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의 정치학
3화

오래된 참호전, 은마아파트 재건축 (1)

100년 후의 강남


부동산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은마아파트에 대해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대치동 한복판에 위치한 은마아파트는 그 자체로 강남 재건축의 상징이자 강남 8학군 중산층의 표상이다. 수많은 학원에 둘러싸인 입지, 초중고교 어느 하나 뒤처지지 않는 뛰어난 학군, 테헤란로·삼성동 업무 지구와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 4424세대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세대 수, 3호선 역세권까지. 강남의 대표 주자가 될 수 있는 조건을 두루 갖췄다. 2023년 6월 기준, 아파트 시가 총액만 무려 9조 8000억 원이다.

은마아파트엔 고도성장을 거쳐 경쟁 사회로 치달은 한국의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 때문에 곧잘 국내외 사진가들의 오브제가 된다. 벨기에의 사진가 세바스티앵 쿠벨리에(Sebastien Cuvelier)는 2015년 9월 2~19일 룩셈부르크에서 ‘Eunmatown(은마아파트)’라는 이름의 전시를 열기도 했다. 그는 미국 교포인 여자 친구를 만나러 서울에 왔다가 은마아파트를 발견하고 주민의 동의를 얻어 곳곳의 사진을 촬영했다. 한국에 살아본 경험이 없는 외국인의 눈에는 은마아파트의 치열하면서도 처연한 모습이 경이로웠다. 그는 은마아파트가 한국을 상징하는 공간이라고 말한다. 강남의 은빛 말은 강남 부동산 신화의 시작이자 시금석이었다.

시간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낡고 바래게 한다. 1979년 준공된 은마아파트도 시간의 물결을 피해가진 못했다. 수많은 호화 아파트가 들어서며 은마아파트의 위상은 과거만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늙은 처지라고 꿈조차 초라할까. 마흔 살이 훌쩍 넘어 노년에 접어든 은마아파트는 오히려 더 큰 꿈을 품고 있다. 더 높게, 화려하게, 아름답게 다시 태어나도록 도시 계획을 수립하는 것, 바로 재건축이다. 은마아파트는 49층의 마천루가 되려는 꿈을 안고 있다.

은마의 꿈이 밈(meme)이 된 것은 재건축이 지연되면서다. 인터넷에 ‘100년 후 강남’이라는 키워드를 검색해 보면 온라인에 공공연하게 떠도는 사진 한 장을 볼 수 있다. 미래 건축물이 가득한 강남 한복판에 낡은 아파트가 서 있다. 아파트 벽면엔 은빛 말을 의미하는 ‘은마(銀馬)’라는 글자가 남루하게 적혀 있다. 100년 후에도 재건축이 이뤄지지 않는 것 아니냐는 웃픈 농담이다. 뉴스 형태로 꾸며진 밈도 있다. “[속보] 은마아파트 드디어 재건축 확정”이라는 제목의 가짜 기사는 조합 설립 80년 후 끝내 재건축에 성공한 은마아파트의 이야기를 단신으로 전한다. 재건축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명을 달리한 조합원·투자자의 추모 공원 조성과 함께 재건축 기념 디너쇼에 원로 가수 아이유(79)씨가 공연할 예정이라는 내용이다. 기사 발행 연도는 2072년으로 돼 있다. 은마아파트는 어쩌다 조롱거리가 되었을까?
커뮤니티에 도는 ‘100년 후 강남’ 사진 ⓒ구글 이미지 검색(검색일:2023-06-28)
은마아파트가 그토록 원하는 재건축의 정의를 보자. 도시정비법 제2조에 따르면 “정비 기반 시설은 양호하나 노후· 불량 건축물에 해당하는 공동 주택이 밀집한 지역에서 주거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사업”이다. 쉽게 말해 ‘오래된 아파트를 철거하고 새 아파트를 짓는 것’이다. 은마아파트엔 지하 주차장이 없다. 온라인에서 아파트 방문 시의 주차 팁이 돌아다닐 정도다. 엘리베이터 수도 세대에 비해 지나치게 적다. 재건축이 확정되면 해결된다는 소유자들의 믿음으로 2021년까지 지하실에 2300톤의 쓰레기가 쌓여있을 정도로 생활 환경이 열악하다. 40년 넘은 구축 舊築아파트를 부수고, 편의 시설이 완비된 살기 좋은 아파트를 새로 짓는다면 아파트의 재산 가치도 높아지고 거주 편의성도 개선된다. 재건축은 은마아파트를 포함해 오래된 아파트 소유자들의 염원이다.

