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4 FW Micro Trend
2화

몸과 머리로 쓰는 극복의 서사, 볼더링

ⓒ일러스트: 권순문/북저널리즘

 

볼더링은 몸으로 푸는 문제다


클라이밍은 소수의 취미였습니다. 체험할 곳도 적고 위험했기 때문입니다. 소셜 미디어 탄생 이후 생활 피트니스가 수면 위로 떠 올랐지만 클라이밍을 즐기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헬스와 바디 프로필, 홈 트레이닝 일색이었죠. 16:9의 화면비가 대세로 자리 잡을 즈음 엄지로 쓸어올린 화면 속에는 실내에서 알록달록한 암벽을 타는 사람들이 숱하게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볼더링의 시대가 온 겁니다.

볼더(Boulder)는 바위를 뜻합니다. 특히 오랫동안 풍화나 침식을 거쳐 표면이 반들반들해진 바위를 말하죠. 벽에 달린 앙증맞은 설치물을 홀더(holder)라고 하는데 잡기 쉽게 생긴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비정형적인 바위의 모습처럼 제각각이고 심지어 어떤 것은 미끄럽습니다. 볼더링의 묘미죠. 취미 운동으로만 생각했다면 오산입니다. 무려 올림픽 시범 종목이니까요. 스포츠 클라이밍은 규격화된 코스를 빠르게 오르는 ‘스피드’, 제한 시간 내 누가 더 높이 오르나를 겨루는 ‘리드’, 그리고 볼더링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주된 차이는 높이와 로프의 유무입니다. 앞선 두 종목은 보통 15미터의 높이에서 진행되고 로프를 달지만 볼더링은 4~5미터 고도에서 맨몸으로 진행합니다.

볼더링이 많은 이의 취미가 될 수 있던 건 단순히 쉬워서가 아닙니다. 볼더링 코스는 대회 직전까지 결코 공개되지 않습니다. 볼더링은 본질적으로 ‘문제를 푸는’ 종목이기 때문이죠. 형형색색의 홀더에는 시작점과 결승점이 정해져 있고 같은 색 홀더만을 사용해 등반해야 합니다. 어떤 홀더를 어떻게 잡고 어떻게 밟아 올라가야 할지 치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흔히 말하는 ‘피지컬(physical)’과 ‘뇌지컬’을 동시에 요구하는 운동이죠. 중력을 거슬러 높은 벽을 오른다는 도전과 극복의 서사, 몸과 머리를 동시에 쓰는 재미, 자극되는 소셜 미디어 포스팅 욕구, 완등의 성취감은 볼더링을 확고한 마이크로 트렌드로 만들었습니다. 갓생을 외치는 세대가 몸으로 푸는 문제이자 취미가 된 겁니다.

LOOKS OF, Bouldering


들어서자마자 회색 벽의 높이에 놀라게 됩니다. 가까이 다가설수록 5미터가 꽤 높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처음 클라이밍 짐을 방문하면 입문 강의가 필수입니다. 룰과 안전 수칙을 꼭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발 밑엔 든든한 매트가 있지만 떨어질 때 골절상을 입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괜히 익스트림 스포츠가 아닌 겁니다. 주로 쓰는 손에 간단히 밴디지를 감고 가장 쉬운 난이도의 문제부터 차근차근 풀어봅니다. 제가 방문한 센터에는 난이도가 일곱 가지 무지개 색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홀더의 색과 무관하게 홀더 옆에 붙은 시작점과 결승점의 테이프 색으로 난이도가 정해집니다. 입문자용은 빨간색이죠. 미끄러지지 않으려 손에 바른 초크가 홀더들에 숱하게 묻어 마치 실내 클라이밍 짐에 눈이 내린 것 같습니다.
 

