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의 일
2화

에디터는 욕망한다

편집적 욕망의 삼각형


“하시는 일이 뭔가요?”
“편집자입니다.”
“편집자요? 그게 뭐지요?”
“책 만드는 사람이에요.”
“아, 작가들 글 고치는 일 하시는군요.”
“…….”
“힘드시겠네요. 요즘 출판 어렵잖아요.”
“……………….”

나의 직업은 도서 편집자다. 일명 책 만드는 사람, 흔히 에디터라고 부른다. 이 직종이 속해 있는 서적 출판업은 업태상 제조업이면서 한국표준산업분류로는 정보 통신업에 해당한다. 물품을 대량으로 만드는 제조업과 정보의 생산·가공·처리·제공 등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통신 기술을 이용하는 정보 통신업 사이에 나의 업이 놓여 있다. 그래서인지 출판은 정보 기술에 기반해 지식을 속도감 있게 다루는 첨단의 길을 달리면서도 여전히 가내 수공업 형태로 편집과 제작을 수행하는, 가성비 낮은 복잡 미묘한 업종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전선에 뛰어든 이래 동종업계 사람을 제외하고 나의 직업을 단번에 알아듣는 사람을 만난 기억이 거의 없다. ‘편집’이라는 단어 대신에 ‘책’을 말해야 통하고, 그마저도 원고 교정·교열 등 단편적인 편집 업무로 한정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글을 쓰고 책을 내려는 저자들조차 에디터의 역할을 온전히 이해하는 분이 드물다. 단순히 원고 읽어 주고 오탈자 수준의 오류만 바로잡아 책을 뚝딱 만들어 주는 사람 정도로 인식한달까. 사정이 이러하니 편집자라는 직업을 발음할 때면 나라는 사람 자체가 프레스기에 납작하게 눌리는 느낌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인식과 달리 내가 경험한 편집 세계는 전혀 단순하지 않다. 편집의 기본 소양과 기술을 익히고 숙련하는 데만 해도 십여 년은 족히 걸리고, 이 허들을 넘고 나면 기획과 마케팅이라는 산업의 거대 양봉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이 갈림길에서 출판의 양봉을 향해 보폭을 키우는 이가 있는가 하면 원고 편집이라는 핵심 직무를 더 깊게 파고드는 이가 있다. 능력의 차이일 수도, 취향과 선택의 문제일 수도 있다. 다만 한 가지는 동일하다. 어느 쪽이든 모두 에디터로서 ‘언어’와 ‘존재’를 경유해 남다른 ‘세계’를 꿈꾼다는 것.

에디터는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언어들에 탐닉하는 사람이다. 언어로 집을 짓고 자신만의 세상을 창조하는 존재들을 알아보고 발견하는 일에서 보람과 기쁨을 느끼는 종족이다. 그 언어적 존재들을 중개자 삼아 다채롭고 기이하며 낯선 세계들에 가닿기를 욕망한다. 사람들이 각자의 언어로 재현한 이상적 세계의 판본들을 수집하고 편집하여 지금 이곳의 불완전한 세계에 개입하기를 꿈꾼다. 우리의 개입이 다시금 언어를 추동하고 존재를 변화시켜 인류가 살아가는 세계를 질적으로 도약시키기를 바란다. 에디터에게 언어, 존재, 세계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다. 에디터는 언어를 통해 세계를 모방하고, 존재를 경유하여 세계로 확장한다.[1] 나는 이 편집의 삼각 구조를 관조하는 하나의 ‘눈(目)’이 될 때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2]
 

시대가 요구하는 에디팅과 퍼블리싱


1999년 7월 나는 우연하게도 세상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급격히 몸을 바꾸던 시절에 출판계에 입문했다. 당시는 세기말 아포칼립스의 분위기로 말미암아 사회 전반에 불안감이 가득했는데 한편으론 새 시대에 대한 기대감도 적지 않았다.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는 경로가 다양화되더니 곧 스마트폰이 출현하면서 문화와 경험을 공유하는 기술적 툴(tool)이 보편화됐다. 책과 저널 등에 기반한 텍스트 문화는 디지털 이미지와 동영상에 미디어 패권을 내주며 호된 몸살을 앓았지만 결국 몸을 바꾸고 언어를 변화시켰다.