물론 레고 블록과 달리 사람이 사는 아파트를 철거하고 새로 짓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떻게 설계하고 누가 지을 것인지, 그 과정에서 필요한 돈은 어떻게 마련하고 낼 것인지에 대한 과제가 산적해 있다. 기본적으로 재건축은 헌 아파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조합을 구성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조합원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아파트(땅)를 내놓으면 그 땅에 건설 회사가 새로운 아파트를 짓는 방식이다. 공사 기간 동안 조합원들은 은행에서 이주비 대출을 받아 3~4년 정도 다른 집에서 지낸다. 공사가 끝나면 꿈에 그리던 새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다.

새로운 건물을 짓는데 필요한 건설 비용과 부대 비용은 새로운 아파트와 상가를 지어 분양하는 매출로 충당한다. 당연히 새로 만들어서 팔 수 있는 세대수가 많을수록 유리할 것이다. 여기서 알아야 하는 게 용적률이다. 건물 각층 면적(바닥 면적)의 합이 땅 면적의 몇 배에 해당하는지 그 비율을 의미한다. 즉, 현재의 용적률이 낮은 단지(땅은 넓고 세대수는 적은 단지)일수록 재건축 사업성이 좋다. 만약 신규 분양(일반 분양) 매출이 부족하다면 기존 조합원들에게 추가 분담금을 거둬 부족한 공사비를 충당해야 한다. 반대로 신규 분양 매출액이 공사 비용보다 많으면 조합원에게 잔여 수익금을 분배하게 된다. 정비 사업이 모두 끝난 뒤 조합이 해산·청산될 때, 매출에서 비용을 뺀 사업 수지는 0원으로 맞추는 게 조합 사업의 핵심이다.

은마아파트가 더 높은 건물을 세우려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건물 가치가 높아지는 것은 물론, 더 많은 세대에 새로운 층을 분양해 공사비를 충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높은 층수에 따른 조망권 프리미엄도 충분히 노려볼 수 있다. 이처럼 재건축은 민간의 이해관계가 직결된 사업이며 공공이 이를 수긍하는지가 핵심인 전장이다. 재건축과 재개발은 전체적으로 비슷하면서도 다른데, 재개발이 하향식이라면 재건축은 상향식이라는 점이다. 도시 기반 시설이 전반적으로 열악할 때 공공이 재개발 구역을 지정하고 사업을 진행하는 것과 달리 재건축은 사업을 요구하는 민간 측에서 주거 환경이 노후하다는 것을 주장해야 한다. 여기서 떠오르는 것이 바로 인허가다.

 

도장은 곧 권력이다


앞서 농담조로 소개했지만 당사자들에겐 꽤 심각한 얘기인 것이, 은마아파트는 주요 재건축의 문턱을 제대로 넘어가지도 못했다. 인허가의 초기 단계에서만 이미 수십 년을 소비했기 때문이다. 재건축은 인허가를 쟁취하기 위한 토지 소유자(조합)와 인허가권을 쥔 지자체 사이의 지난한 참호전이다. 한 단계 한 단계 절차를 밟아나가서 사업을 완성해야 하는 아파트 소유자들은 국토교통부와 서울시, 강남구의 강고한 행정권 앞에서 번번이 인허가를 통과하지 못하며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그 시간 동안 내분만 수차례 발생해 재건축의 추진 동력을 잃었다는 내외부적 평가도 나온다.

