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은 왜 노잼도시가 되었나
3화

사람들은 검색창 앞에서 가장 솔직해진다

소셜 미디어가 매긴 우리 도시 성적표


사람 사이의 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수단은 말이었다. 사람들은 얼굴을 맞대고 자신이 알아낸 정보와 경험한 느낌을 입말로 전했다. 지금은 텔레비전과 라디오, 인터넷 포털과 유튜브가 세계 경제 동향부터 우리 동네 교통 상황까지 전달하는 시대다. 이젠 스마트폰 없는 소통을 상상하기 어렵다. 의사소통을 위한 기술의 발달은 우리를 더 가깝게 만들었다. “관계를 통해 의미를 찾고자 하는 개인들이 일상이나 소식, 지식을 타인과 직접 공유하면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수단인 소셜 미디어”[1]는 현대 의사소통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우리나라 18세 이상 성인의 76퍼센트가 다양한 종류의 소셜 미디어를 사용한다.[2] 사람들은 카카오톡으로 회의 자료를 주고받고, 유튜브로 여름 휴가 때 갈 휴양지를 미리 가본다. 카페에선 맛집 검색을, 인스타그램으론 인플루언서의 삶을 엿본다. 내가 지금 무엇이 궁금한가에 따라 매체를 달리 선택해 지식을 습득하는 것도 일상이 됐다. 사진 중심의 직관적 게시물을 통해 지인의 근황을 알고 싶은 사람들은 주로 인스타그램을 이용하며, 대상에 대한 상세한 정보나 평은 블로그를 통해 얻는 것이 소셜 미디어 유저들의 특성[3]이다. 블로그는 매체의 특성상 물건이나 여행지에 대한 상세한 리뷰를 업로드할 수 있다. 사람들은 블로그의 현장성과 세밀함을 높이 산다.[4]
‘3000만 블로거’[5]의 주간 일기를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읽을 수 있는 우리는 원하는 언제든 자신의 지금 생각, 경험, 느낌을 공유할 수 있는 자유를 기술로부터 얻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근사한 콘텐츠를 생산해야 한다는 스트레스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종류의 스트레스다. 소셜 미디어 유저들은 누가 협박한 것도 아닌데, 오늘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릴 콘텐츠를 점심 메뉴를 고르듯 고민한다. 지난번 여행기의 반응이 좋았던 이후, 은근히 블로그 방문자 통계가 신경 쓰인다. 이젠 이웃들이 좋아할 만한 블로그 콘텐츠를 애써 기획하기도 한다. 더 많은 ‘좋아요’ 하트와 블로그 방문자 수의 증가는 자칫 허술해질 수 있는 사이버 인맥에 긴장감을 준다. 하트와 팔로워 수를 늘리고, 댓글 피드를 늘여 ‘인싸’가 되고 싶은 우리는 마치 1인 미디어 프로듀서처럼 오늘의 포스팅 업로드 시점을 고민하게 됐다.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이 동력인 소셜 미디어 유저들에게 여행과 방문은 화수분 같은 콘텐츠다. 작은 동네 카페부터 백두대간 종주까지, 방문지의 규모와 특성은 다양하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 장소까지 포함한다면 낯설고 새로운 흥미는 끊임없이 생산될 수 있다. 소셜 미디어에는 방문한 곳, 만난 사람과 먹은 음식, 나눈 대화와 경험한 일, 느낌과 기분을 일기처럼 시간 순서대로 술술 기록할 수도 있다. 새로운 장소가 주는 낯섦과 비일상성, 음식과 쇼핑, 특별한 경험, 다음 방문자를 위한 꿀팁 등 세분화된 지식 모두가 콘텐츠인 셈이다. 그래서 블로그와 온라인 맘카페, 각종 동호회 온라인 카페에는 장소 방문 (여행) 후기가 매일 올라오고, 사람들은 그를 통해 장소를 간접 체험한다.

