 있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작가의 작품을 오늘날 왜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변을 신화로 대신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작품으로 잠시 들어가 보도록 하자. 모두 일곱 편으로 된 대하소설이자 작가의 유일한 걸작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19세기 말부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까지 제3공화정 시대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며, 자신을 ‘나’라고 부르는 1인칭 주인공 겸 화자의 일대기를 그린다. 그는 막연히 작가의 꿈을 품고 있지만, 창작 수업에 매진하기보다는 파리의 사교계와 근교의 휴양지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낸다. 몇 차례 사랑에 빠져 괴로워하거나 이런저런 예술 작품에 대한 비평적 안목을 기르며 세월이 가고, 노년의 문턱에서 주인공은 모종의 계시를 받아 글쓰기를 시작한다. 요컨대 이 소설은 이렇다 할 줄거리가 없다. 프루스트의 소설은 무엇에 관한 책인가? 이 작품에는 여러 얼굴이 있다.

종종 신경과학의 예언자 대접을 받기도 했던 프루스트의 작품은 잘 알려진 대로 기억과 시간에 대한 탐구다. 소설은 누워 뒤척이는 사람을 묘사하며 시작한다. “오랜 시간,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왔다.”[2] 가수면 상태의 인간은 자신을 외적으로 구별하고 확인해 주는 모든 것이 희미해진 시공간,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세계 속에 던져져 있다. 이 근본적인 공허를 놓고 프루스트는 인간의 자기다움을 다시 묻는다. 그리고 소설의 화자는 그 답을 기억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도달한다. 나를 이루는 것은 나의 잃어버린 시간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잃고 되찾는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들렌과 홍차 이야기를 가장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렇다. 기억을 의식적으로 탐색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과거에 도달할 수 없다. 현재의 관점에서 가공된 이야기, 의미를 알 수 없는 단편적인 이미지, 마음에 끝내 응어리진 순간이 떠오를 뿐이다. 그런데 의식적으로 떠올리는 것과는 다른 기억이 있다. 과거에 느꼈던 어떤 감각을 우연한 계기로 다시 느낄 때, 의지와 상관없이 되살아나는 과거는 우리 마음이 건드려 흩어지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과거이다. 그것이 마들렌 과자 조각을 맛보며 되찾은 유년기 시골 마을의 풍경이다. 우연한 축복으로 내 앞에 돌아온 옛 세계를 통해 자아의 협소함을 넘어서기, 이것이 작품의 첫 번째 얼굴이다.

그런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과거의 나를 찾아가는 이야기인 만큼이나 지금의 나를 만들어 가는 이야기기도 하다. 이 책은 작가의 탄생 과정을 서술하는 문학적 소명의 서사이다. 어원상 신의 부름을 뜻하는 소명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적성과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는 개인에게 주어진 일을 뜻한다. 그것은 또한 세상에 대해 배워온 것들을 새로운 높이에서 조망하게 하는 일이자, 주어진 길을 충실히 따라 걷는다면 삶의 의미를 긍정할 수 있게 해주는 일이다.

어떤 소설이 문학적 소명의 서사로 분류되려면 다음 몇 가지 질문에 나름의 대답을 제시해야 한다. 첫째, 어째서 글을 쓰겠다고 결심하는가? 프루스트는 예술가가 되려는 꿈을 낭만적으로 이상화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집요한 아이러니를 가지고 작가 지망생들이 품게 마련인 꿈들의 허황하거나 나약한 면모를 짚는다. 다시 논의하겠지만, 현대 세계에서 문학적 소명은 정당화돼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어떻게 하면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는가? 바람직한 일이 대개 그렇듯 결심의 동기와 실천의 계기는 다르다. 문학적 소명을 서술한 당대의 소설 가운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특별한 점이 여기에 있다. 프루스트는 꿈에 부푼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을 넘어서 예술적 창조성의 원리를 이론적으로 해명하며, 창작의 구체적인 기획을 제시하고, 결심에서 행동으로 도약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셋째, 소명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어떤 글을 써야 하는가? 소명은 세상을 사는 의미가 무엇인지 확인하게 해주는 일이라고 했다. 삶이 전적으로 무의미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숙고해 본 사람만이 자신의 지난 삶을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규정할 수 있으며, 그것이 창작에 투신하기 직전 주인공이 놓인 상황이다. 글쓰기가 진정으로 의미 있는 활동이 되려면 허무주의를 반박하는 힘을 갖춰야 한다. 다시 말해, 프루스트는 문학이 삶의 진실에 접근할 수 있으며 참다운 현실을 포착할 수 있다는 믿음을 걸고 내기를 한다. “진정한 삶, 마침내 발견되고 해명된 삶, 그러므로 실제로 살아 냈다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삶, 그것은 문학이다.”[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예술적 창조성과 글쓰기의 의미에 대한 전방위적인 탐색의 장이다.