2022년 10월, 은마아파트 재건축 건은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 심의를 통과해 드디어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게 됐다. 장기간 재건축을 추진하려는 소유주와 재건축을 최대한 미루고자 하던 정부·지자체 사이의 전선이 드디어 다음 단계로 넘어간 것이다. 전장이 변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기에 앞서 은마아파트 재건축을 장기간 지연시킨 인허가를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 인허가에 숨은 미묘한 정치적 속성을 파악하면 은마아파트가 왜 인허가 단계에서 발목을 잡혔는지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건축과 부동산 개발에서 인허가는 사업의 진행 수준을 판단하는 기준이다. 어떤 건물도 허가 없이 지어질 수 없으며, 조합이 설립되거나 사업 계획이 승인될 수 없다. 도시 개발과 건축의 모든 업무는 지자체의 관인이 찍힌 허가증이나 고시문이 필요하다. 누구든 어디든 돈이 많든 적든 상관없이 도장 찍힌 고시문 한 장을 위해 서로 다른 부서의 여러 공무원과 공직자들을 쫓아다녀야 한다. 이 과정에서 적게는 수천만 원, 많게는 수억 원에 달하는 설계비와 용역비를 지출하게 된다. 도장의 가격은 저렴하지 않다.

인허가권은 행정 기관의 칼이자 방패다. 인허가권을 무기로 조합이나 사업 시행자에게 요구 사항을 전달할 수도 있고 방패로 삼아 다양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인허가에는 불확실함에 대한 절차적 보완이나 공익 보호를 위한 과정이 당연히 포함되지만, 그 외에도 여론과 민원 대응 등 많은 외적 변수가 인허가에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서 신축 사업장의 인근 주민들이 소음 공해와 재해 위험, 일조권 침해 등에 대해 다수의 민원을 넣고 시위한다면, 지자체는 인허가권을 무기로 공사를 중지시키거나 현장을 불시 점검할 수 있고 심지어는 사용 승인을 미룰 수 있다. 수천 세대의 주민들이 힘을 모아, 구청장을 향해 ‘다음 선거 때 심판하겠다’라고 탄원서를 넣는다면, 아무리 법·제도적으로 문제없는 사업이라 해도 여론의 영향을 받는다.

여기엔 구조적 문제점이 한몫한다. 도시 계획이란 게 애초에 광범위한 시간적·공간적 범위를 다루다 보니 인허가가 담당자의 재량에 의해 다뤄지는 경우도 왕왕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일이나 민원이 법제화될 수는 없고, 당장에 인허가가 필요한 사업장은 많다. 그렇기에 특별한 사례나 법의 사각지대에 해당하는 부분은 인허가권자(혹은 실무 책임자)의 재량에 맡겨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오세훈 시장은 2023년 서울시의 건축 층고 제한을 풀며 “구체적인 층수는 개별 정비 계획에 대한 위원회 심의에서 지역 여건을 고려해 결정한다”라고 덧붙였다. 이 말은 곧 개별 사업을 심의하는 데 있어, 정해진 규정이 아닌 위원회 심의에 따라 인허가를 진행하겠다는 의미다. 그렇기에 위원회의 판단과 기준이 다른 무엇보다 훨씬 중요해졌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정비 사업의 절차에서 과연 몇 개의 인허가가 단계가 존재할까?

정비 사업의 절차
① 정비 기본 계획 수립
② 건축물 안전 진단
③ 정비구역 지정
④ 추진 위원회 구성
⑤ 조합설립인가
⑥ 사업시행인가
⑦ 관리처분인가
⑧ 철거 및 착공
⑨ 준공 및 입주
⑩ 조합 청산

절차를 보면 우리가 상상하듯 ‘부수고 짓는’ 물리적 재건축은 사실상 후반부의 과정임을 알 수 있다. 상술한 것을 종합하자면 인허가의 벽은 매우 공고하고 절차 외의 변수가 많으며 담당자의 재량에 좌우되는 경향이 있다. 은마아파트의 재건축은 위 절차와 똑같은 흐름으로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큰 틀에서는 유사하다. 이제 은마아파트 재건축의 중요한 변곡점이 된 사건들을 시간 순서로 살펴보자.