나는 가방에 종이책이 없으면 가벼운 산책도 나서지 못하고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에 홀려 있다가도 금방 물려 활자로만 채워진 책장을 펼쳐야 숨통이 트인다. 하지만 PC를 이용해 전자책을 만들고 북트레일러와 카드뉴스를 기획해 SNS 채널에 홍보하는 일을 거의 자동으로 수행한다. 이제 에디터는 문헌적 오류 없이 책을 만들고 보도자료만 잘 써서는 곤란하다. 언론과 서점의 영향력은 예전 같지 않고 출판사 자체가 콘텐츠 플랫폼으로 거듭나 북클럽과 구독 마케팅 등을 통해 독자와 직접 대면하는 시절이다. 온라인과 모바일을 기반으로 한 에디팅은 이제 우리 일의 디폴트값이 됐다.

이 같은 격랑의 시대를 에디터로 살면서 내가 확신하게 된 것은 종이책 기반의 출판업은 축소될지 몰라도 콘텐츠 플랫폼으로서 퍼블리싱(publishing)과 그것의 주체인 에디터는 절대 약화되거나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오히려 정보 구성과 지식 전달에 있어서 요구되는 역할이 더 많아졌고, 저자와 독자를 연결하여 널리 알리는 출판 본연의 일은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없는 에디팅의 핵이 됐다. 발견의 시대, 연결의 사회에서 소신 있고 열정적인 에디터와 마케터는 사람들 눈에 금방 띈다. 책 만드는 사람들의 스토리는 변화무쌍하고 역동적이어서 자체로 드라마 현장과도 같다.

바야흐로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감각을 스스로 발화하는 시대에 에디터는 어떤 이야기를 꺼내야 좋을까? 자신만의 편집 경험과 스킬을 한 권의 매뉴얼로 정리하는 것도 공공에 이익이 될 것이다. 출판계에 입문하는 이들에게 갖춰야 할 소양과 덕목을 조목조목 짚어 주는 것도 좋겠다. 한때 베스트셀러만 연구했던 나는 이 강력한 실용적 쓰임새의 중요성을 모르지 않는다. 그런데도 굳이 메타적인 이야기를 건네려 한다. 잘 정리된 매뉴얼 도서도 많고 출판 학교도 제법 생겼지만, 에디터가 스스로 이 일을 오래 지속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고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책은 드물다. 무엇보다 일과 삶 양편에서 에디터의 직업적 욕망을 한 줄로 꿰려는 책이 없다. 내가 이 책에서 ‘편집하는 인간(Homo editus)’의 욕망을 제시하며 에디터의 일과 삶을 동시에 들여다보려는 이유다.
 

내적 질문에서 공공 어젠다로


진리를 향한 화두(話頭)가 불가의 참선 수행자들에게만 절실한 것은 아니다. 에디터도 매일 매시 매분 매초 질문을 먹고 자란다. 자아의 본래 면목과 세상의 참된 진리를 깨우칠 때까지 화두 하나 부여잡고 면벽하는 수행자들에 비길 바는 아니지만, 언어로 이루어진 관념의 성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에디터야말로 질문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질문에 질문을 거듭하다 보면 질문 그 자체가 답이 되고 책이 되는 시간이 찾아온다.

에디터는 직업적으로 질문을 던지며 답을 찾는 사람이다. 하루 종일 타인의 원고를 들여다보느라 구부정한 뒤태를 가졌을지언정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과 개입하고 싶어 안달하는 마음으로 누구보다 활발한 내면을 품고 살아간다. 이미 친숙하고 범용해서 진리처럼 굳어진 가짜 현실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이가 누구인지, 생각 없는 다수가 무의식적으로 좇는 욕망에 메스를 들이대 악성 종양을 도려낼 수 있는 이가 누구인지, 아무도 딛지 못한 지식의 절벽에 약초처럼 희귀하게 뿌리 내린 이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발견하려면 에디터의 내면에는 질문이 강력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놓친다. 알아보지 못한다. 보고도 못 본다. 에디터에겐 질문이 곧 사명이요 숙명이다.