간접 체험이라고 표현했지만, 소셜 미디어의 영향력은 상당하다. 아직은 텔레비전이 개인 의견에 미치는 영향력이 가장 큰 것으로 조사됐지만, 인터넷 포털과 소셜 미디어의 영향력이 그 뒤를 바짝 쫓고 있다. 다른 사람이 소셜 미디어에 써 놓은 여행기나 물건 사용 후기가 단순 읽는 재미에 그치지 않는단 뜻이다.
소셜 미디어 유저들은 다른 사람이 먼저 다녀온 경험을 보면서 그 장소가 가볍게 뒷산 오르듯 방문할 만한 곳인지, 기분 전환이 될 만큼 탁 트인 느낌을 주는지, 어린아이를 데리고 갈만한 곳인지, 어떤 음식을 먹을 수 있는지 등을 탐색한다.[6] 내가 가지 않았어도 누군가의 여행 얘기를 듣는 것처럼, 우린 그 장소에 대한 인상과 생각 그리고 이미지를 상상하게 된다. 소셜 미디어는 새로운 방문객을 유인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7] 어딘가로 떠나기 전에 검색창을 열고 그 장소를 검색하는 게 당연한 일이 됐다. 이젠 여행을 계획하는 단계에서, 달리 말하면 장소 탐색의 단계에서, 소셜 미디어 활용은 필수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장소 방문 후기나 감상을 남기는 일이 일상화된 이후 지방자치단체들도 같이 바빠졌다. 지역을 방문한 흔적이 온라인에 남기 시작하면서 지역별 관광 통계는 지자체가 눈여겨보는 통계가 됐다. ‘한국관광 데이터랩’[8]은 지역별 관광 현황을 방문자 수와 특성뿐 아니라 소셜 미디어 언급량과 트렌드도 분석해 제시한다. 우리 지역의 인기 관광지가 어딘지, 맛집이 어딘지까지 신용카드 데이터와 내비게이션 데이터를 분석해 알려 준다. 이러한 지역 장소 방문 정보의 세밀함과 엄밀함 그리고 방대함은 지역 마케팅 전략을 세우는 데 유용하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들은 우리 지역 장소의 매력이 어떻게 다른지, 솔직하게 말하자면, 우리 지역이 얼마나 인기 있는지를 비교할 수 있게 됐다. 관광 현황 통계는 부문별 점수와 등수가 매겨진 ‘장소 매력 성적표’다.

우리 지역이 몇 등인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방문한 사람들이 어떻게 알고 왔는지, 어떤 체험을 했고 무엇을 맛있게 먹었는지, 다음에 또 방문할 생각이 있는지 파헤쳐야 한다. 지역에 방문한다는 것은 관광객 유치를 의미하며, 이는 지역 내 소비 증가와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소셜 미디어와 인터넷 포털을 활용한 장소 마케팅이 뜨거워졌다. 더 근사하고 눈길을 잡아끄는 콘텐츠로 방문객 수를 늘려야 한다.

사진이, 기억에 남을 이미지가 중요해졌다. 매일 콘텐츠를 고민하는 개인 소셜 미디어 유저들도 마찬가지다. ‘좋아요’와 팔로워 증가를 견인하는 멋진 콘텐츠는 사진에서 출발한다. 지역의 유명 장소들, 지역 홍보물과 관광 홈페이지의 지역은 일정한 방향의 아름다움을 지닌 채, 특정한 프레임에 담겨 인터넷 포털과 소셜 미디어에 전시된다. 이런 이유 때문일까, 도시와 장소, 지역을 알리는 지방자치단체 홈페이지와 사람들의 인스타그램, 블로그에 올린 사진들은 꽤 닮았다.

 

‘좋아요’가 쌓이면 장소를 잃는다


인스타그램과 블로그에서 더 많은 ‘좋아요’를 얻기 위해 우린 ‘모두 좋아할 법한’ 장소를 찾고, ‘누구나 공감할 것 같은’ 예쁜 이미지를 만든다. 적당한 품질과 납득할 만한 가격을 갖춘 기성품처럼, 내가 가본 장소들은 소셜 미디어란 판매대 위에서 비슷한 포즈로 진열돼 있다. 사진을 찍을 땐 뭔가 특별한 느낌이 있었던 것 같은데, 왜 내가 소셜 미디어에서 자랑한 장소들은 그저 그런 공간처럼 보일까.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공간을 “어떤 물질이나 물체가 존재할 수 있거나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자리”로 정의[9]한다. 존재의 위치와 사건의 발생을 가정한다는 면에서 공간은 가능성을 지닌 빈자리 혹은 여지(room) 라 할 수 있다. 그 가능성은 움직임이다. 축구 선수가 ‘공을 패스하면서 공간을 넓혀 간다’고 말하듯이, 공간은 이동하면서, 움직임에 의해 새롭게 생기고 확장된다.