 

진격의 추진위 vs 거인 정부


1996년 은마아파트의 소유자들은 재건축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준공 이후 17년, 재건축의 꿈이 한데 모인 것이다. 1988년부터 재건축 사업을 꿈꿔오던 소유자들은 도시 계획이라는 거대하고 복잡한 게임에 참전하고자 힘과 뜻을 모은다. 이들이 상대하거나 협력해야 할 플레이어가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대상이기 때문이다. 공공성을 지닌 정부와 지자체, 자본이 막강한 민간 기업, 건축·설계나 도시 계획의 전문가들에 비해 소유자 개개인이 가지는 힘과 전문성은 보잘것없다. 도시 계획의 플레이어로 우뚝 서려면 대표성을 가진 집단, 즉 조합을 구성할 필요가 있었다.

조합의 탄생

물론 조합을 만드는 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정식 조합을 설립하려면 아파트 소유자의 75퍼센트, 소유 면적의 50퍼센트에 해당하는 이들이 동의해야 한다. 이에 재건축에 뜻이 있던 개인들은 조합을 만들기 위한 사전 단계, ‘조합 추진 위원회(추진위)’를 설립한다. 추진위는 정식 조합과 달리 아파트 소유자의 과반수만 동의해도 만들 수 있다. 단어 그대로 재건축 사업 진행을 위한 조합을 만드는 것이 추진위의 목적이다. 그렇다고 추진위가 아무런 힘도 없는 건 아니다. 공통의 목적을 위시한 채 내는 하나의 목소리는 실제 조합의 지위에 버금가는 힘이 있다. 2001년 구성된 은마아파트 재건축 조합 추진위는 2002년에 최초 설립된다.

2002년 당시 추진위는 주민 총회를 거쳐 시공사까지 선정을 마친다. 시공 사업단으로 삼성물산 51퍼센트, LG건설(현 GS건설) 49퍼센트로 컨소시엄이 구성되기도 했다. 2003년 12월, 추진위는 주거정비법에 의해 서울시로부터 조합 추진 위원회 정식 인가를 획득한다. 당시엔 지금과 달리 안전 진단을 통과하기 전에도 위원회 설립이 가능해 추진위를 인가받는 것은 수월했다. 은마아파트 재건축의 첫 도약은 순조로운 듯 보였다.

1차전 ; 안전 진단

은마아파트 참호전의 진짜 시작은 ‘건축물 안전 진단’이었다. 쉽게 말해 재건축의 명분을 찾는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 아무리 사유 재산이라도 무작정 자기 마음대로 재건축하거나 용도를 바꿀 수 없다. 건물이 오래돼서 무너질 위험이 있다거나, 생활에 너무나 불편하다거나 하는 명확한 이유를 제시해야 한다. 이를 증명하기 위한 단계가 바로 건축물 안전 진단이다. 재건축 가능 여부를 가려주는 핵심 단계다. 은마아파트 재건축 추진위가 내건 명분은 ‘극심한 주차 문제’, ‘노후화된 배관과 주거 시설물’ 등이었다.

주차 문제가 얼마나 대수냐고 할 수 있지만, 노후 아파트 단지에서 주차 문제는 주민들 사이에 멱살을 잡을 만큼 심각한 사안이다. 준공이 이뤄진 1979년 당시엔 국내에 자동차 보급이 많지 않았지만 1980년대부터 대대적 보급이 이뤄지며 엄청난 주차난이 발생하게 된다. 주차장 확장 이전 은마아파트의 세대당 주차 가능 대수는 0.7대였다.

