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택시 운전사의 일생

2024년 4월 23일, explained

홍세화. 늦었지만, 그를 기억할 이유는 충분하다.

홍세화 장발장은행 은행장이 지난 4월 18일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명을 달리했다. 향년 77세. 사진; 더 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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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자유롭습니다.”
마지막 인터뷰에서 故 홍세화 씨가 남긴 말이다. 2024년 4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77세. 암이었다. 마지막을 맞은 곳은 중랑구 녹색병원으로, 항암 대신 남성 호르몬을 억제하는 요법을 썼다. 끝까지 사람을 만났고,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정치적 방향성이 확실한 인물이었다. 진보신당 대표까지 역임했으니 더 붙일 말도 없다. 그러나 홍세화를 그저 진보 정치인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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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상징하는 바가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방인이자 난민이었다. 힘주어 글을 쓰는 언론인이었다. 돈이 없어 옥살이를 피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은행을 만든, 은행장이었다. 한국이 반세기 넘게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을 온몸으로 상징했던 삶이었다.

당사자, 홍세화

홍세화는 당사자성이 확실한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 운동권에 투신했던 계기도 그랬다. 한국 전쟁 당시 국군에 의한 학살 사건에 온 가족이 휘말렸다. 문중 사람들이 학살당하는 가운데, 어린아이였던 본인을 포함한 홍세화의 가족은 운 좋게 살아남았다. 이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 대학 1학년 때의 일이다.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에 몸담은 것도 이 영향이다.

난민, 1979

하지만 일이 터진 것은 정작 취직해 회사원으로 자리 잡은 뒤였다. 무역회사 ‘대봉산업’의 직원으로 파리 출장을 와 있던 1979년, 한국에서 이른바 ‘남민전 사건’이 터졌다. 한국으로 돌아갔다가는 어찌 될지 모른다. 그는 프랑스 정부에 ‘망명’을 신청했고, 받아들여졌다. 그는 전 세계 어디든 갈 수 있지만, 한국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난민’이다.

난민, 2024

난민은 1951년 7월 제네바에서 채택된 협약(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 Convention Relating to the Status of Refugees)에 의해 정의된다. 인종, 종교, 국적, 신분, 정치적 견해 등의 차이로 인한 박해를 피해 외국이나 다른 지방으로 탈출한 사람들이다. 홍세화를 난민으로 인정한 곳은 프랑스의 외무부 산하 ‘난민과 무국적자 보호를 위한 사무국’이었다. 한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으려면 법무부 산하의 ‘출입국·외국인 관서’에 신청해야 한다. 한국의 난민 인정률은 2.1퍼센트로, 세계 평균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홍세화는 난민에 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그런데 난민은 사회를 잃어버린 인간입니다.”

언론인-정치인, 2002

2002년, 영구 귀국해서는 언론인으로 살았다. 《한겨레》에 입사했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의 편집인으로도 활동했다. 그런데 그는 한국 언론에 없던 언론인이었다. ‘민주 노동당’의 정당인으로서도 활동했던 것이다. 한겨레는 홍세화를 징계했다. 또, 편집을 맡고 있던 여론 지면, ‘왜냐면’의 담당자를 교체했다. 윤리 강령 위반이었다. 그러나 홍세화는 반발했다. 기자 개개인의 자율성과 검증성, 양식을 부정하는 처사라는 것이었다.

언론인-정치인, 2024

‘정치적 중립’이라는 금과옥조를 섬기느라 한국 언론은 맥락을 잃어버렸다. 그렇다면 중립과 신뢰는 잘 지켜졌을까. 영국 옥스퍼드대 부설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가 발표한 〈2023 디지털 뉴스리포트〉에서 한국 수용자의 뉴스 신뢰도는 28퍼센트로, 조사를 실시한 총 46개국 중 41위에 머물렀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2023 언론 수용자 조사〉에 따르면, 2021년 대비 2023년 한국 언론의 공정성, 전문성, 정확성은 물론 영향력에 대한 평가 점수가 모두 하락했다. 정치적 지향성이 있는 사람이 기사를 쓰면 안 된다고 믿어온 한국 사회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은행장, 2015년

실수로 남의 물건을 부서트리거나 배고파서 음식을 훔쳐도 죄는 죄다. 징역까지 살 것은 아니라 벌금형이 보통 선고된다. 하지만 어떤 이는 벌금을 내지 못해 감옥에 갇힌다. 노역을 한다. 홍세화는 이런 상황을 바꾸기 위해 벌금제 개혁을 주장했다. 국민연금이나 건강보험처럼 벌금도 재산과 소득에 비례해 책정하자는 내용이다. 당신의 100만 원보다 이 사람의 10만 원이 더 무겁다는 것을 이해하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당장 벌금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벌금 낼 돈을 빌려주는 은행을 설립했다. 그것이 ‘장발장 은행’이다. 직함이 참 많았던 홍세화가 마지막으로 택했던 직함은 ‘은행장’이었다.

은행장, 2024년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은행이었을 이곳에서는, 버젓한 금융상품은 팔지 않는다. 받을 수 있을지 요원한 돈을 빌려만 주는 곳이다. 서민들의 경우 벌금 10만 원에 하루 노역이다. 원래는 5만 원에 하루였다. 홍세화 은행장은 은행을 설립하고 며칠 뒤,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100만 원의 벌금을 대출해 주면 “20일의 자유를 구하게끔 되어있다”고 이야기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자유를 대출해 주는 은행, 장발장 은행은 빨리 없어지는 것을 목표로 문을 열었지만, 안타깝게도 여전히 성업 중이다. 지난 2023년, 벌금을 내지 못해 감옥에 갇힌 사람의 수는 5만여 명에 달했다.

IT MATTERS
 
홍세화는 한국에 ‘똘레랑스(tolérance)’라는 개념을 심고 싶어 했다. 우리말로 굳이 번역하자면 ‘관용’이라는 뜻이다. 관용은 참는 힘이기도 하고 수용하는 너그러움이기도 하며 용기 있는 유연함이기도 하다. 그의 뜻대로 한국에는 똘레랑스가 심어졌을까. 홍세화는 2020년 작, 《결 : 거칢에 대하여》에서 “설득하기는 어렵고 선동하기가 쉬운 사회”라고 진단했다. 그 택시 운전사가 삶을 들여 바꾸고자 했던 이곳에서는 여전히, 편협(intolérance)의 뿌리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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