공간이 움직임(movement)이라면, 장소는 정지(pause)다. 움직임 중에 정지가 일어나면 그곳은 장소가 될 수 있다.[10] 머물지 않고 스쳐 지나가면 장소가 되지 않는다. 스쳐 지나간 공간은 그저 점과 점의 연결, 거리(distance)일 뿐 ‘장소’로 인식되지 않는다. 움직임이 멈췄다는 면에서 이미 장소는 시간을 움켜쥔다. 멈춘 자리에서 보낸 시간이 그 공간의 목적이나 특징, 의미나 가치를 만들어 낸다. 흔히 ‘장소’를 ‘의미 혹은 가치가 담긴 공간’으로 정의하는데, 의미와 가치를 형성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면에서, 이 말 역시 시간이 장소를 만든다는 뜻이라 하겠다.

시간은 장소를 정의하는 데 중요하다. 공간에서 내가 가만히 있더라도, 공간과 나 사이에는 상호 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공간의 복합적인 사회문화적 의미를 탐구해 온 인본주의 지리학은 장소를 물리적 환경과 인간과의 상호 작용으로 이해한다.[11]

이러한 장소의 본질을 탐구해 온 에드워드 렐프 는 공간에서의 활동이 만들어 낸 상징과 감정을 장소 형성의 중요한 요소로 여긴다. 장소가 물리적 환경 혹은 어떤 위치(location) 이상의 의미를 가지려면 다른 장소와 구분되는 어떤 특징이 인지돼야 한다. 그 특징은 물리적 형태나 외관이기도 하겠지만, 거기서 일어나는 일, 즉 사람들의 활동과 활동이 지닌 상징과 감정을 통해 구성된다.[12] 자연, 건물, 물건을 비롯한 물리적 환경, 사람, 사건과 정서까지 말이다. 이렇게 장소는 이런 요소들의 복합적 상호 작용의 결과물이다.

집 앞 공원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흙과 풀 냄새, 벤치와 그네의 촉감과 벗겨진 페인트칠, 오가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소리 등 다양한 자극이 다가온다. 공간의 물리적 특성(땅, 사물, 건물 등이 가진 물질적 특성이나 기운)은 나의 오감을 통해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고 느껴진다. 오감을 동원해 감각한 공간은 나에게 어떤 감정을 남긴다. 렐프는 이 과정을 애착이 생기는 과정이라 표현했는데, 공간에서 생성된 감정은 친근감이나 소속감 또는 좋아하는 마음이나 즐거움 등으로 다양하다. 물론 슬픔과 공포, 분노도 있다.

공간에서의 경험은 감정을 만들고 그것은 공간의 특성과 개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며 그곳을 떠나더라도 머릿속에서 꾸준히 재현되는 기억이 된다. 기억에 남은 ‘장소가 된 공간’은 의미가 있다. ‘여긴 내게 의미 있는 곳이야’라고 말할 때, ‘의미’는 기억과 감정의 복합체다. 공간이 지닌 물질과 물질의 특성, 그 안의 사람들, 분위기까지, 이 모두를 한꺼번에 느끼는 복합적이고 총체적인 경험에 기반해 비로소 장소는 인식된다. 그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장소가 지닌 특성, 즉 장소성이 만들어진다.

결국 ‘장소성(sense of place 또는 placeness)’은 나와 공간 사이에 만들어진 관계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매일 지나는 골목이나 이미 알고 있던 곳이라 해도 어떤 사건을 통해 나와 관계가 만들어지면 그곳은 특별해지고, 새로워진다. 익숙하고 흔한 곳에서 낯설고 새로운 면을 찾아낼 때, 그 낯설고 새로운 면에 이름을 붙여 볼 때, 나와 그 장소는 관계를 맺게 된다.