순항하는 줄 알았던 재건축에서 안전 진단은 통곡의 벽이었다. 추진위는 2002년부터 안전 진단을 요청해 왔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그 과정에서 플레이어들의 이해관계는 다양한 형태로 충돌했다. 먼저 재건축이 쉽지 않겠다고 판단해 리모델링을 주장하는 소유자와 원래대로 재건축을 원하는 소유자가 부딪혀 내분이 생겼다. 거기에 강남 대치동의 대표 재건축 단지에 대한 언론과 정치인들의 우려 섞인 목소리도 가세했다. 재건축이라는 호재를 타고 집값 상승이 유도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네 차례의 도전 끝에 2010년 3월 은마아파트는 안전 진단에서 D등급, 조건부 통과를 받아낸다. 지난한 과정이었지만 준공 30년 차임을 고려하면 그럭저럭 쾌거였다.

은마아파트가 안전 진단 통과를 수차례 낙마한 이유를 구조적으로 살펴보자. 안전 진단은 재건축 단지에 대한 사업 정당성과 필요성을 평가하는 단계다. 단순히 생각하면 건축물이 충분히 노후화하지 않아서겠지만 그 속엔 공공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있다. 안전 진단에는 인허가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 판단’이 작용한다. 인허가 과정에는 생각지 못한, 혹은 법제화되지 않은 다양한 변수가 나타날 수 있는데, 이는 공공을 보수적으로 만든다. 게다가 민간 주도의 상향식 사업이다 보니 공공 입장에선 이익보다 리스크에 더 민감해지기 쉽다.

통일된 공공의 결정 뒤에 미묘한 정치가 개입되기도 한다. 민간 진영이 그랬듯 공공 진영도 안전 진단 단계에서 반목하는 경우가 생긴다. 표면적으로 사업의 허가권자는 지자체장이며 안전 진단을 입안하고 인허가를 내주는 곳 역시 지자체다. 하지만 안전 진단의 평가 요소들을 결정하는 것은 국토교통부, 즉 중앙 정부다. 안전 진단 절차와 기준을 정부에서 강화하면 은마아파트뿐만 아니라 비슷한 조건에 있는 다른 재건축 대상 아파트들도 모두 영향을 받기에 중앙 정부는 신중할 수밖에 없다.

허가를 내주는 곳과 기준을 만드는 곳이 다르다 보니 지자체와 중앙 정부의 당파적 이해관계가 다르거나 소속된 정당이 다를 경우, 미묘한 긴장이 발생하기도 한다. 어떤 재건축 사례가 있을 때 안전 진단 기준을 살펴보면 어느 정당이 재건축에 긍정적이며 어느 정당이 부정적인지를 단편적으로 알 수 있다.

칼날의 향방

2023년에 들어 윤석열 정부 아래 재건축 안전 진단 기준이 재건축에 유리한 방향으로 변경됐다. 시계를 2년 앞으로 돌려 보자. 허가권자인 2021년 오세훈 서울시장은 국토교통부에 재건축 규제 완화를 위해 구조 안전성 항목의 축소와 주거 환경 및 노후도 항목의 비중 상승을 요청한 바 있다. 그 후 2022년 지금의 윤석열 정부가 출범함에 따라 같은 해 12월 <재건축 안전 진단 합리화 방안>이 발표됐고 2023년 1월 5일부터 변경된 기준이 적용됐다. 정파적 이해관계가 합치하면 이처럼 기준을 만드는 중앙 정부와 기준을 적용하는 지자체의 티키타카가 이뤄진다.

