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의 일
6화

에디터가 에디터를 만나다

이 장은 김담유 작가와 이다혜 에디터의 대화로 구성돼 있다. 경력 에디터와 주니어 에디터의 대담을 통해 출판 편집의 현재와 미래를 논했다. 이다혜가 묻고 김담유가 답했다. 대담은 2023년 3월 서울 을지로에서 진행됐다.

읽는 사람에서 읽히는 사람으로


늘 편집을 하는 입장이었는데 처음으로 담당 에디터가 생겼다.

전문 에디터에게 관리받는다는 사실이 좋았다. (웃음) 편집론을 다룬 이 책만큼은 꼭 좋은 에디터를 만나 숙련된 조언을 들으며 완성하고 싶었다. 아무래도 ‘에디터의 일’에 관한 책이지 않나.

읽는 입장에서 읽히는 입장이 되며 두렵진 않았나.

2006년에 시집을 낸 적이 있다. 꽤 오랜만에 두 번째 책을 발표한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일 것이다. 지난 3년간 일을 쉬고 글쓰기에만 집중하면서, 저자의 일과 에디터의 일이 다르다는 걸 다시금 체감했다. 아울러 문학 작품을 발표하는 것과 직업 에세이를 쓰는 것도 결이 퍽 다르다고 느꼈다. 에디터의 일을 논하는 이 책은 대중을 향해 있다 보니 타인이 내 글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가늠자 역할을 할 첫 독자의 눈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의 에디터’를 간절히 열망했던 것 같다. 아울러 함께 책을 만들며 동고동락했던 선후배 동료들을 기억하고 이 일을 막 시작한 젊은이들을 상상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후배들을 염두에 두고 무엇에 집중하며 썼나.

이 길을 즐겁게 그리고 오래 걸을 사람에게 나침반 역할을 해줄 키워드를 찾는 데 공을 들였다. 우선 관련 서적을 두루 조사했다. 에디팅에 관한 책들이 과거에 비해 많이 나왔더라. 출판편집론, 출판제작론, 실무 매뉴얼 외에도 베테랑 에디터들의 에세이가 쏟아지고 있고 해외 양서도 다수 번역됐다. 이제 국내에도 ‘좋은 편집’에 관한 담론이 제법 형성된 것 같다. 그럼에도 여전히 에디터의 목소리는 위축돼 있고 드러내길 꺼리는 경향을 느꼈다. 책 만드는 과정을 소개하면서 편집 노하우를 다룬다면 쓰임새가 제일 요긴하겠지만, 방법론보다는 원론을 다루면서 보다 넓은 층위에서 독자들과 소통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에디터만의 목소리가 도드라지길 바랐다. 그래서 자기 고백적인 경험담에다 나만의 인사이트를 얹어 일 욕구가 강한 젊은 친구들에게 전달해야겠다 싶었다. 정말로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웃음)

그러다 보니 정보를 드라이하게 준다기보단 작가 본인의 이야기를 편안하게 들려 주는 톤이 됐다. 저도 에디터로서 고민이 많았던 부분인데, 작가만의 결과 북저널리즘 종이책 시리즈의 담담함 사이에서 중간 지점을 찾느라 고심했던 것 같다.

그 고충을 충분히 공감한다. 이 원고를 쓰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에필로그에도 적었지만 건강 악화로 에디터로서나 독자로서 읽는 일이 힘들어진 시기가 있었다. 위기감이 컸다. 읽는 일이 직업인 에디터로 더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는데 내 안에서 이 일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강한 열망을 발견했다. 그때 이 원고를 쓸 결심을 했다. 읽기를 막 배우기 시작한 아이처럼 천천히 관련 도서를 찾아 읽으면서 글감을 선별해 나갔다. 여기에 1년이 걸렸고 이후 초고 쓰는 데 6개월, 퇴고하는 데 6개월, 그렇게 1년이 더 흘렀다. 이왕 시작한 일, 용기를 내 SNS와 온라인 콘텐츠 플랫폼 몇 군데에 글을 연재했다. 일반 독자도 ‘책 만드는 사람의 일’에 관심이 있을까? 이렇게 고리타분한 글도 읽어 주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했는데 놀랍게도 내가 진지하게 말을 거니 진지하게 응답하는 독자가 있더라. 편집을 떠나서 자신의 일을 종합적으로 돌아보고 통찰하려는 의지가 멋지다고 응원해 준 분도 있었다. 나를 발견해 준 사람들의 ‘눈’이 고맙고 신기하다.