장소는 공적이기도 하지만, 그 속성은 내밀하다. 장소는 감각으로 만들어지는 감정, 혹은 정서로 기억된다는 점에서 몸과 관련이 깊다. 초봄 쌀쌀한 밤 공원의 벤치는 누구에게나 딱딱하고 차갑지만, 좋아하는 사람과 나란히 앉아 이어폰을 나눠 낀 채 노래를 듣는 순간의 경험은 내밀하다. 몸은 체온과 노랫소리, 숨소리가 섞인 장소를 감각한다. 그 경험 이후의 벤치는 더 이상 평범하지 않다. 장소와 관계를 맺은 것이다. 그 내밀한 감정과 감각을 기억하는 이에게, 그 공원과 벤치는 다시 찾아가 음악을 듣고 싶은, ‘장소’가 된다.

행동과 몸의 감각 그리고 감정이 장소를 규정한다는 면에서 장소성의 형성은 수행성에 근거한다. 나만이 느낀 내밀한 감정과 그 감정을 이끌어 낸 행동, 이 맥락에서 장소는 동사다. 우린 같은 장소에서 다른 사건을 겪고, 다른 걸 느끼고, 그래서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장소-하다[13]’를 통해 장소는 정해진 기능, 목적에 얽매이지 않고 움직임과 감각이 섞인, 살아 있는 것이 된다. 즉흥적으로 변하고 때때로 다르게 감각되는 생명체처럼 장소는 형성될 수 있다.

하지만 느끼는 공간이나 살아 있는 공간은 쓰이는 공간이나 활용되는 공간으로 대체됐다. 느끼는 시간은 아깝고, 즉흥적으로 변화하는 공간은 활용 목적이 불분명한 낭비의 공간처럼 여겨진다. 그 어느 때보다도 장소성을 열심히 연구하고 ‘개발’하고 싶어 하는 요즘이지만, 도시들이 관심을 가져 온 장소성 연구는 장소의 활용에 주목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특정한 방향성을 지닌 활용에 주목한다.

아주 많은 사람이 ‘좋다’, ‘멋지다’, ‘즐겁다’, ‘아름답다’고 엄지를 치켜올릴 수 있는 장소의 어떤 성격을 추구한다.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만한, 좋아할 만한, 즐겁고 긍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킬 만한 사건과 체험이 있는 그런 장소성을 추구한다. 그 즐거움이 도대체 무엇인지, 어떤 실체를 가졌는지는 질문하지 않은 채 말이다. 이런 식의 즐거움과 매력은 소셜 미디어의 발달로 확실하게 굳어졌다. 교통의 발달로 시공간은 확장되면서 또한 동시에 좁아졌지만, 이러한 시공간의 재조직을 더 가속화한 것은 인터넷의 발달이다.[14]

파리와 뉴욕에서 느끼고 경험한 것, 그러니까 파리의 장소성과 뉴욕의 장소성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과 블로그를 통해 흔해졌다. 그 장소에서의 감정과 즐거움, 특이한 분위기와 정서는 그곳을 경험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이 같은 장소성을 공유한다. 한 장소에 대한 엇비슷한 느낌과 생각과 사진들이 온라인에서 계속 생산된다.

심지어는 저 먼 곳에 있는 파리의 장소성을 옥천이나 나주같이 뜬금없는 곳으로 가져와 재현하는 일도 흔해졌다. ‘파리의 그 ‘갬성’ 다 아시죠? 여기 똑같이 재현했습니다!’ 이런 투의 인테리어와 공간 조성은 더 이상 새롭지 않다. 옥천이나 나주에서 파리의 장소성을 느끼는 건 가능할까? 이런 장소성은 진짜 파리가 줄 수 있는 분위기와 감성, 장소적 독특함일까?

렐프는 장소의 특성이 ‘팔리는’ 시대가 이윤 창출을 위한 가짜 장소성들을 만들어 냈다고 비판한다. 라스베이거스에는 이집트 피라미드와 파리의 에펠탑이 있고, 내가 사는 도시 쇼핑몰과 백화점은 피렌체, 소호 거리와 샹젤리제 거리를 건물 한가운데에 가져다 놓는다. 판에 박힌 이미지에 근거한 획일적 공간 구성은 키치(kitsch)하지만, 어떤 장소에 대한 공통의 감각을 일깨우려니 어쩔 수 없다. 다 아는 만큼 저속하거나 밋밋하고, 의미도 없지만, 그래도 이 장소가 무엇인지는 금방 알게 해야 한다. 방문객들이 그 장소를 한 줄로 쉽게 기억해야 하니까, ‘아, 거기, 뉴욕 센트럴 파크 같은 곳!’ 이렇게 말이다. 그래야 쉽게 홍보할 수 있다. 방문이 이어져야 그 장소든, 그 장소 안의 물건이든 팔 수 있게 된다.