그렇다면 오세훈 서울시장이 요청하고 윤석열 정부가 수락한 내용은 무엇일까? 다음 표를 보면 안전 진단 기준의 주요 내용을 알 수 있다. 항목별 점수에서 엿볼 수 있는 각 정부의 생각이나 관점이 특히 흥미롭다.
안전 진단의 평가 항목은 크게 네 가지로 정부의 부동산 정책 변화에 따라 비중이 변해왔다. 물론, 기준이 꼭 양당에 따라 이분화되는 건 아니다. 대표적으로 지난 20대 대선에서 두 양강 후보의 정비 사업 공약을 보면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준공 30년 이상 재건축 대상물에 대한 안전 진단 면제’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도 ‘구조 안정성 비중 하향’을 내걸었다. 안전 진단의 기준을 낮춘다는 점에서 두 후보의 공약은 결이 같다. 층수 제한을 완화한다는 방침도 함께 했다. 다시 말해 모든 사항이 당리당략에 따라 정해진다기보다는 당시 부동산 상황에 대한 고려도 함께 이뤄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위 항목 중 첫 번째, 구조 안전성은 문자 그대로 건물 자체의 안전을 판단하는 기준이다. 건물이 정말로 무너질 위험성이 없는지 검사하는 것으로, 해당 비율이 높을수록 안전 진단 문턱이 높아진다. 꽤 낡은 건물이라 해도 물리적으로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 흔하게 발생하는 문제는 마감재가 풍화되거나 상하수도와 전기·통신 배선이 노후화되는 경우, 주차장 부족 등이다. 건물이 기울어진다거나 지반 침하와 같은 구조적인 문제는 외부적 요인이 있지 않고서야 30~40년 사이 자연스레 일어나긴 쉽지 않다.

그렇기에 재건축을 바라는 주민들이나 건설 회사, 민간 단체 등은 정부에 구조 안전성 비율을 낮추길 요구해 왔다. 재건축을 활성화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건설사를 비롯한 설계·구조·정비·신탁 등 재건축에 이해관계가 걸린 많은 회사는 이번 안전 진단 기준 변경을 통해 먹거리가 많아지고 부동산 경기가 회복될 것을 주민들만큼이나 기대하고 있다. 은마아파트와 같이 안전 진단에 막혀 재건축이 지지부진했던 아파트는 이번 기준 변경으로 인한 수혜가 크다.

그렇다면 은마아파트가 통과했다는 D등급의 조건부 통과란 뭘까? 안전 진단은 위 항목에 따라 건축물을 심사한 후 A~E등급으로 나누는데 E등급은 매우 위험한 상태의 건축물로 바로 재건축이 가능하고, A~C등급은 유지·보수만 가능하다. 은마아파트가 받은 D등급이 바로 조건부 재건축이다. 안전 진단에서 D등급을 받으면 이후 적정성 검토를 거쳐 그 결과에 따라 유지·보수인지 재건축인지 여부가 최종 결정된다. 윤석열 정부의 <재건축 안전 진단 합리화 방안>은 평가 항목 배점 기준을 표와 같이 개선하고 ‘조건부 재건축’ 범위를 축소, 적정성 검토를 개선하는 것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즉, 조건부 재건축보다 바로 재건축으로 직행할 수 있는 범위를 확장하고 적정성 검토 또한 중복 검사임을 고려해 완화하겠다는 것이다.

2차전 ; 정비 구역 지정

2010년 안전 진단에서 상처 가득한 승리를 얻어낸 은마아파트의 다음 전장은 정비 구역 지정이었다. 재건축할 명분은 인정받았으니 이제 땅과 건물을 어떻게 재건축할지 계획서를 내고 허가를 받아내는 절차다. 재건축 단지의 정확한 면적을 측량하고, 재건축이 일어난 이후 교통·환경·주거·교육 등에 어떤 영향이 있을지 종합적으로 평가해 구체적인 도시 계획을 세우는 단계다. 정비 계획을 통해 해당 주거 단지에 대한 재건축이 적합함이 증명되면 비로소 정비 구역 지정이 이뤄지며, 전체 세대수와 용적률, 건폐율, 층수, 임대 주택의 비율 등 주요 사항이 고시문을 통해 공표된다.

