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담벼락의 수난

2023년 12월 22일, explained

담벼락에 흩뿌려진 낙서도 예술이다. 모두 그렇지는 않다.

전쟁터가 된 우크라이나의 파괴된 벽에 그려진 뱅크시의 그라피티. 사진: Celestino Arce/NurPhoto,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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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경복궁이 화제의 중심에 섰다. 좋은 소식은 아니다. 경복궁 담장에 스프레이 낙서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지난 16일 새벽에는 불법 스트리밍 사이트의 이름이 등장했다. 10만 원을 주겠다는 제안에 응한 10대 두 명의 범행이었다. 다음 날인 17일에는 한 가수의 활동명과 앨범 제목이 적혔다. 모방 범죄였다.

WHY NOW

그런데 두 번째 낙서범의 주장이 이목을 끈다. “예술을 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블로그에 조사 후기, 기자와의 만남 등을 공개하며 세계적인 아티스트 콜렉티브, ‘미스치프’가 말하는 ‘짓궂은 장난’을 치고 싶었다고 밝혔다. 과연 두 번째 낙서범은 스스로가 주장한 대로 “미스치프의 어린 양”일까. 예술을 했으니 죄송하지 않아도 될까.

Street Art

담벼락에 한 낙서도 예술일 수 있다. 거리 미술(le street art)은 이미 학계에서 통용되는 용어다. 낙서, 벽화 등 거리에서 하는 미술을 포괄한다. 멀게는 1920년대 멕시코 혁명과 맞물려 주목받았던 ‘벽화주의’에서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가깝게는 1960년대 미국 필라델피아와 뉴욕을 중심으로 시작된 그라피티(graffiti) 문화를 시작점으로 잡기도 한다. 랩 음악, 브레이크 댄스, 디제잉과 함께 청소년 및 유색 인종 등 사회적으로 ‘비주류’에 속하는 집단의 표현 양식이었다. 그런데 80년대, 그라피티가 미술관에 걸리게 된다.

Basquiat

장 미셸 바스키아가 시작이다. 당시 뉴욕 미술계의 권력 중 권력이었던 앤디 워홀의 눈에 띈 바스키아의 그라피티는 새로웠다. 기성 미술계의 누구도 먼저 말하지 않았던 메시지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정체성에 기반한 메시지다. 예를 들어 1983년작 〈Hollywood Africans〉에는 당시 할리우드 영화에 클리셰로 등장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나열하고 있다. 당시 미술계 입장에서는, 독특했다.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Tagging

바스키아의 작품에서 눈에 띄는 것은 빼곡히 적힌 단어들이다. 작업의 근간이 그라피티에 있으니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스스로를 ‘그라피티 아티스트’라 칭하지 않는다. ‘그라피티 라이터(Graffiti Writer)’다. 다분히 텍스트에 기반을 둔, 아카이브적 성격을 가진 장르라는 얘기다. 그라피티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태깅(Tagging)’부터 그렇다. 길을 걷다 골목 담벼락에 만나게 되는, 의미를 가늠하기 힘든 간단한 낙서가 바로 태깅이다. 라이터의 닉네임이나 소속 크루명을 적는다. 서명이라기보다는 해시태그에 가깝다. 영역 표시, 자기 과시의 일종이다.

Bombing

그런데 이런 자기표현은 대부분 합법의 영역을 벗어난다. 개인의 캔버스가 아닌, 공공의 영역에서 표현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를 일컫는 용어가 ‘바밍(Bombing)’이다. 불법으로 공공 시설물이나 사유물에 그라피티를 남기는 행위다. 이 ‘바밍’이 논란의 씨앗이 된다. 우리 집 벽지 위에 낙서한다면 그뿐이다. 그런데 이웃집 담벼락이나 모두의 골목, 공공의 열차에 낙서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Broken Windows

규칙을 깨뜨린다는 것은 선언적인 행위일 수 있다. 레거시를 전복하고 새로운 담론을 세우는 과정이다. 비난을 견디고 엄정한 질문에 답해야 한다. 그 과정 전체가 메시지이며 표현이 된다. 그러나 규칙을 깨뜨린다는 것은 동시에 시그널이 되기도 한다. 무질서가 허용된다는, 법의 규칙이 아니라 힘의 규칙이 우위에 있는 곳이라는 시그널 말이다. 깨진 유리창 이론이다. 깨진 유리창 한 장이 그 지역의 범죄율을 높인다. 이를 바탕으로 한 1980년대 뉴욕시의 실험은 성공했다. 지하철의 낙서를 지워 사건 사고를 줄였다. 비슷한 사례는 전 세계에서 보고된다.

Audiences

누군가의 낙서를 예술로 볼 것인지, 그저 불법적인 과시로 볼 것인지는 두 주체의 판단에 달렸다. 법과 감상자다. 법의 판단에 따르자면 바밍은 대개 불법이다. 그것이 요즘 가장 비싼 작가중 한 명인 ‘뱅크시’의 작품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감상자의 입장에서는 다르다. 그가 꾸준히 ‘평화’라는 주제 의식에 천착하고 있다는 점을, 그리고 그의 바밍은 경찰의 눈을 피해 낙서를 하고 도망치는 수준이 아니라 작품의 의미를 위해 목숨을 거는 행동이 되기도 한다는 점을 감상자들은 알고 있다.

Beaux-arts

물론, 그라피티라는 거리의 표현 방식을 차용하면서도 비싼 값에 거래되는 뱅크시 작품의 모순성을 두고는 호불호가 갈린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갖는 맥락과 연속성은 명백히 드러난다. 바로 이 점이 뱅크시의 낙서를 미술로, 예술로 만든다. 그렇다면 경복궁 담장에 좋아하는 가수와 앨범 제목을 남긴 두 번째 낙서범의 행위는 예술일까, 아닐까. 전 국민이 감상자다. 그 안에서 어떤 메시지와 선언, 담론이 있는지는 감상자가 보고 판단할 일이다.

IT MATTERS

그렇다면 두 번째 낙서범이 추앙한다는 ‘미스치프’의 생각은 어떨까. 공식 입장이 없으니 짐작해 볼 뿐이다. 짐작하려면 미스치프의 작품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미스치프의 작품은 도발적이다. 논란이 되거나 화제가 되거나, 둘 중의 하나다. 이를테면 루이뷔통 ‘짝퉁’ 가방 같은 것이다. 그냥 짝퉁은 아니고 소금 한 톨보다 작은 사이즈다. 8400만 원에 낙찰됐다. 세계에서 가장 비쌌던 아티스트, 데미안 허스트의 회화 작품을 사들여 조각낸 뒤 한 조각씩 팔기도, 전시하기도 한다. 연속성이 보인다. 허영심과 속물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런 미스치프에게, 경복궁 담벼락의 낙서가 예술일까. 예술이 아니더라도 어떤 의밋값을  갖는 사건일까. 낙서범의 주장대로, 미스치프도 그를 과연 어린양으로 생각해 줄 것인지, 이것 또한 감상자의 주관으로 판단해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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