질문하는 법을 배우기

나는 좋은 에디터가 되기에는 자질이 한참 모자란 사람이었다. 여러 복잡한 원고를 한 권의 책으로 만들기까지 꼭 필요한 일관성과 지구력이 부족했고, 무엇보다 산업으로서 출판을 제대로 구현하기에는 친시장·친자본 감각이 극히 떨어졌다. 논리보다 직관을 중시하고 다소 즉흥적인 데다 감정 기복이 심하며 사고의 구체성이 떨어지는 치였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인생의 절반을 에디터로 살았고, 때로는 잘한다는 기이한 소리도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 무엇이 나를 이 일로 이끌었을까? 어쩌다 나는 이 일에 발목이 붙들렸을까? 타고나기를 체력이 약해 엉덩이 힘과 직결되는 지구력을 요하는 일에는 젬병이었던 터라 1000매가 넘어가는 원고를 받아 들면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울상이 됐고, 자의식이 강해 자의식을 눌러야 원만히 해결되는 편집 과정에 수없이 분노하고 무수히 탈출을 꿈꿨다. 실제로 이직과 전직을 2~3년 단위로 시도하다가 나만의 전문 분야 없이 부평초처럼 떠다니기도 했으며 실패가 전부인 이력서가 유일한 자산으로 남았다.

그래도 자신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나만의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나는 무리에 휩쓸리기보다 내면의 목소리에 따라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 왔다. 일평생 화두 참선에 몰입하는 승려의 삶을 동경할 정도로 질문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삶을 추구했고, 내 안에서 질문이 사라지는 날들에는 살아 있다는 감각을 잘 느끼지 못했다. 서른이 될 때까지 나를 사로잡았던 질문은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였다. 묘하게도 질문은 질문을 낳았다. 질문이 있는 한 읽고 쓰는 일이 계속됐으며, 읽고 쓰는 한 사람과 세계는 늘 흥미진진한 관찰 대상이었다. 시간을 들여 관찰하면 그만큼 애정이 깊어졌다. 이렇듯 질문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읽고 쓰는 일에 복무하게 되며, 그러다 사람을 신뢰하게 되면 그들의 책을 만들게 된다. 그들의 책을 만들며 그들이 상상하는 세상과 동화된다. 그렇게 누군가는 에디터가 되어 가고 에디터로 살아간다.

어려서부터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었다 해도 질문의 방식을 배우는 데는 길잡이가 필요하다. 다행히도 나는 소소한 수다부터 심오한 논쟁까지 두루 대화할 수 있는 이들과 곧잘 연이 닿았다. 혹여 일방으로 말하거나 듣는 관계가 형성되면 내 쪽에서 선을 그었다. 그런 관계에선 질문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질문이 자라나지 않는 관계는 어떤 의미도 가치도 키우지 못하는 불모지가 된다.

출판 세계에서 기술적으로 대화를 즐기는 선배가 상사라면 ‘업무상’ 행운에 가깝다. 그러나 그것이 행운임을 몸소 깨닫기까진 시간이 걸린다. 출판계에는 생각이 깊고 대화를 즐기는 부류가 많이 유입되는데 나의 첫 주간님 또한 철학을 전공한 사람답게 일상의 대화에도 질문과 추론을 즐겨 적용했다. 오른손 검지를 치켜세우고 머리를 갸우뚱하며 “넌 왜 그렇게 생각하지?” 이러쿵저러쿵 답하면 또다시 질문이 이어졌다. “그래서 너의 결론은 무엇이지?” 정색하고 앉아 토론을 벌이는 시간이 아닌데도 유도 심문하듯 끊어지지 않는 그분의 질문에 신경이 곤두서곤 했다. ‘왜 저이는 사람의 말을 자꾸 분석할까, 그냥 느끼고 공감하면 안 되나?’ 혼잣속으로 불평하는 일이 잦았다.