안전 진단을 통과한 은마아파트는 대대적으로 재건축의 청사진을 그리기 시작한다. 추진위 측이 계획안을 작성하면 강남구청에서 이를 확인하고 최종적으로 서울시의 허가를 받는 절차다. 그리고 여기서 은마아파트는 또 다른 강적을 만나게 된다. 속칭 ‘도계위’로 불리는 ‘도시계획위원회’다. 이들은 앞서 언급한 인허가 그 자체를 상징한다. 제3영역인 위원회의 진가가 여기서 나온다. 공공 진영의 무기인 인허가의 근거를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은마아파트 참호전에서 제3영역이 새로이 참전하는 순간이다.

물론 도시계획위원회는 공공의 칼이 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조직은 아니다. 설립 근거와 취지를 보면 이들은 명백한 독립 기관이다.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은 중앙 정부와 모든 지자체가 각각 시·도 단위의 도시계획위원회를 운영하도록 규정한다. 위원회는 관련 분야의 교수들과 상급 공무원, 엔지니어링 회사, 변호사, 지자체를 감시하는 시·구의원 등 약 30명 규모로 구성되어 있으며 매월 1회씩 정기 회의를 개최한다. 위원들의 임기는 2년으로, 연임이 가능하다. 다양한 분야에 대한 전문 지식과 풍부한 경험, 다양한 의견 등을 반영하여 도시 계획의 적합성과 공정성을 판단하기 위해 전문가 집단을 심의와 자문에 활용하자는 취지다.

은마아파트는 수차례 도계위에 안건을 상정했지만 오래도록 통과되지 못하고 패전을 거듭한다. 복잡한 정치 공학이 작용했다. 위원회는 지자체 공무원 조직과 별도로 독립적으로 운영되어야 하지만, 실질적으론 지자체장과 여론, 내외부적 이슈에 얽매여 있다. 위원을 선임하는 건 지자체장이며, 위원회에서 다룰 안건을 결정하는 것도, 위원장과 간사를 맡는 것도 해당 위원회에 포함된 고위 공무원이기 때문이다.

특히 도계위의 존재는 공공의 부서장이나 지자체장의 책임 회피에 좋은 구실이 된다. 특정 사업에 대한 진행 여부를 선출직 공무원(지자체장)이 단독으로 결정하는 것은 정치적 무리수가 될 수 있다. 절차적으로 정당하거나 최선의 결정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결정권자가 오롯이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중앙 정부와 지자체는 위원회 임명권과 운영권을 손에 쥔 채, 위원회에게 도시 계획을 심의하여 계획의 가부를 결정하게끔 한다. 임명권과 운영권은 이처럼 인허가를 칼과 방패로 담금질하는 화로다.

결국 은마아파트의 재건축 계획안은 2022년 10월 19일,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를 통과한다. 가결된 계획안에 따르면 은마아파트는 기존의 14층·28동·4424 가구에서 35층·33동·5778가구로 다시 태어난다. 재건축의 공익성을 위하여 전체 가구 중 678가구가 공공 주택으로 구성되며, 자동차 혼용 도로와 근린공원, 문화 공원도 함께 조성된다. 주민 공고·공람 절차를 거친 이후, 2023년 2월 16일 서울시는 드디어 은마아파트를 재건축 정비 구역으로 지정하고 계획과 도면 등을 확정 고시한다.

오랜 전투 끝에 일궈낸 승리인 만큼 민간 진영이 받은 내상은 만만치 않았다. 특히 도계위의 벽 앞에 기나긴 암투가 벌어져 추진위는 내분을 거듭했다. 안전 진단이 재건축의 필요성을 입증하는 것이라면 정비 구역 지정 단계는 구체적으로 새 아파트를 어떻게 그리느냐의 문제다. 본격적으로 추진위 내 갈등과 정치가 벌어지기 좋은 단계이며, 실제로 기존 추진위를 대체하려는 대항군이 조직되기도 했다. 주민과 소유자, 추진위와 대항 세력의 동상이몽은 참호전을 더욱 고되고 더디게 만들었다. 가장 대표적인 갈등이 바로 ‘층수 갈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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