똑같은 방향성을 가지고 만들어진, 똑같은 방향성으로 인식되는 장소는 과연 살아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장소에 꽤 관심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장소에 대한 엄청난 얘기들(여행안내서, 관광 홍보물, 블로그 포스트와 인스타그램 해시태그 등)도 쏟아진다. 하지만, 사실 그것들이 살아 있는 장소는 아닌 것 같다. 렐프는 많은 장소들이 피상적이고 판에 박힌 이미지로 경험되고 있고, 결국 불명료한 배경으로만 있다고 지적하며, ‘장소성의 상실’ 혹은 ‘무장소성[15]’을 주장한다.

획일성을 추구하는 공간 조성은 쉽게 드러나는 만큼 비판하기도 쉬운 듯하지만, 너무나 세련되게 조성된 요즘의 ‘무장소성’은 콕 집어 비난하기 어렵다. 나와 멀리 떨어져 뉴욕 어디쯤 있던 레트로풍 카페는 이제 쉽게 우리 동네 골목으로 재배치된다. 노출 콘크리트와 리드미컬한 음악이 흐르는 레트로풍 카페 거리는 충분히 예쁘다. ‘독특하다! 특별한 감성이 있다! 힐링된다!’고 친구와 웃으며 얘기한다. 즐길 만한 특색을 잘 갖췄지만, 이게 이 공간만의 독특함인지, 이 공간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는 진짜 특성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나는 무엇을 느끼고 있는 걸까? 사람들은 헷갈린다. 이런 불명확함을 만드는 데 소셜 미디어가 한몫했다. 사람들은 공간과 관계 맺기를 멈추고, 그 공간이 제공하는 최상의 순간만 소비하고, 그 모습을 사진에 담아 전시하기에 바쁘다.

소셜 미디어 속 장소 전시는 사실 관객 혹은 다음 소비자를 위한 것이다. 지금 내 팔로워들이 필요한 것을 예리하게 짚어 전시해야 한다. 멋진 장소를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제시해야 한다. ‘인증샷’과 ‘인생샷’ 안에는 보여 주고 싶은 멋진 장소의 모습과 그걸 바라보는 나의 이야기가 있지만, 그것은 금방 파편화돼 흩어질 뿐이다. 내 사진과 해시태그와 짧은 블로그 글을 본 다음 방문자도 결국 같은 사진을 찍어 자신의 소셜 미디어에 전시할 테니 말이다. 새로운 이야기가 계속 만들어지지 못하는 장소는 결국 시들해질 뿐이다.

장소와 장소 경험의 본질적 특성을 찾으려는 노력이 없어졌다. ‘좋아요’를 노리는 장소 얘기들 속에는 정작 장소가 없다.

 

지리적 능력은 장소를 만든다


소셜 미디어가 사진을 세상 끝까지 퍼나르면서 장소의 고유함이 사라졌다고 한탄할 수 있지만, 사실 이건 또 다른 기회일 수 있다. 소셜 미디어 속 사진이 늘 현장과 현실을 모사(copy)하고 똑같이 찍어 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사진의 어떤 특성을 활용하면 이 장소 상실감은 ‘공간을 생산’할 수 있는 설렘으로 전환될 수 있다. 도시 공간을 비판적으로 사유한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는 공간이 그저 수동적으로 비어 있는 그릇이거나, (돈과) 교환 가능한 소비재로만 존재하는 건 아니라고 말했다. 공간은 그것을 발견하고 활용하는 사람을 통해, 그리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능동적으로 반응하는 일을 통해 새로운 공간으로 태어난다. 르페브르는 이러한 공간의 특성을 ‘공간이 생산에 개입한다’[16]고 표현했다.