오르기 전 가장 중요한 것은 ‘루트 파인딩(route finding)’입니다.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홀드가 어디에 있는지, 양손과 양발을 어디에 두면서 올라갈 것인지 미리 생각해 둬야 합니다. 막상 등반을 시작하면 시야 확보가 어렵고 매달린 채로 고민하다 보면 전완근의 힘이 금세 빠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신체 조건에 따라 더 다양한 홀드를 사용할 수도, 몇 홀드는 건너 뛸 수도 있습니다. 수학 문제처럼 볼더링도 문제를 푸는 방법이 다양하니까요. 근력과 운동 신경에 더해 전략을 세우는 게 볼더링의 백미입니다.
 

차근차근 시작 홀드를 잡고 불편하리만치 조여 오는 암벽 등반화를 견디며 땅에서 발을 떼면 시작입니다. 등반 자세는 팔을 쭉 뻗고 발을 넓게 벌려 앉는 자세가 유리합니다. 다음 홀드로 올라갈 때도 상체 힘이 아니라 하체 힘을 써야 등반이 쉽습니다. 턱걸이는 한 번도 어렵지만 앉았다 일어서기는 열 번도 쉬우니까요. 다음 홀드로 진행할 때마다 쾌감이 느껴집니다. 코스를 하나하나 격파해 갈수록 완등의 기쁨만큼 효율적으로 오르고픈 도전 욕구가 자극됩니다. 시작부터 도저히 잡을 수 없을 것 같은 홀더를 양손으로 꼬집듯 움켜쥐거나 손이 닿지 않는 다음 홀더를 위해 하체의 반동을 이용해 살짝 점프하기도 합니다. 떨어지고 매달리고 고민하고를 반복하다 보면 두세 시간은 훌쩍 지납니다. 손바닥엔 보송하게 초크가 가득하지만 이마엔 땀이 나기 시작합니다.
 

벽 앞의 회색 매트에는 등반자만 올라갈 수 있습니다. 바로 옆의 암벽에 등반자가 있다면 떨어질 때를 고려해 매트 위에 오르지 않아야 합니다. 매트 앞에는 완등 기록을 위한 스마트폰용 삼각대와 대기자들이 즐비합니다. 순서를 기다리며 선등자의 도전을 지켜보다 보면 자연스레 응원을 하게 됩니다. 자신과 벽의 일대일 싸움이지만 혼자가 아닌 셈이죠. 간혹 뒤에서 들려오는 코칭, 응원 소리, 수많은 시선 때문에 처음 도전하는 어려운 코스도 두렵지 않습니다. 수많은 도전 끝에 완등하는 걸 본 사람들은 뒤에서 박수갈채를 보냅니다. 인스타그래머블한 영상과 사진은 덤이죠.

IN FITNESS

시켜서 한다! 오늘부터 운동뚱 42회 ⓒ맛있는녀석들
  • 머리와 몸을 동시에 써야 하는 운동으로 각광받는 또 다른 종목은 주짓수입니다. 유도에서 출발한 주짓수는 격투기지만 한편으로는 문제 풀이입니다. 타격보다는 상대를 제압하는 유술이 주가 되기 때문이죠. 볼더링 코스에 난이도별 등급이 있듯 주짓수도 벨트가 있습니다. 신체 조건에 따른 유불리는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기술 싸움이기에 낮은 벨트의 사람이 높은 벨트의 사람이 건 기술을 푸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기술을 하나씩 독파하며 강해지는 재미가 있죠. 벨트처럼 눈에 보이는 보상과 목표, 단계가 명확한 점도 도전 욕구를 자극합니다.
  • 자신의 체중을 콘트롤하고 수행 능력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스트리트 워크아웃(Street Workout)과도 연결됩니다. 흔히 말하는 맨몸 철봉 운동은 이 분야의 하나입니다. 매달릴 수 있는 곳만 있으면 어디든 자신의 운동 능력을 뽐낼 수 있습니다. 스트리트 워크아웃을 하는 이들은 “턱걸이 10개 할 줄 안다”는 말보다 “플란체 잡을 줄 안다”는 말에 더 열광합니다. 자세 별로 이름과 난이도가 있고 어려운 기술을 구사할 줄 안다면 그야말로 소셜 미디어 포스팅 ‘각’이 나오는 겁니다. 물론 대단한 근력을 필요로 하지만 퍼포먼스의 화려함은 이들이 연습에 매진하는 이유가 됩니다.