재밌게 읽었다고 댓글을 단 기억이 난다. 편집이란 작업의 속성을 많이 고민할 때라 공감하며 읽었다.

댓글을 읽고 큰 힘이 됐다. 내겐 독자의 반응이 필요했다. 한동안 내면에 몰입해 있다 보니 자기 과잉이랄지 톤이 좀 강했고, 그래서 네 글엔 독자가 없다는 혹평도 들었다. 톤 조절이 안 된 채로 출판 시장에 내놓으면 독자와의 접촉면이 약해질 거라고 보았다. 다행히 적재적소의 에디팅이 붙으면서 열두 편의 글을 네 가지 테마로 분류하고, 긴 호흡의 글을 소절로 나누고, 에피소드들의 과잉이나 결핍을 보완했다. 완성된 원고를 보니 한결 가지런해진 것 같다. 저자에겐 에디터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몸에 새기는 시간이었다.

편집의 팔할은 덜어내는 과정 아닌가. 오랜 시간 공들여 쓴 글인데, 축약하고 수정하는 과정이 속상하진 않았나.

내가 공들인 대목마다 콕 집어 줄이거나 삭제하자는 에디터의 메모를 보고 ‘귀신 같다’고 생각했다. (웃음) 멀쩡한 한국말 놔두고 외래어를 제안할 땐 근심이 깊어지기도 했다. 단행본 출판, 특히 인문서 편집은 한자어를 포함해 우리말 쓰기를 고수한다. 그게 직업 윤리다. 가령 나는 ‘생활 양식’이라 썼는데 에디터는 ‘라이프 스타일’로 고쳐 달라는 거다.

제게 ‘생활 양식’과 ‘라이프 스타일’은 완전히 다른 단어다. 생활 양식이란 말은 주로 교과서 혹은 역사 박물관 소개글에서만 봤다. (웃음)

X세대인 내겐 이 단어가 더 익숙할 뿐만 아니라 직업상 옳은 표현이다. 하지만 잠정적 독자인 MZ세대 에디터의 의견을 받아들여 ‘라이프 스타일’로 고쳤다. 글로벌 디지털 문화에 익숙한 MZ세대에겐 ‘생활 양식’이야말로 고어이자 사어겠구나 싶더라. 그런데 ‘편집’을 ‘에디팅’으로, ‘편집자’를 ‘에디터’로 전부 바꾸자 할 때는 정말 고민이 깊었다. 보통 편집과 기획을 다른 일로 보지만 내가 경험한 바로는 편집(editing)은 생래적으로 그 안에 기획(planning·managing)을 품고 있다. 아울러 현실의 편집자는 기획과 편집뿐만 아니라 제작, 홍보, 마케팅까지 두루 커버한다. 해서 ‘편집’ 또는 ‘편집자’라는 말을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널리 알리려는 강한 의지가 있었다. 하지만 이 단어의 허들이랄까 벽이랄까 그걸 염려하는 에디터의 조언에 결국 수긍했다. 책 만드는 과정엔 저자로서 고집하는 부분과 에디터로서 제안하는 부분이 상충하기 마련이고, 그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아가는 과정이 책 만드는 일의 묘미인 듯싶다. 이걸 잘 통과하면 내 원고가 모두의 책이 된다.

편집하는 사람으로 수십 년을 일해 왔으니, 에디터의 고집에 끝까지 강경하게 주장하진 못했겠다. 원고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에디터에 대한 배려가 느껴지는 지점들이 있었다.

누군가의 글을 읽으면 표면에 드러난 메시지 외에도 느껴지는 바가 있다. 의도나 태도 같은 것. 텍스트를 오래 많이 접하다 보면 문장 하나만 읽어도 글쓴이가 어떤 생각, 어떤 정서를 품고 있는지 가늠된다. 에디터가 교정 파일에 남긴 메모를 읽을 때면 해당 부분이 그냥 거슬려서가 아니라 나름 고투하며 결론을 낸 뒤 수정안을 제안했다는 게 읽혔다. 무엇보다 독자 입장에서 내 원고를 품평해 줘서 고마웠다. 한참 어린 후배 에디터지만 어쩌면 그 시절 내가 결코 갖지 못했던 유연한 사고와 태도로 일하는 모습이 멋져 보였다. 그래서 메모 하나하나를 꼼꼼히 읽고, 나의 것을 잃지 않으면서 당신의 것을 받아들이는 지점에 대해 오래 궁리했다. 어떤 대목은 에디터의 제안을 따라 싹둑 잘라 버리니 홀가분해지기까지 하더라. (웃음)
 

좋아하는 일을 지속하는 방법


저를 보며 함께 일했던 동료들, 가르쳤던 후배들이 많이 떠오르셨을 것 같다.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나?