공간이 능동적이고 살아 움직이는 존재라면,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나와 만들어진 사건에 반응하면서 특별하고 새로운 공간으로 바뀐다면, 우린 그 결과를 사진과 글로 남겨 둘 수 있다. 사진을 활용하되 다른 시각과 방법론을 결합한다면, 소셜 미디어가 창궐한 온라인 공간 안에서도 새로운 장소성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말이다. 그 장소성은 지극히 사적인 것일 수도, 탄성이 나오게 아름다울 수도, 괴상하고 신기할 수도, 혹은 아예 예상하지 못했던 즐거움일 수도 있다. 사진으로 인해 장소성을 잃었다고 더 이상 사진을 찍지 않을 것인가? 인스타그램과 블로그를 포기할 것인가? 아니, 당신은 이미 찍고 쓸 준비를 하고 있다.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루도비코 에이나우디(Ludovico Einaudi)는 지난 2016년 북극해에서 특별한 연주를 선보였다. ‘Elegy for the Arctic’, ‘북극을 위한 비가’란 제목의 짧은 피아노 곡이 연주됐다. 연주 직전, 빙하는 천둥 치는 소리를 내며 녹아내린다. 에이나우디는 손을 풀다 말고 그 소리에 깜짝 놀라기도 한다. 가느다랗고 애절한 연주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북극의 빙하는 ‘쩡’ 소리를 내며 갈라지고 무너진다. 다른 어떤 설명이 없어도 이 3분짜리 연주 영상은 많은 감정과 이해와 설명을 들려준다.
Ludovico Einaudi, 〈Ludovico Einaudi - "Elegy for the Arctic" - Official Live (Greenpeace)〉, 2016. 6. 20.
에이나우디가 북극이 아니라 예술의 전당에서 이 곡을 연주했다면 과연 같은 감정과 이해를 불러왔을까? 그가 아무리 기후 위기와 사라지는 북극 생명체들에 대한 비통한 마음을 담아 연주한다고 해도 안락한 예술의 전당 관람석에서는 그 감정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비가’가 진짜 비통함과 슬픔, 분노를 가져오게 한 건 장소 몫이 크다. 바로 그 북극에서, 빙하가 쩡쩡 갈라지는 소리에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연주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전달되는 메시지가 비로소 완성된다. 이 퍼포먼스는 장소의 힘, 그 장소가 지닌 독특함, 즉 장소성을 예술 매체로 활용해 메시지를 전달했다.

프로페셔널한 예술가만이 장소의 힘, 장소성을 예술적 매체와 연결해 메시지나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사실 스마트폰을 든 잠재적 사진작가가 아닌가. 오늘 아침에도 카페에 들러 독특한 무늬의 라테 거품 사진을 찍었고,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등록했고, 팔로워로부터 ‘좋아요’ 하트를 받았다. 내가 그 카페에서 느낀 감정을 전달하고 싶어서 사진을 찍었고, 전시했고, 그리고 관객으로부터 인정받았다. 이는 아주 간단하고 명쾌한, ‘예술이 될뻔한’ 활동이다.

전형적 이미지의 복사와 확산이 아니라, 내가 장소에서 진짜 느낀 걸 전달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북극을 그저 얼음 덩어리 섬으로만 보지 않는 시각과 함께 공간에 발생한 사건의 의미를 잡아채는 능력이 필요하다. 렐프는 이런 역량을 ‘지리적 능력’[17]이라고 불렀다. ‘지리적 능력’은 일종의 인지 능력이나 상상력이다. 우리 사회 안의 모든 존재는 사회적 의미의 관계망 안에 있고, 그 관계망 안에서 해석된다는 ‘사회학적 상상력’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어떤 장소에 있는 한 사람은 그저 홀로 존재하는 사적 존재 같지만, 그 사람은 자신과 연결된 수많은 사회적 관계를 그 공간으로 끌고 온다. 공간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공간은 오랜 시간 쌓아 온 물리적, 환경적 변화뿐 아니라,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적 의미도 지닌다. 한 사람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거대한 세계가 그 공간 안에 들어찬다는 것, 그 공간 역시 역사와 환경과 사회적 의미를 품은 또 하나의 거대한 세계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그 두 거대한 세계가 마주치는 장면을 인지하는 능력, 두 세계가 만나 생긴 독특한 정동을 느끼는 능력이 ‘지리적 능력’ 아닐까?