훗날 내가 팀을 이끌고 부서를 총괄하는 데스크를 맡았을 때 주간님이 심심해서 그런 대화를 나눈 것이 아님을 알았다. 일을 촉발하려면 질문을 통한 문제의식이 필요하며, 그것은 상사의 잔소리로 이뤄질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스스로 느끼고 깨달아 자신의 방식으로 삼지 않는 한 질문하는 삶은 영원히 요원하다. 어느 결에 팀원과 후배들에게 추궁하듯 질문하며 일하는 내 모습에서 옛 상사의 모습을 발견하곤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직 물성을 입지 않은, 저자조차 자신의 메시지를 정리하지 못한 어수선한 원고를 마주하면 여전히 공포감이 밀려온다. 내가 제대로 읽었나? 이렇게 고치는 게 맞을까? 과연 이 제목이 온당한가? 이 디자인이 최선일까? 누가 읽을까? 얼마나 팔릴까? 제작비는 건질 수 있으려나? 편집 과정이란 적지 않은 인력과 시간과 자본이 투여되는 끊임없는 의사결정의 연속이므로 질문에 답할 수 없다면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 충분하지 않고 완벽하지 않더라도 단계마다 결론을 내리고 그 결정에 책임을 져야 한다. 스스로 묻고 답하는 일련의 사고 훈련이 덜 된 사람은 중간에 나자빠진다. 상사에게 미루고 후배에게 맡기다 스스로 자기 자리를 지운다. 그만그만한 책을 내다 존재감도 없이 사라진다.

에디터는 분절과 단속으로 점철된 일상의 세계를 연속된 흐름의 언어로 변환하는 일, 혹은 그 반대의 일을 습관처럼 해내야 한다. 그러자면 사변을 쳐내고 핵심 생각을 붙드는 힘이 중요하다. 작디작은 문제라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며 문제를 문제답게 키워 공공 의제로 승화해야 한다(이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책세상문고 사례를 통해 살펴보겠다). 에디터의 강한 문제의식 하나가 1만 명의 생각을 바꾸고, 10만 명의 감성을 바꾸고, 100만 명의 삶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면 오만일까? 하지만 기적처럼 그런 일이 벌어지고는 한다.

그래서 필요한 건 재능이 아니라 질문이다. 삶에 대한 질문, 사람에 대한 궁금증, 사물에 대한 호기심, 무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 앎의 도약이 주는 환희 등등. 이것은 모든 이에게 가능하다. 그리고 그 질문과 호기심과 앎의 욕구는 결국 언어의 회로, 문자의 체계를 따라 움직인다. 문제는 질문을 계속 이어갈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항심(恒心)과 하심(下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다. 항심이 시간을 통과하는 힘이라면, 하심은 어디서건 무엇이건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다.[3]
 

편집은 창조다


그렇다면 편집(編輯)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일정한 방침 아래 여러 가지 재료를 모아 신문, 잡지, 책 따위를 만드는 일. 또는 영화 필름이나 녹음 테이프, 문서 따위를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하는 일”이라고 규정한다. 여기서 핵심 구절은 ‘일정한 방침 아래’와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하는 일’이다. 사실 문서나 자료를 일정한 방침 아래 섞고 짜깁기하는 행위는 출판 현장 외에서도 수시로 이루어진다. 신문과 방송의 뉴스만 봐도 그렇다. 공영 매체의 뉴스는 흔히 객관적 사실로 받아들여지지만 실상 그것을 취재하고 보도하는 이들의 관점이 취사선택하고 강조한 정보다. 편집되지 않은 정보란 없다. 일본의 편집공학자 마쓰오카 세이고는 인간의 모든 역사가 편집에서 시작했다고 주장할 정도다. 그는 인간의 DNA 자체가 오랜 세월 편집된 인류 역사의 가장 강력한 증거라고 설명한다.[4]