출판 에디터는 보통 3년, 5년, 10년 단위로 전환점을 갖는 것 같다. 3~5년 차는 동종 업계에서 이직이 잦고 10년 차는 전직이 많다. 그 이상 버텨 편집장이나 편집주간, 본부장 등 조직에서 중요 직책을 맡는 사람은 소수다. 수습 시절부터 함께했던 후배들은 이제 어엿한 팀장급으로 성장했는데 또래 에디터나 선배들은 조직을 많이 떠났다. 그중 일부는 출판사를 차렸고 나도 그렇다.

자의든 타의든, 이 업계에 오래 있지 못하고 떠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요즘 업계 얘기를 들어보면 명퇴가 빨라지고 있다. 내가 한창 배우던 시절에는 50~60대도 실무에 몸담는 사람이 많았다. 이젠 40대 초반이면 자타의로 물러나 경력을 전환한다. 했던 일들을 바탕으로 유사 업종으로 이직하거나 번역하거나 글을 쓴다. 아예 업종을 변경해 자영업을 시작한 사람도 있다. 젊은 분들은 전망 좋은 IT 업종이나 디지털 콘텐츠 분야로 빠르게 옮기기도 한다.

아예 다른 일을 하는 사람도 있나?

동료 중에 농부로 전향한 사람이 있다. 제주로 내려가 감귤 농사를 짓는데, 에디터 출신이라 그런지 귤이라는 상품을 알리는 방법이 다르더라. 무슨 일이든 기획력이 필요하지 않나. 사업의 방향성을 담아 농장 이름을 짓는가 하면, 감귤 농사에 스토리를 입히고 구독 서비스를 만들어 크라우드 펀딩까지, 에디터가 그러하듯 자기 일을 한 줄로 꿰어 일관성 있게 알리더라. 기존 유통망에만 기대지 않고 과수원과 소비자를 적극 연결하면서 귤이라는 상품에 자기 정보값을 더하는 모습을 보니 이게 에디팅이다, 싶었다.

한때는 조금이라도 좋아해서 시작했던 일일 텐데. 지속하지 않는 이들은 왜 그럴까?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적성이 맞지 않는다거나 업계에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거나. 한 가지 분명한 건 에디터들의 수명이 짧아지고 있다는 거다. 구조적으로 소진되는 거다. 당연하다. 현 출판계는 에디터에게 상당히 여러 가지 역할을 요구한다. 그에 비해 대우는 부실하다. 주로 책이 안 팔린다는 이유다. 2000년대 초반 수습 시절의 나는 좋은 저역자를 만나 작업하는 것 자체가 좋아서 연봉 협상, 복리 후생 따위를 고려하지 않았다. 박봉에다 연차도 마음대로 못 쓰고 거의 매일 야근했다. 마감하느라 36시간 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10년을 일하자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더라. 본가로 내려와 요양하며 쉬는 동안 배울 건 다 배웠다 싶었다. 그래서 조직으로 돌아가는 대신 출판사를 차렸는데 순식간에 빚더미에 앉았다. 그 사연은 본문 3장 ‘포지션의 비밀’에 소개했다.

사업 실패에서 무슨 교훈을 얻었나.

배울 게 아직 한참 남았다는 걸 깨달았다. (웃음) 책을 만들 줄은 알아도 파는 법을 몰랐다. 대중과 시장을 알아야 했다. 마케팅을 공부하자, 베스트셀러를 만들자, 몸값을 올리자, 그런 다짐을 했다. 사업에 실패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다짐이다.

책 만드는 일만 해도 행복하던 사람이 왜 갑자기 그런 결심을 했나?

내 몸이 망가지는 상황에 이르고 보니 다시는 내 노동을 헐값에 팔고 싶지 않아졌다. 아무 비전 없이 커리어를 이어가기보다 요구 사항이 있다면 그만큼 해내고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학습해서라도 채우며 내 몸값을 올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태도를 바꾸니 커리어와 연봉이 확연히 바뀌더라.

기쁨이 컸겠다. 좋아하는 일에서 원하는 만큼의 보상을 받은 것 아닌가.