전문적이고 어렵고, 비싼 용어들로 만들어진 역량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우선 필요한 건 ‘가장 솔직해진 나’다. 나의 솔직한 모습과 위치를 아는 것이 지리적 능력에 꼭 필요한 시각을 갖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나는 왜 이곳이 좋지, 혹은 싫지?’ ‘왜 저곳에 가고 싶을까?’ ‘왜 가기 싫을까?’ ‘왜 여기 오면 어떤 단어나 노래, 사람, 냄새 혹은 기억이 떠오르지?’ ‘내가 여기서 하고 싶거나 느끼고 싶은 건 뭐지?’ 따위의 질문에 솔직하게 답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여행안내서와 누군가의 블로그 감상문이 강요하는 느낌, 꼭 해야만 한다고 제안된 액티비티가 아니라, 내가 느끼는 것을 확실하게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느끼지 못한다면 그 장소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나 자신을 이해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면 비로소 시각이 생긴다. 그때서야 회색 도시 공간에 숨겨져 있던 색깔이 드러난다. 이걸 도시의 ‘개성’이나 ‘이면’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익숙한 것들이 달리 보인다면 우린 공간에 대해서 나만의 질문을 할 수 있다. ‘이 오래된 극장 앞엔 왜 교회에 있을 것 같은 벤치가 놓여 있을까? 어색하고 이상하다.’ ‘원래 아파트 사람들은 인사도 잘 안 하는데, 왜 이 아파트 놀이터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수다를 떨까?’ ‘이 골목엔 능소화가 왜 이렇게 많이 피었을까? 무엇이 없어지고 능소화가 남은 걸까, 아니면 무엇을 감추기 위해 능소화가 있는 걸까?’

공간의 사연을 묻고, 감각을 열고 솔직하게 사연을 듣는 것, 이러한 장소 경험은 창의성이 발휘된 일종의 탐구 활동이다. 탐구 활동이 신나고 재밌으려면 미리 느낄 감정과 체험할 사건들을 정하지 않는 게 좋다. 알프스에 올라 푸르고 투명한 하늘을 바라보면서 ‘누구든 그 시린 하늘을 보면 눈물을 훔치거나 오금이 저린다’고 어디선가 읽은 글을 떠올리지 말고, 내가 온 이유를 먼저 생각해 보자.

사실 장소와 나의 관계는 내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것만큼이나 다양하다. 때론 신나고, 설레고, 유쾌하겠지만 화가 날 수도, 불쾌할 수도 있다. 알프스는 감동만 선사하지 않을 테니까. 이 모든 경험과 느낌을 미리 정하지 않고 열어 두고 기다리는 자세가 ‘지리적 능력’이다. 누군가와 친밀하고 깊은 관계를 맺을 때처럼, 상대(장소)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상대를 존중하면서 탐구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등을 점검하며 자제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장소의 본질에 다가가는 것, 장소와 관계를 맺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알 기회다. ‘지리적 능력’을 나와 세계에 대한 ‘탐구 자세’라고 달리 표현할 수도 있다. 스마트폰을 들고 처음 보는 건물의 특이한 외벽을 찍기 전에 자신이 선 위치를 생각해 보자. 카메라의 초점을 조절해 원하는 대상을 집중 조명할 때처럼, 이 공간을 보고 있는 자신의 초점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하면 공간을 더 잘 감각할 수 있다. ‘이 건물 앞에 선 나는 누구인가?’

어떤 장소에 들러 사진을 찍고 짧은 글을 붙여 블로그에 올릴 때, 사람들은 대부분 관광객 아니면 거주자가 된다. 밖에서 들어온 사람 아니면, 안에 이미 사는 사람. 이렇게 장소와 나와의 관계는 딱 두 종류밖에 없는 걸까? 이도 저도 아니거나, 안과 밖에 걸쳐 있거나, 아예 사람 아닌 식물 혹은 지구인이 아닌 외계인이면 안 되는 걸까?

정해진 시각에서 벗어나 그 장소의 특이함을 찾으려면 나의 위치를 달리해 보는 것, 혹은 진짜 내 위치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 시원한 맥주 한 잔이 절실한 퇴근길 직장인의 위치에서 도시를 감각할 때와 지금 내 옆구리에 등을 부비는 강아지의 시선에서 도시를 느끼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내 진짜 위치는 강아지의 시선이나 감각에 더 가까울 수도, 멀리 필리핀에서 일하러 온 이주 노동자의 그것과 같을 수도 있다.