다음으로, 프루스트의 소설은 타자와의 관계를 계기로 인간의 깊이를 들여다보는 자리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무수한 사랑 이야기는 마음에 관한 철학적 탐구나 다름없다. 전통적으로 프랑스 소설가들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무자비할 만큼 냉소적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었다. 시련을 이겨낸 연인들이 다다르는 결혼, 운명에 휩쓸린 자들을 구원하는 죽음과 같은 요소들은 프랑스 소설사의 주류에 들지 못했다. 대신 스탕달(Stendhal), 발자크(Honoré de Balzac),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졸라(Émile Zola) 등 19세기 작가들이 서술하는 사랑에 대해, 우리는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사랑으로 가장한 이기심과 어리석음이 아닌지 되물을 수 있다. 이 전통을 계승한 프루스트는 바로 그것이 사랑이라고 답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사랑은 연인 관계가 성립할 때까지는 환상이고, 그 뒤로는 오직 질투다. 인물들은 자신의 불안 때문에 타인에 대해 착각하며, 그런 세계에서 환상과 질투는 같은 마음의 양면이다.

왜 이렇게까지 사랑에 대해 비관적이어야 할까? 사랑의 감정을 분석하면서 프루스트는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이 왜 불가능한지, 한 사람을 내 것으로 만들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허망한지 보여 준다.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며, 자기 안에서만 타자를 인식하며, 그렇지만 그와 반대되는 말을 하면서 거짓말하는 존재이다.”[4] 우리는 남들을 알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프루스트에게는 마음의 현실이자 타자의 신비다. 작품에서 동성애가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이러한 사랑 개념과 관계가 있다. 다른 사람과의 사랑 너머에는 소설의 주인공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른 방식의 사랑이 있다. 동성애자 남성으로서의 체험을 반영하는 동시에 여성 동성애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선구적인 소설로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현대 퀴어 문학의 이정표와도 같은 작품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프루스트 소설의 사회사적인 면모이다. 모더니티의 증언자로서 그는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를 계승하고 벤야민(Walter Benjamin)을 예고한다. 프루스트는 19세기 말 매체와 교통, 산업의 발전이 가져온 생활의 변화를 소설 속에 적극적으로 반영했지만, 새로운 기술 문명을 환영하며 맞아들이기만 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전통적인 세계, 특히 상류 사회가 사라져 가는 모습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작가는 귀족 사교계의 연회 장면에 막대한 분량을 할애하지만, 연회는 더 이상 유혹과 음모의 장소가 아니다. 그곳에서는 오직 삶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가 전시될 따름이며, 귀족 계급과 그들이 대변하던 가치는 껍데기만 남기고 사라진 지 오래다. 그리고 옛 세계는 소설의 마지막 권 〈되찾은 시간〉에서 벌어지는 1914년의 세계 대전으로 폭력적으로 해체된다. 이것이 프루스트 소설의 네 번째 얼굴이다. 유년의 터전과 꿈을 다시 찾는 기쁨으로 시작한 소설은 점차 한 시대가 끝나 간다는 우울한 감각에 물들어 간다. 어린 시절의 내가 동경했던 세상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작품의 주인공 겸 화자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나서는 미래의 예술가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프루스트와 동행한 독자라면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읽은 것은 이미 새롭게 창조된 한 세계였으며, 작가는 19세기 사회에 작별을 고하면서 20세기 문학의 가능성을 활짝 열었다는 사실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한 시대의 끝과 함께 한 세계의 시작을 알리는 소설이다.