창조가 곧 편집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한국의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은 짜깁기 기술로서의 ‘에디팅(editing)’과 창조적 능력에 해당하는 ‘에디톨로지(editology)’를 구분하면서, 인식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과정에 관여하는 편집이야말로 창조의 근원이라고 말한다.[5] 이는 애플 회사를 창립한 스티브 잡스의 슬로건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와도 직결된다. 잡스는 2000년대 최고의 혁신으로 꼽히는 아이폰을 개발하면서 누구나 주머니에 슈퍼컴퓨터를 휴대할 수 있는 시대를 열었다. 플라스틱 쿼티 키보드 대신에 손가락으로 터치하는 멀티스크린을 도입해 전자기기에 익숙하지 않은 어린아이부터 노인들까지 스마트폰을 즐기도록 만들었고, 손안에 들어오는 작은 휴대폰으로 글자 수 제한 없이 문자를 주고받는 소통 공간을 열었으며,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제작해 SNS로 실시간 공유하는 디지털 소통 문화의 초석을 다졌다. 이런 선도적 IT 기술을 토대로 ‘아랍의 봄’으로 상징되는 중동의 민주화가 촉발됐고, 2020년 이후 코로나19 팬데믹 쇼크에도 불구하고 격리된 세상에서 대다수 사람이 미치지 않고 살았다.

캐나다 저널리스트 맬컴 글래드웰은 잡스의 천재성이 디자인이나 비전이 아니라 바로 이 ‘다른 것’을 보고 개량하는 능력, 즉 편집력에 있다고 지적한다. 통신 수단에 불과했던 휴대용 전화기 한 대에 컴퓨터와 음향기기와 카메라를 모두 탑재할 수 있다고 믿은 사람은 당시 스티브 잡스가 유일했다. 키보드 없이 컴퓨터 화면을 터치한다는 개념도 그가 창안했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엄밀히 말해 무에서 유를 이뤄낸 창조가 아니다. 기존의 유에서 또 다른 유를 이뤄낸 편집이다. 익숙한 사물의 질서를 다르게 보고 새롭게 해석하며 창의적으로 연결해 재구성하는 행위, 이것이 편집의 본질이며 인간적 창조의 핵심이다.

시장을 창출하는 기획

수습 에디터 시절, 자기 글에 골몰하는 문인의 정체성이 강했던 나는 타인의 원고를 한 권의 책으로 ‘완성’하기 위해 ‘일정한 관점이나 방침’을 연마하는 일에 둔했다. 에디터로서의 정체성이 거의 없었다. 책을 만드는 에디터는 인간과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반성적으로 사유하며, 열린 마음으로 소통해야 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인식하게 된 것은 책세상 출판사에서 ‘우리시대’ 문고를 편집하면서부터다.

책세상은 한국을 대표하는 인문 출판사로, 내가 처음 입사했던 2001년에는 ‘우리의 눈으로 우리 시대를 읽는다’를 취지로 기획된 ‘책세상문고·우리시대’가 출판 시장에서 큰 호응을 얻고 있었다. 당시 편집권을 총괄하던 김광식 주간은 국내에 박사급 강사가 5만 명이 넘는다는 기사를 우연히 읽고 우리시대 시리즈를 기획했다고 신문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단순히 기사 한 줄의 영향으로 일본의 이와나미(岩波文庫)와 프랑스의 크세주(Que sais-je)에 견주는 문고 시리즈가 나오진 않는다. 남아도는 지식인 그룹과 넘쳐나는 사회 이슈를 연결하는 ‘편집적 능력’은 출판 아이템과 필자 발굴에 대한 집요하고도 오래된 문제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우리시대 시리즈는 기획 당시 크게 두 가지 목표에 집중했다. 하나는 30~40대 젊은 연구자들이 난민촌, 원조 교제, 비정규직, 초국적 기업, 영어 공용화, 디지털 거버넌스 등 우리 시대가 당면한 다양한 이슈에 학문적 근거를 갖고 발언하는 장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대학을 졸업한 후에 마땅한 읽을거리가 없는 독자들에게 지적 갈증을 해소하고 문제의식을 키워 줌으로써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의 헤비 리더(heavy reader) 또는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로 성장하도록 돕는 일이었다. 저자군을 육성하고 독자층을 키우자는 이 두 목표는 출판 명분이 확실해서 책세상 내부 구성원들을 강하게 결속했고, 불가능해 보이던 종수를 단기간에 출판하며 인문 교양 문고 시장을 열어젖혔다.