복귀한 뒤 운 좋게도 연달아 베스트셀러를 냈다. 에디터로서 나의 입지도 생기고 저자도 주목받고 회사 분위기도 좋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허탈했고 급격히 모든 일을 하기 싫은 상태에 빠졌다. 어느 날 심리학자 하유진의 《소명(Calling)》이라는 투고 원고를 검토하게 됐다. 심리학 이론을 토대로 커리어 서치와 전환 등을 코치하는 내용이었다. 무명 저자의 첫 원고였지만 흡인력이 있었다. 저자의 신실한 관점이 계속 글을 읽도록 만들었다. 그 힘에 이끌려 기획에 착수했고 몇 개월 후 《내가 이끄는 삶의 힘》이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이 책을 만들면서 당시 당면했던 직업적 허탈감의 정체를 바로 볼 수 있었다. 나는 나의 일을 삶의 차원으로 끌어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일과 삶이 분리된 채로 계속 소진되다 보니 내면이 공허해졌고 외부 평가에 쉽게 흔들렸다. 가령 내가 만든 책으로 회사 매출은 커지는데 왜 연봉은 쥐꼬리만큼 오르는지, 저자는 유명해지는데 왜 내 입지는 갈수록 위태로운지 등. 이 갭이 커지니 우울이 깊어지더라.

누군가를 조명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의 숙명 같다. 한편 상황적인 문제나 회의감에 그만두는 사람도 많지만, 이 일을 지속하는 사람도 많다. 그들의 동력은 뭘까.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엔 식욕, 성욕, 수면욕 외에도 앎에 대한 욕구가 있다. 세상과 사물의 이치를 정확하게 알고 나라는 존재를 온전히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 나는 이 욕구가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고 생각한다. 맛있는 음식 먹으면 기분 좋고, 안락한 환경이 마련되면 만족스럽다. 하지만 탁월한 문학 작품을 읽거나 논리와 분석이 빼어난 글을 접하면 말초적 감각을 뛰어넘는 쾌를 느낀다. 마치 유체 이탈이라도 하듯 내가 처한 환경이 낯설면서도 종합적으로 보이는 제3의 눈이 생긴다. 이건 책을 읽고, 쓰고, 만드는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열매다. 출판과 편집은 지식과 정보와 감각의 최전선에서 지금과는 다른 언어, 다른 존재, 다른 세상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이 맛을 보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한번 열리면 좀처럼 닫히지 않는다. 벽이 문이 된다.

앞서 말한 에디터는 끝없이 공부한다는 점과도 연결된다. 그 과정을 즐기는 사람들이 에디터로 일하는 것 같다.

언젠가 내가 만든 책들을 하나씩 세다가 그만둔 적이 있다. 수백 권이 넘더라. 책이 하나의 세계라면 나는 수백의 세계가 창조되는 데 관여한 셈이다. 내게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어불성설이다. 한 권 한 권 새롭게 펼쳐지는 세계가 흥미로워 이 일을 하고 있지만 나의 지적, 신체적 한계 앞에서 매번 좌절한다. 그럼에도 이 일을 계속하게 하는 동력은 무얼까. 일단 내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 재밌다. 몰랐던 세계를 자세히 알게 되는 것도 기쁘다. 책 덕분에 특별한 사람들과 교유하는 행복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맛에 수많은 좌절과 절망의 순간들을 감내하는 것 같다. 나는 최근에야 에디터로서 나의 모자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됐다. 본문에도 소개한 지바 마사야라는 일본 철학자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그가 강조하길, 앎의 세계에서 한계, ‘유한성’을 자각하는 일은 굉장히 중요하다. 종이책은 독립적이면서 유한한 하나의 물성이다. 자체로 완성품이다. 그 안에 오류가 많더라도 일단 완결됐다는 감각을 준다. 눈으로 활자를 읽고, 코로 잉크 냄새를 맡고, 손으로 종이의 질감을 느끼며 이뤄지는 독서 행위는 이 ‘불완전한 완결성’ 때문에 가능하다. 독자로서 우리는 한 페이지 단위로 정리되고 완결된 지식을 접하면서 묘한 편안함을 느낀다. 유한이 없다면 무한도 없다.

책을 사는 사람의 마음과도 비슷한 것 같다. 종이책의 물성이 좋아서 그걸 구입하고 수집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나.

맞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종이책은 앞으로 물성의 고급화를 더 추구할 것 같고, 소장욕을 자극하는 심미적 완성도가 마케팅의 가늠자 역할을 할 것 같다. 마치 중세의 필사본 성경처럼.