 

3. 문학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기억을 실마리로 한 글쓰기의 혁신, 삶과 예술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재고, 자아의 심층과 타자의 신비에 대한 탐구, 전근대 전통의 소멸에 대한 의식을 통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현대 프랑스 소설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문학적 현대성이 그 자체로 텍스트의 현재성을 보증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프루스트를 오늘날 왜 읽어야 할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작가가 자기 시대의 어떤 문제에 응답했는지 밝히고, 그 문제의 파장이 우리 시대까지 미치고 있다는 점을 보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학적 소명의 서사라는 주제로 돌아가 읽고 쓰는 일의 가치를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작가의 탄생을 탐구하는 소명의 이야기는 문학의 쓸모와 가치를 바탕에서부터 다시 정립하려는 시도로 읽을 수 있다. 소명을 깨닫지 못하고 방황하는 청년에게 문학의 쓸모와 가치는 당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문은 매체 기술과 문화 산업이 발전하는 1900년 전후 유럽의 상황을 배경으로 등장한다. 사진(1839), 축음기(1877), 영화(1895)가 발명되면서 문학의 재료인 문자는 정보를 저장하고 전달하는 매체로서의 독점적인 지위를 잃었다. 다른 한편 문학의 언어는 실증적 인문사회과학 및 대중적 언론의 언어로부터 분리됐고, 상당수의 작가는 사회 현실을 가리키고 재창조하기보다는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기치 아래 언어 실험에 몰두하는 길을 택했다. 이 모든 상황의 결과로, 문학은 계몽주의 시대에서 낭만주의 시대까지 누리던 사회적 권위를 점차 상실했다. 프루스트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문학의 가치에 대한 대대적인 평가 절하가 발생한 시대다.[5]

작가는 이 현대적 상황에 책임 있게 응답하고자 했다. 문학의 가치를 회의해 보고, 회의를 가로질러 정당화해야 한다. 한 청년이 사회와의 갈등을 딛고 성인의 책임을 받아들이는 대신 펜을 쥐고 지난날의 방황과 성장을 곱씹어 보겠다고 결단하는 이야기는 그런 역할을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모더니티 자체가 오랜 전통이 되어 버린 지금에 와서도 문학에 대한 불만은 수명이 다하지 않은 것 같다. 문학은 성가시고 번거롭다는, 현실에 개입하는 성숙한 담론이 아니라 개인의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교육 과정에서 부당한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불평에 응답하는 일은 여전히 만만치 않아 보인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프루스트의 고민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문학의 쓸모와 가치는 어디에 있으며, 다른 어떤 수단보다도 문학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 앞에서,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보여 주는 것은 읽고 쓰기를 통해서만 분별하고 사유할 수 있는 인간 경험의 무수한 색채이자, 문학을 통해서만 총체적이고도 명확한 방식으로 전달할 수 있는 감각적 세계의 놀라운 풍요로움이다. 마들렌은 잃어버린 내면의 보물을 솟아오르게 하는 기억의 기적 이상으로, 그 세계를 비할 데 없는 섬세함으로 무궁무진하게 펼쳐 놓는 글쓰기의 경이를 가리킨다. “작가의 문체는 직접적이고 의식적인 방식으로는 드러낼 수 없는, 세계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의 질적인 차이를 드러내며, 예술이 없다면 그 차이는 각자의 영원한 비밀로 남을 것이다.”[6]

개별적 경험의 차이를 드러내는 문학의 힘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프루스트는 자기 시대의 다른 문제들과도 대결하고자 한다. 학술의 체계와 고전의 권위를 빌려 삶을 탐구하는 실증적 학문 제도로서의 인문학, 아름다움이 단지 힘겨운 세계에 대한 해독제로 작용할 뿐인 퇴폐주의적 순수 예술도 그에게는 문제적이다. 그것들에 대해 회의하며 작가는 구체적 인간의 깊이를 탐사하려 했고, ‘잃어버린 시간’을 어떻게 의미 있는 것으로 다시 살아낼 수 있는지 모색했다. 당대에 팽배한 허무주의와 몰락의 감정에 대한 나름의 응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프루스트가 세상을 떠난 지 한 세기가 지난 뒤에도 우리는 그를 길잡이로 삼아, 사라져 가면서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 세계들을 분간하는 법을 배운다.
[1]
조르주 벨몽(심민화 譯), 《나의 프루스트 씨: 불면의 동반자 셀레스트 알바레의 회고》, 시공사, 2003, 356쪽.
[2]
마르셀 프루스트(김희영 譯),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 집 쪽으로 1》, 민음사, 2012, 15쪽.
[3]
마르셀 프루스트(김창석 譯),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1: 되찾은 시간》, 국일미디어, 1998, 289쪽.
[4]
마르셀 프루스트(김희영 譯),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1: 사라진 알베르틴》, 민음사, 2022, 65쪽.
[5]
William Marx, 《L’Adieu a la litterature: histoire d’une dévalorisation, XVIIIe-XXe siecle》, Minuit, 2005, pp. 12-13.
[6]
마르셀 프루스트(김창석 譯),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1: 되찾은 시간》, 국일미디어, 1998, 2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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