우리시대의 행보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책세상문고 두 번째 시리즈 ‘고전의 세계’와 세 번째 시리즈 ‘세계문학’으로 이어지면서 본격적으로 문고 시장의 부활을 알렸다. 광복 이후 국민의 계몽을 담당하며 크게 부흥했던 한국의 문고 출판은 문학 전집과 단행본 출판에 자리를 내주며 1970년대 이후 사양길을 걸었었다. 책세상문고 시리즈는 30년 만에 국내 문고 시장을 새롭게 부활시키면서 국내 인문학과 동서양 고전을 작지만 단단한 물성으로 대중에게 전파하는 데 성공한 셈이다. 2000년 이후 지난 20년 동안 책세상문고에 영감을 받아 특색 있는 문고 시리즈가 여럿 출현했고 그 흐름은 현재까지 이어져 분야와 내용을 막론하고 혁신적인 시리즈가 끊이지 않는다.

죽은 시장을 되살리거나 없는 시장을 만들어 독자층을 창출하고 확장하는 일이 지식 사회에 어떤 흥을 불어넣는지, 팀원으로서 함께한 경험은 값을 매기기 어렵다. 이런 성공 DNA가 몸에 각인된 사람은 대형 프로젝트 론칭을 앞에 두고 의심하고 회의하는 구성원들에게 확신을 불어넣으며 누구보다 빠른 실행력을 보일 가능성이 크다. 출판은 데이터가 생명이지만 그것으로만 움직이는 산업이 아니기에 에디터의 다양한 경험과 강력한 신념이 프로젝트의 향방을 왕왕 결정짓기도 한다. 그런 에디터의 신념은 바로 ‘질문하는 힘’에서 비롯한다고 나는 믿고 있다.
[1]
프랑스 문학 평론가 르네 지라르의 탁월한 서사 이론인 ‘삼각형의 욕망’에 따르면 자기 자신에 만족하지 못하는 개인은 자기 자신을 초월하려는 욕망을 가지며, 초월은 자기가 욕망하는 대상을 소유함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런데 자본주의 체제에서 개인은 자연 발생적인 자신의 진짜 욕망에 지배를 받기보다 중개자의 욕망을 모방함으로써 대상에 가닿으려는 간접화 현상에 쉽게 물든다. 따라서 욕망이 욕망을 모방하는 가짜 욕망들의 세계가 판치며 대상과 주체의 간격은 쉽게 가까워지지 않는다. 이것이 시장 경제 체제에서 사람들이 진정한 사용 가치를 추구하는 대신에 비진정한 교환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가짜 가치의 지배를 받는 원리라고 르네 지라르는 설명한다. 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교환 가치가 가장 낮은 언어를 통해 세계를 모방하고, 존재를 경유하여 세계로 확장하려는 에디터의 욕망이야말로 진정한 사용 가치를 추구하는 길이라고 여긴다. 르네 지라르(김치수·송의경 譯), 〈‘삼각형’의 욕망〉,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한길사, 2001 참조.
[2]
이 눈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서른 즈음이다. 건강을 돌보기 위해 시작한 국선도 수련과 다양한 명상을 통해 자아의 사고와 오감과 무의식을 관조하고 통제하는 또 하나의 눈이 있음을 알게 됐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두고 초자아의 눈 또는 메타인지(Metacognition)라고 부르는데,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인식하는 상태로서 일종의 인식에 대한 인식, 생각에 대한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에디터에게 필요한 능력 중 하나가 바로 이 메타인지다. 메타인지가 발달한 사람은 앎 자체를 관조하며 지식과 정보를 균형감 있게 다루고 재편하는 데 뛰어나다. 감정을 통제하는 능력도 탁월해서 여러 사람의 다양한 의사결정 끝에 탄생하는 편집이나 출판의 전 과정을 원만하게 운행할 수 있다.
[3]
고미숙,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북드라망, 2019, 131쪽.
[4]
마쓰오카 세이고(박광순 譯,) 《지의 편집》, 지식의숲, 2000, 83쪽.
[5]
김정운, 《에디톨로지》, 21세기북스, 2014,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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