Bouldering, INSIDE


피트니스를 대표하는 키워드는 미관에서 수행 능력으로, 나아가 의미와 성취감으로 변해 왔습니다. 볼더링이 마이크로 트렌드로 자리 잡은 과정과 맞닿아 있죠. 생활 체육 저변이 약했던 시절 많은 이들은 미디어에 노출된 멋진 복근을 꿈꿨습니다. 소셜 미디어의 발달이 소위 몸 좋은 개인을 수면 위로 떠 오르게 하면서 ‘몸짱’의 조건은 높아졌습니다. 헬스, 바디 프로필 열풍이 불었죠. 한편 웰빙 트렌드가 확산한 이후로는 크로스핏, 필라테스와 같은 기능적인 운동이 성행하기 시작합니다. 보기 위한 몸, 전시하는 몸이 아닌 ‘피지컬’의 시대가 열린 겁니다. 이 과정은 중요한 전환입니다. 우승자 논란이 있었지만 2023년 1월에 방영한 넷플릭스 예능 〈피지컬 100〉은 이 흐름의 방증입니다. “가장 완벽한 신체 능력을 갖춘 최고의 ‘몸’을 찾는다”는 프로그램의 기획 취지는 우리가 무엇을 위해 운동하는지 되묻게 했습니다. 땀 흘려가며 오랜 시간 무거운 중량을 들고 그 결괏값으로서 보상받는 몸에 비해 수행 능력은 직접 운동하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비가시적인 영역입니다. 갓생을 추구하며 삶의 효율을 높이는 이들에게 ‘건강한 아름다움’은 매력적이었습니다. 
피지컬: 100 | 티저 예고편 ⓒ넷플릭스
여기에 성취감과 머리 쓰는 재미가 더해진 게 볼더링입니다. 근력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스포츠이자 문제를 하나씩 해결하며 결승점에 도달할 때의 성취감이 크기 때문입니다. 볼더링의 수행 능력은 정량화가 쉽고 측정이 간편합니다. 코스별로 난이도를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파워 리프팅에서 얼만큼의 무게를 들었냐를 기준 삼는 것과 같죠. 대부분의 운동은 구체적인 루틴과 목표를 설정하는 게 어렵고 보상은 뒤늦게 따라오는 반면 볼더링은 개인 목표 설정이 용이하고 성장을 쉽게 느낄 수 있으며 완등이라는 확실한 보상이 있습니다. 볼더링의 매력은 이렇게 운동이 가지는 대전제를 부수고 있습니다. 통상 헬스장에서 모든 기구를 다 써봤다고 해서 센터를 옮기는 경우는 없지만 볼더링에선 코스를 돌파하며 다른 센터로 원정을 다니는 이들도 있습니다. 취향을 기반으로 모이고 흩어지는 젊은 세대에게 커뮤니티가 형성되기 좋은 조건입니다. 달리기나 사이클, 등산, 서핑처럼 볼더링에도 모임이 많은 이유죠. 

모두가 복근에 목매던 시절과 비교하면 커다란 변화입니다. 볼더링을 사랑하는 이들은 외형보다는 내실, 몸뿐만 아니라 머리, 막연한 땀이 아닌 확실한 보상, 비교보다는 도전과 응원을 쫓는 이들입니다. 완벽이라는 결괏값에 매진하는 젊은 세대에겐 남의 기준이 아닌 오롯이 자신의 기준에 집중하며 소소하고 확실한 보상을 얻는 순간이 필요합니다. 각자의 해답은 다르겠지만 마땅한 취미를 찾지 못했다면 근처 클라이밍 짐에 방문해 새로운 도전을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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