사진은 이미 있는 대상을 촬영하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사진은 실재를 그대로 옮기기만, 정말 ‘잘 찍어 내기만’ 하면 될 것 같다. 사진에 찍힌 존재 자체가 이미 익숙한 만큼,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말이다. 하지만, 사진은 색다르면서도 새로운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사진이 예술일 수 있는 이유다. 익숙한 존재지만 낯선 느낌을 주는 것, 그래서 두렵고 신기하고, 예측하지 못했던 감정을 불러오는 것. 예술가들은 그것을 ‘언캐니(uncanny)’란 단어로 설명한다. 익숙한 것은 그 뒤에 숨겨진 낯설고 편치 않은 것들과 중첩돼 있다. 이러한 모순과 중첩이 사진을 통해 드러날 때, 사진 속 익숙한 대상은 언캐니해진다. 사진을 통해 장소는 새로워지고 특성을 갖게 된다. 익숙했던 장소에 색다른 감각이, 장소성이 생긴다.

매일 보는 건물과 골목, 공원과 산책길 그리고 사람들을 어떤 시각으로 어떠한 방법으로 사진에 담아 내는가에 따라 장소는 새롭게 드러나고 만들어질 것이다. 내가 찍어 올린 사진과 글 포스팅이 어떤 팔로워의 ‘푼크툼(punctum)[18]’을 자극할 수 있다. 한 장의 사진과 100자의 글이지만, 읽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른 푼크툼이 생겨난다면, 100개, 1000개의 장소감이 만들어진다. 그때 하나의 장소는 두껍고 풍성한 장소성을 가진 것으로 다시 태어난다
[1]
한국언론진흥재단, 〈2021 소셜미디어 이용자 조사〉, 18쪽.
[2]
한국언론진흥재단, 〈2021 소셜미디어 이용자 조사〉, 18쪽.
[3]
한국언론진흥재단, 〈2021 소셜 미디어 이용자 보고서〉, 137쪽.
[4]
한국언론진흥재단, 〈2021 소셜 미디어 이용자 보고서〉, 217쪽.
[5]
네이버가 발표한 〈2022년 네이버 블로그 리포트〉에 따르면, 블로그 유저 중 76퍼센트가 10, 20, 30대다. 리포트에 따르면 전 연령층에서 전년 대비 이용자 수가 늘었다.
[6]
김근현·이수광, 〈빅데이터를 활용한 10년간의 숲길 관련 블로그·카페 이용자 인식 분석〉, 《호텔관광연구》 23(3), 2021, 34~52쪽.
[7]
정초영 외 2인, 〈가상 인플루언서의 특성이 관광객의 애착, 신뢰, 행동의도에 미치는 영향〉, 《관광연구저널》 37(3), 2023, 163~181쪽.
[9]
표준국어대사전은 ‘공간’을 철학적 의미까지 여섯 가지로 정의하고 있는데, 여러 면에서 쓰임이 가능하다. 여기서는 두 번째로 제시된 정의를 사용했다.
[10]
이 푸 투안(윤영호·김미선 譯), 《공간과 장소》, 사이, 2020, 19쪽.
[11]
이재하, 〈장소 연구의 핵심 주제 ‘장소의 정감’ 재논의와 장소 만들기에서 그 중요성〉, 《한국지역지리학회지》 24(1), 2018, 51~65쪽.
[12]
에드워드 렐프(김덕현 외 2인 譯), 《장소와 장소상실》, 논형, 2021, 111~114쪽.
[13]
이광호, 《장소의 연인들》, 문학과 지성사, 2023, 169쪽
[14]
조명래, 《공간으로 사회 읽기-개념, 쟁점과 대안》, 한울아카데미, 2014, 169~196쪽
[15]
에드워드 렐프(김덕현 외 2인 譯), 《장소와 장소상실》, 논형, 2021, 239~245쪽.
[16]
앙리 르페브르(양영란 譯), 《공간의 생산》, 에코리브르, 2011, 27쪽.
[17]
에드워드 렐프(김덕현 외 2인 譯), 《장소와 장소상실》, 논형, 2021, 7쪽.
[18]
그 공간에 나오는 특유의 감정을 나만이 새롭게 느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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