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의 일
1화

프롤로그 ; 에디터는 크리에이터다

나는 책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계의 측량할 수 없는 광활함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고, 그것이 주는 환희에 나를 맡기는 법도 알게 됐다. 우리가 겪는 모든 확장의 주요한 부분, 소위 말하는 ‘자신을 넘어서고자 하는 갈망’, 우리 본질의 가장 훌륭한 점인 이 모든 거룩한 갈증은 늘 새로운 체험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도록 고취하는 책의 기지에 빚지고 있다.

―슈테판 츠바이크(오지원 譯), 《모든 운동은 책에 기초한다》, 유유, 2019, 23쪽.


언젠가 출근하는 전철 안에서 좀처럼 잊히지 않는 만평 한 컷을 보았다. 다수의 인간 군상이 모두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좀비처럼 걸어가는데, 그 행렬에서 비켜난 한적한 벤치에 인공지능 로봇이 편안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책을 읽는 광경이었다. 걷는 와중에도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인간 무리와 책을 읽으며 유유자적 사유하는 기계의 배치도는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인간이 있어야 할 자리에 기계가, 기계가 있어야 할 자리에 인간이 놓인 전도된 이미지 한 장에서 앞으로 도래할 인간과 기술의 미래를 통째로 보았다면 과장일까. 아니 이미 상당히 진행된 현실이라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다만 나는 그 만화에서 희망의 씨앗도 보았다. 책이라는 오브제가 상징하는 ‘사유하는 존재’야말로 그것이 인간이든 기계든 맹목적인 흐름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독자적이면서도 우아하게 각성 상태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살아 있음의 참맛, 일과 시스템에 압사당하지 않고 유유자적하는 생의 참맛이 ‘독서하는 기계’를 통해 우회적으로 환기되자 책 만드는 나의 직업이 특별한 각도로 다가왔다. 사유하는 최후의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계속 책을 만들어야겠다는 결기가 솟은 건 그 때문이다.

중세 사람들은 책을 하나의 세계로 받아들였다. 철근이나 벽돌이 아니라 언어로 이뤄져 있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바벨탑 같은 세계일지라도, 인류는 수천 년간 책을 통해 정보를 전달하고 지식을 기록하며 바벨탑 너머 천공의 영속성을 추구했다. 이 신비로운 책의 역사에서 편집자, 에디터(editor)는 최초의 저자이자 발행인이었다. 지식과 교육의 세계를 대표하며 산업과 문화의 경계에서 파수꾼 역할을 해왔다. 근대에 이르러 에디터는 저자의 얼굴에 가려진 채 출판이라는 무대 아래에서 그림자로 기능한다. 하지만 책의 세상은 언어와 세계, 저자와 독자를 잇는 에디터 없이는 존립하기 어려울뿐더러 저자가 편집을 겸하는 디지털 독립 출판 시대에 에디터의 정체성은 더 긴요해졌다.

물론 책의 주인공은 저자다. 저자가 책의 원천이자 소스(source)이기 때문이다. 그 주인공에게 에디터는 맞춤한 무대를 마련해 주고 스포트라이트를 비춰 주는 연출자로서 무대 아래를 지킨다. 이 자리는 배우들에게 반응하는 관객의 자리와도 다르다. 어쩌면 좌석 자체가 없다. 에디터는 책이라는 사물을 생산·창조하기 위해 자신의 물성을 포기하고 기능적으로 움직일 때 성공하는 존재다. 따라서 조명이 왜 나를 비추지 않는지 불평하기보다 세상의 무수한 익명들 가운데 주인공이 될 준비를 마친 이를 제때 알아보고 무대 위로 올려세우는 능력을 연마해야 한다. 무의미한 일상에서 사물과 현상을 유심히 관찰하고 숨은 맥락과 의미와 가치를 찾아내는 데서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그이는 타고난 에디터다.

오늘날 에디터는 단순히 저자의 글을 다듬어 책 만드는 사람에 국한되지 않는다. 디지털 초연결 사회에서 말과 글을 업으로 삼는 지적 생활자이자 대화 중독자이며 사람과 사람, 세상과 세상을 잇는 섬세한 연결자로 살아간다. 그러자면 에디터는 ‘언어-사람-세상’으로 이어지는 관계의 삼각형을 끈질기게 응시하고, 일상의 모든 것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습관이 몸에 붙어야 한다. 학습하고 배우는 사람의 정체성을 평생 유지하며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의 세상은 드넓고 출판의 항로는 방대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으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어 수많은 사람이 여러 생을 거듭해 이어 달리는 항로 끝에 책이라는 보물섬이 놓여 있다. 여기에 이르려면 에디터는 크리에이터(creator)가 되어야 한다. 달리 보고, 새롭게 구성하여, 판을 바꾸는 일에 도전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에디팅(editing)은 인간만의 일이자 가장 인간다운 일이다. 0 혹은 1로 수렴되지 않는 비정형의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는 이 작업은 로봇과 인공지능이 완전히 대체할 수 없는 최후의 일이다. 설령 인간이 만든 모든 책을 인공지능이 읽고 학습한다 해도 말이다.

이 책은 줄곧 편집에 관해 말하지만 매뉴얼은 아니다. 24년 전 대학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우연히 출판계에 발을 들인 아르바이트생이 텍스트 안팎에서 의미와 가치를 좇고, 연결하고, 창조하는 일에 남은 생을 투신하고자 결심하기까지 경험한 일을 기록한 직업 에세이에 가깝다. 기획과 편집을 업으로 삼고 싶은 분, 이미 그 일을 하고 있다면 더 오래 지속 하고 싶은 분들을 염두에 두면서, 만인을 대상으로 에디터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리는 데 집중했다. 그래서 다소 거칠더라도 자기 고백적 서사를 통해 일(work)로서 편집이란 무엇인지, 그 본질이 드러나기를 희망하며 글을 썼다.

나는 출판 노동 당사자로서 이 정체성을 스스로 자각하기까지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다. 경력의 절반을 회의하는 관찰자로 살았고 나머지 반을 분열하는 주체로 살았다. 일이 쉬웠던 적이 없고 사람 역시 수월했던 적이 없다. 그런데도 여태 이 일을 하는 이유가 나조차 궁금했고 한 번은 꼭 이 일의 지독한 매력을 언어로 정리해 보고 싶었다. 말과 글, 생각과 사유가 산업의 질료가 되는 출판업의 가치를 세상 사람들이 더 많이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도 한편에 있다.

텍스트의 미래가 위협받는 격랑의 시대에 에디터로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나의 편집 경험을 되도록 객관적으로 돌아보고 분석하여 나름의 원리나 철학으로 승화해 보고자 했다. 사적인 이야기와 관념적인 논리가 교차하며 다소 어지러운 글이 펼쳐질 테지만 이 책을 읽는 독자분들은 나의 분투, 우리의 모색을 너그럽게 읽어 주셨으면 좋겠다. 책 읽는 당신을 매 순간 상상하며 책을 만들어 온 사람의 이야기이니 어느 지점에선가 우리는 지음(知音)처럼 반갑게 조우할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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