에디터는 글쓴이에게 직접적으로 제안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결국 이 글을 쓴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상상하며 완성본을 조율해 나갈 텐데, 그만큼 소통의 기술 또한 중요하겠다.

저자를 섭외할 때 출판사 브랜드가 미치는 영향은 상당하다. 그렇지만 결국 그들과 대면하는 에디터의 손에서 열매의 크기가 결정된다. 저자의 제2의 자아인 원고를 디렉팅하는 이가 에디터다. 영민한 저자는 에디터에게 격을 갖춘다. 그런 저자를 에디터는 더 성심껏 매니징한다. 나는 편집장이나 기획실장으로 일할 때도 초벌 원고를 내 손으로 챙겼다. 그 작업을 직접 해야 저자의 목소리가 ‘내 것’처럼 느껴지면서 원고의 전체상이 보이더라. 그래야 저자의 원고를 내 것처럼 떠들게 된다. 자기 글에 자기보다 더 풍덩 뛰어들어 열변을 토하는 에디터를 싫어할 저자는 드물다. 에디터는 원고를 대할 때 정확한 분석과 강력한 공감, 두 가지를 겸비해야 하는데 경험상 후자가 더 강한 무기였다. 공감되지 않는 원고는 아무리 애를 써도 잘 만들어지지 않더라.

다른 일과 마찬가지로 이 일도 사람 스트레스가 가장 클 텐데, 그걸 해소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에디팅은 지적 노동이자, 육체 노동이자, 감정 노동이다. 서비스업처럼 늘 사람을 대면하다 보니 곧잘 방전된다. 관계에 있어 매번 주도권을 쥘 수도 없는 노릇이니 사람 스트레스가 상당하다. 그런 때면 나는 주로 몸을 움직인다. 등산이나 트랙킹을 자주 하고 교외로 한가하게 나갈 여유가 없을 때는 퇴근길을 이용해 무작정 걷는다. 그러다 카페에 들어가 멍하니 차를 마시기도 하고, 심야 영화를 보며 영상미에 빠져들기도 한다. 에디터마다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 다를 텐데 나는 일단 사람들로부터 나를 격리시킨다. 혼자가 되어야 에너지가 채워지는 편이다. 명상이나 묵상을 통해 잠시 머릿속 생각을 잠재우는 것도 도움이 된다. 일상에서 공백이나 정적을 만들어 놔야 다시금 원고를 읽고 싶은 마음, 사람을 만나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저는 오히려 사람에 대한 스트레스는 또 다른 사람을 만나며 푸는 편이다. 환기되는 기분이다. (웃음) 본문에서 편집의 중요한 기술을 여러 키워드로 다뤘는데, 그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뭔지 궁금하다.

사람과 텍스트를 잘 읽고 핵심을 관통하는 ‘눈’을 강조하고 싶다. 이것이 기본이라고 본다. 기본이어서 중요한데 그걸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기본만 충실해도 에디터는 특별해질 수 있다. 일단 텍스트와 친근한 삶을 살아야 한다. 무엇이든 읽고 생각하고 질문하는 게 습관이 돼야 한다. 또 잘 읽어야 잘 발견한다. 무엇이 좋은지 나쁜지, 많이 읽은 사람이 잘 알아본다. 저자도 잘 찾아낸다. 반도체나 인공지능같이 요즘 주목받는 분야는 대중적 관심이 정점을 찍기 전에 전문가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 자기만의 저자 리스트가 있는 에디터는 기획력이 빠르고, 발 빠른 기획력은 매출과 직결된다. 조직이 좋아할 수밖에 없다.

핵심을 관통하는 눈이라는 본질은 여전하겠으나, 업계 변화에 따라 달라진 업무도 많겠다. 오늘날 에디터가 하는 일은 20년 전에 비해 무엇이 달라졌나.

앞서 말한 텍스트를 보는 눈, 예전엔 그 눈만 있어도 대접받았다면 이제는 연결자로서의 질문이 필요하다. 자신이 만든 책을 어떤 시장에 어떤 콘셉트로 매칭할지 궁리하는 거다. 예전엔 도서를 기획하면 목차를 잘 짜고, 저역자 추천 리스트를 잘 뽑고, 유사 도서를 잘 선별하면 됐다. 이제 그 정도는 기본이고 어느 구독 서비스에 연결할지, 어느 독자층을 타겟팅할지, 어느 커뮤니티를 공략할지 기획 단계부터 생각한다.

어느 순간부터 도서 시장은 박람회 스타일의 쇼핑몰처럼 됐다. 그만큼 책 하나 만드는 것뿐 아니라 이걸 가치 있는 상품으로서 얼마나 예쁘게 디자인할지, 어떤 혜택을 함께 줄지 고민하게 된다.

발견성이 콘텐츠 산업의 중요 화두다. SNS 등으로 모두가 연결되어 너무 많은 정보와 상품이 흘러 다니다 보니 ‘내 책을 어떻게 발견되게 할 것인가’가 중요해졌다. 또 소비자들이 책을 하나의 상품, 굿즈로 인식하고 있다. 자연스레 출판계도 반응할 수밖에 없다. 옳고 그름을 떠나, 다른 상품과 비교해 책으로만 할 수 있는 프로모션을 문화 차원에서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다. 서점에 책을 진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신간 출시와 함께 저자 북토크나 강연, 교육 프로그램을 필수 옵션처럼 고려하게 된 지는 오래다. 에디터가 할 일이 더 많아졌다.

세상에 내 책이 발견되도록 하기 위해 어떤 노력까지 해봤나.

우리 팀의 책을 베스트로 띄우라는 사장님의 명에 아침마다 강남 한복판에서 신간 홍보 책자를 배포한 적이 있다. 홍보 책자만 2만 부 넘게 찍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출근길에 예민할 대로 예민한 직장인들의 싸늘한 눈초리가 상처로 남았다. 그 후로 길거리 홍보는 접었다. (웃음) 대신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등 개인 SNS를 열심히 한다. 내 책을 알리려면 에디터인 나부터 알려야겠더라. 십여 년 전부터 ‘에디터의 하루’라는 태그로 글을 올렸는데 결이 맞는 사람도 제법 만났고 책연도 많이 맺었다. 일부러 다른 분야, 다른 취향의 사람들과도 친구가 된다. 그들의 전문 영역을 탐방하면서 아이템도 기획하고 저자군이나 홍보 채널도 수집한다. 홍보를 잘했던 케이스로 《공부의 철학》이 있다. 마케팅팀과 SNS 홍보 채널을 찾다가 다소 마니아틱하게 책을 리뷰하는 김겨울 유튜버를 알게 됐다. 그분 영상은 상술보다는 자신만의 독해에 방점을 찍더라. 협찬받은 책이라고 해서 마냥 호의적으로 홍보하지 않는 태도가 오히려 《공부의 철학》과 잘 맞겠다 싶었다. 겨울서점의 리뷰 영상이 기존 미디어와 온오프 서점에 2차, 3차로 퍼지면서 매출에 크게 기여했다. 잘 매칭된 인플루언서의 영향력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다 SNS를 열심히 한 덕분이다.

예전엔 마케터가 했던 역할들이 에디터에게 옮겨 가고 있다. 왜일까?

에디터는 저자와 제일 먼저 관계하면서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내기가 좋은 위치다. 연결성의 시대인 만큼 그 최전선에 놓인 에디터의 역할이 막중해졌다. 책에 대한 최초의 아이디어가 에디터에게서 나오니 당연한 흐름이기도 하다. 프로듀서, 디렉터로서의 면모가 더 요구되고 있다. 누군가의 지적처럼 기획은 이미 마케팅, 판매 지도를 품고 있어야만 한다. 해외 출판은 이미 이런 역할을 전담하는 에디터(acquiring or commissioning editor)가 있다. 아울러 우리가 흔히 아는 교정·교열 편집자(line editor·copy or manuscript editor) 전 단계에 개발 편집자(developmental editor)를 두어 저자와 원고 관리에 만전을 기한다. 책의 홍보와 프로모션은 예나 지금이나 마케터만의 일이 아니다. 마케터도 에디팅을 공부해야 하는 시대다.

책의 역할도 달라지는 것 같다. 더 이상 지식의 요람이 아니지 않나.

책은 정보와 지식을 전달하는 매체인 동시에 엔터테인먼트 도구다. 예전엔 시간 때울 때 주로 책을 읽었는데 요즘은 즐길 거리가 너무 많다. 유튜브라는 개인 미디어와 OTT라는 인터넷 스트리밍 서비스 확산이 결정적이다. 웬만한 정보는 유튜브에서 얻고, 웬만한 재미는 넷플릭스나 디즈니플러스에서 누린다. 책이 대중적 오락거리의 지위를 잃으면서 출판계는 오히려 취향 공동체를 겨냥한 주제와 고급화된 물성을 추구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 듯싶다. 당장은 디자인이나 소재 등 외적인 물성에 집중하고 있지만 내적으로도 전문화, 고급화를 추구할 거라고 본다. 과거 중세엔 문자를 알고 시간과 자산의 여유가 있는 귀족들이 책을 소장했다. 계급에 따른 문해력의 격차가 컸던 그 시대로 회귀하는 것 같다. 적어도 종이책에 관한 한.

시장은 워낙 빠르게 변해 가는데 이 트렌드를 따라가는 게 힘겹지는 않나.

힘에 부친다. 위기감도 느낀다. 그래도 에디터로 사는 한 미디어나 콘텐츠의 변화에 민감해야 한다고 본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심리적 저항을 내려놓는 것부터가 어쩌면 우리의 본업인지도 모른다. 새로운 콘텐츠 플랫폼이 출현하면 후다닥 달려들어 살펴본다. PC를 비롯한 전자기기에도 관심이 많은 편이다. 일단 새로운 미디어나 문서 툴, 홍보 툴이 출현하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다. 이런 여유가 가능한 건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을 믿기 때문이다. 형태가 달라질지언정 그 안에 담기는 인간의 내용물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거의 그대로다. 본문에서도 얘기했지만 ‘재구성’될 뿐이다. 이걸 꿰고 있으면 변화의 흐름이 두렵지 않다.
 

스트리밍 시대에 필요한 텍스트


이미지와 오디오와 영상을 소비하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출판 시장은 사양 산업이라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출판은 지는 별이지만 그렇다고 맥없이 소멸하진 않을 것이다.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인류가 고안해 낸 가장 창의적인 도구가 책이기 때문이다. 또 이미지와 오디오와 영상의 밑천이 바로 텍스트다. 그 텍스트를 담는 용기가 바뀌고 있을 뿐이다. 책 읽는 사람들이 많이 줄어든 건 사실이지만 책을 읽어 온 사람은 계속 읽고, 소장하는 사람은 여전히 소장한다. 그래서 이 지점을 고민한다. 굳이 사서 읽어야 하는 책은 무엇이 달라야 할까? 굳이 지갑을 열어 2~3만 원을 지불하게 만드는 책은 무얼까? 출판은 산업인 만큼 셀러를 만드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과제다. 《82년생 김지영》 같은 작품이 탄생하는 건 출판계 전체에 이롭다. 그럼에도 단 백 권만 팔리더라도 ‘결코 중고 서점에 내다 팔고 싶지 않은 책’을 고민하는 게 나의 본업이라고 생각한다.

‘한번 사면 결코 내다 팔지 않을 책’, 그런 책은 어떤 책인가?

모르겠다. 알려달라. (웃음) 일단 텍스트의 가치가 중요할 텐데, 인터넷에 떠다니는 실용적 지식이나 일상적 정보는 내용보단 전달자, 캐릭터의 목소리가 중요해졌다. 유튜버가 그걸 증명한다. 아울러 갑부가 아닌 이상 누구나 때가 되면 책장을 정리한다. 나도 이젠 책을 버리는데, 트렌드 지난 실용서를 제일 먼저 처분하게 되더라. 문학 전공자지만 소설책과 평론집도 많이 솎아냈다. 철학이나 사상서, 고전, 경전 등은 앞으로 완독할 일이 없을 텐데도 고이 모셔둔다. 비싸게 주고 사서 그런가? (웃음) 출판은 과거와 현재가 문자로 나누는 대화다. 시류를 무시해선 안 되고 시류만 따라가서도 안 된다. 인류가 오랫동안 천착해 온 가치들을 요즘 트렌드, 요즘 언어로 풀어내기만 해도 창조적인 에디팅이 된다. 가령 예전엔 ‘인권’만 다루면 되었지만 이젠 ‘여성의 인권’, ‘장애인의 인권’, ‘성소수자의 인권’, 나아가 ‘동물권’, ‘기계권’을 다뤄야 한다. 

그런 책을 만들기 위해 고수해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

에디터는 소속이 있든 없든 자기만의 백리스트를 상상해야 한다. 실은 조직 안에서 내가 소모된다고 느낄 때마다 버텼던 힘이 이거다. 하루는 켄 윌버라는 통합심리학자의 책을 주로 펴내는 샴발라 출판사 홈페이지를 찾아 들어간 적이 있다. 불교 서적이 많았는데 그 안에서도 수십 카테고리로 나눠 콘셉팅한 백리스트를 보면서 언젠간 나도 이렇게 만다라 같은 출판사를 차리고 싶다 생각했었다. 과거 우연히 심어둔 씨앗 덕분에 지금 내 출판을 준비하게 된 것도 같다. 요즘은 조직을 나와 창업하는 에디터들의 전략을 관심 있게 지켜본다. 특히 녹색광선이라는 1인 출판사는 근대 서양 문학을 주로 펴내는데 만듦새가 단아하고 고급스럽다. 컬렉터들에게 어필할 만하다. 형태도 형태지만 숨어 있는 명작을 참 잘 찾아낸다. 출판사의 전체 단행본이 불순물이 안 들어간 한 편의 시리즈 같다는 느낌을 준다. 어차피 메이저 출판사의 자본과 기획력과 마케팅을 따라갈 수 없다면 분야를 좁혀 전문적으로 파고드는 에디터가 성공 확률이 높은 것 같다. 여기에 더해 나는 어떤 취향 공동체를 좋아하는지, 어떤 커뮤니티를 지지하고 응원하는지를 한번쯤 기획의 각도에서 들여다보면 좋겠다. 결국 우린 누군가를 옹호하고 대변하며 연결하는 사람이니까.

사실 남의 취향은 둘째치고 내 취향조차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도 턱없이 많다. 관심사들을 하나로 묶어 가시화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내겐 ‘일=삶’이라는 공식이 머릿속에 있다. 일은 나를 실현하는 도구다. 사람들은 의외로 ‘일’이라는 것에 관심이 많다. 스티븐 킹도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독자들이 유독 좋아하는 소재로 ‘일’을 꼽았다. 잘 모르는 직업이라도 전문적이고 디테일한 면을 다루면 독자들이 그렇게 좋아한다더라. 노동은 번거롭고 피곤한 것이지만 그걸 즐기는 이에겐 자기 성장의 도구가 된다. 에디터는 이런 면에서 유리하다.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 즐겨 하는 것을 책의 무대로 끌고 올 수 있으니. 좋아하고 즐겨 하는 것일수록 잘 만들 가능성이 크다. 주 5일 동안 책 만들다 주말 된다고 책 생각이 사라지나?

사라지지 않는다. (웃음) 생각을 정제하는 일을 하는 사람 중 일과 삶이 스위치 끄듯 온오프(on-off)되는 사람은 없을 거다.

그러니 그럴 바에야 내 삶을 책의 세계로 끌고 들어가는 거다. 에디터의 질문은 금요일 밤에도 지속되고, 주말 내내 발효되어, 월요일 아침이 밝으면 고스란히 책이 된다. 일상 하나하나가 책의 소재가 된다. 단편 단편 끊어져 있는 무의미한 일상 속에서 의미를 읽고 맥락을 만드는 게 에디터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단순히 에디터에게만 한정되지 않는 것 같다. 무언가를 발굴하고 기획하고 만들어 내는 모든 일에 해당될 텐데.

그렇다. 사실 어느 업계에서든 당대의 베스트셀러는 사람들이 불편하게 여기는 무언가를 해결해 주는 상품이라고 한다. 뭔가 대단히 특별할 필요 없이 불편한 그 작디작은 문제 하나만 잘 해소해 줘도 팔린다는 거다. 그게 니즈(needs)라는 것일 텐데, 매스 미디어, 매스 콘텐츠가 성공하는 덴 이유가 있다. 왜 사람들이 〈오징어 게임〉에 열광하겠나. 사회적 격차와 그로 인한 인간 소외 문제를 게임이라는 손쉬운 알레고리로 풀어 주니 크게 공감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느끼는 작디작은 불편을 포착해 해소해 주는 것. 결국 많은 직업의 본질과도 닮아 있겠다.

많이 팔리는 책엔 분명 자본과 마케팅의 논리가 작용한다. 하지만 대중의 무의식과 니즈를 반영하는 영리한 에디팅이 우선한다. 상업적인 도서를 만들면서 이걸 배웠다.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당대 사람들이 지금 무엇에 목말라 하는지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대중에게 좀 더 친절해질 필요가 있다. 학술서를 만들 때조차 독자의 욕망, 책의 쓸모를 궁리해야 한다. 다행히도 깨어 있는 에디터를 종종 만난다. 그들이 계속 책을 만드는 한, 출판은 누군가의 미래가 될 것이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신가요?
프라임 멤버가 되시고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 이용하세요.
프라임 가입하기
추천 콘텐츠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