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 여행자의 노트

발견; 거대한 책의 보물선, 스트랜드·아거시

18마일의 서가; 스트랜드


전 세계의 애서가들을 불러 모으는 뉴욕 문화의 아이콘, 하루 종일 있어도 지겹지 않은 읽을거리가 있는 공간, 세계 최대 규모의 중고 서점 스트랜드(Strand)에 붙은 수식어다. 서점 로고가 프린트된 빨간 깃발이 휘날리는 4층 높이의 건물은 멀리서도 눈에 띈다. 스트랜드는 글로벌 브랜드가 밀집한 뉴욕의 중심가에서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다.

스트랜드를 찾은 것은 월요일 오전이었다. 주말이나 평일 오후에 비하면 한산한 시간일 텐데도 서점 안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스트랜드는 책으로 가득한 백화점이나 거대한 책 공장처럼 보였다. 서점 안에는 사람 키보다 두 배쯤 높은 책장이 가득했고, 모든 칸에 빼곡하게 책이 들어차 있었다. 서가로도 모자라 책 수레에 1달러짜리 책을 가득 싣고 판매하고 있었다. 손님들은 카트를 밀면서 책장 사이를 오가거나, 근처에 쭈그려 앉아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백화점이라고 하기에는 정돈되지 않은 혼잡함이 매력적이고, 공장이라고 하기에는 인간적인 활기가 넘치는 독특한 공간이었다.
뉴욕의 상징이 된 서점 스트랜드는 멀리서도 눈에 띈다.
서점 앞에 있는 책 수레에는 1달러짜리 책이 가득 실려 있었다.
스트랜드는 1927년 문을 연 유서 깊은 서점이다. 서점을 설립한 벤 배스(Ben Bass)는 리투아니아 출신의 이민자로, 포목점에서 일하던 청년이었다. 책에 대한 남다른 애정으로 조금씩 책을 모아 왔던 그는 25세가 되던 해에 자본금 600달러를 들여 스트랜드를 열었다. 그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을 꿈꿨다. 서점 이름은 유명 작가들이 거주했던 영국 런던의 거리 스트랜드에서 따왔다.

벤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의 아들 프레드(Fred)가 스트랜드를 이끌었다. 그는 중고 서적을 포함해 고서와 희귀본, 신간 도서와 음반 등으로 취급 품목을 확대하며 스트랜드에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했다. 올해로 92번째 생일을 맞은 서점은 프레드의 딸 낸시(Nancy)가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다. 3대에 걸친 역사를 쌓아 오는 동안 서점의 소장 도서도 엄청나게 늘었다. 스트랜드가 ‘18마일의 서가’라고 불리는 이유다. 소장 도서를 일렬로 늘어놓으면 그 길이가 18마일에 달한다는 의미다.

프레드는 생전에 “서점에서 길을 잃는 방문객들의 모습을 보는 게 즐겁다”는 이야기를 했다.[1] 스트랜드에서는 누구나 길을 잃을 수 있다.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면적만 1500평에 달하기 때문이다. 편한 의자에 앉아 책을 보며 휴식을 취하는 풍경을 상상한 독자라면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스트랜드에는 안락한 의자나 널찍한 테이블을 갖춘 여유 공간이 없다. 약간의 빈틈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책이 놓여 있다. 당연히 커피를 파는 카페도 없다. 스트랜드의 직원은 “어디서 책을 읽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책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이라고 답한다.
2018년 1월 세상을 떠난 프레드 배스와의 인터뷰. 스트랜드의 과거와 현재가 모두 담겨 있다.
실제로 책으로 가득한 책장 옆이나 통로, 성인의 허리춤까지 쌓인 책 더미 옆에는 어김없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있다. 바닥에 엎드려 책을 보는 아이도, 사진집을 펼쳐 놓고 드로잉을 하는 청년도 있었다. “스트랜드에서는 편하게 책을 보기 어려우니 벽에 기대거나 바닥에 앉을 수 있도록 낡은 옷을 입고 가라”는 방문객 리뷰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트랜드는 250만 권이 넘는 책을 보유하고 있고, 서점의 하루 평균 거래량은 5000여 권에 달한다고 한다. 전 세계의 책이 모여들고 흩어지는 거대한 무역항 같은 곳이다. 서점 1층에는 신간 도서와 문학 작품이 있고, 역사, 요리, 뉴욕에 관한 책이 있다. 지하에는 정치, 경제, 과학, 법률 분야의 학술 도서와 출판사의 리뷰 도서가 있다. 2층으로 올라가면 미술, 사진, 건축, 패션 등 문화 예술 분야의 책들과 어린이 도서를 읽을 수 있다. 스트랜드가 특별한 이유는 수많은 책을 섬세하게 분류한 섹션에 있다. 예를 들어 사진 섹션 안에도 유명한 작가의 전기, 카메라에 대한 이해, 사진 촬영 기술 등의 소주제가 있다. 요리책들은 셰프를 위한 책, 홈베이킹 관련 도서, 와인과 함께 먹기 좋은 음식에 대한 이야기 등으로 분류되어 있다. 독자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상황에서 책을 찾고 있는지를 세심하게 고려한 분류법이다.

중고 서점이기 때문에 같은 책이 여러 권 꽂혀 있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모두 다른 책이다. 책의 상태나 출판사, 번역가 등에 따라 같은 책도 각기 다른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스트랜드의 백미는 희귀본과 초판본을 보관하는 3층 서가다.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가 서명한 《율리시스》 초판본이나 아인슈타인의 사인이 들어 있는 책, 금속 활자로 인쇄한 1500년대 책들은 유물에 가깝다. 희귀본의 가격은 책의 상태와 희소성에 따라 달라지는데, 17세기에 발행된 셰익스피어의 두 번째 전집은 12만 달러가 넘는다. 스트랜드에서 가장 유서 깊은 공간이라고 불러도 좋을 3층은 커뮤니티 프로그램이 열리는 장소로도 활용된다. 거의 매주 신간 행사와 작가 인터뷰가 열린다. 이 공간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고객도 있을 만큼 독자들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상징적인 곳이다.

스트랜드는 책을 위한 곳이라는 서점의 본질에 충실하다. 책을 빼면 그 무엇도 독자의 시선을 빼앗지 않는다. 방대한 양의 책에 압도되는 경험은 카페 같은 서점이 많아진 요즘에 오히려 신선하다. 카트를 끌면서 커다란 서가 사이를 오가다 보면 다양한 이야기를 지닌 책을 만날 수 있다. 신간 도서가 진열되는 1층 중앙 테이블에서 멀어질수록 낯선 책들이 나타난다. 스트랜드에서 유익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어떤 책이든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낯선 분야의 도서도 펼쳐 보고, 책이 담고 있는 이야기를 가늠해 보자. 책 제목이나 주제, 디자인과 같은 일반적인 정보는 물론 인쇄 방식이나 발행 연도, 출판사와 번역가 정보를 비교해 가며 보석 같은 책을 발견하는 기쁨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물어보세요


요즘은 어느 서점을 가든 직원들의 추천사를 읽을 수 있지만, 스트랜드의 추천사는 조금 특별하다. 줄거리를 소개하는 수준 이상으로, 독자에게 어떤 영감을 제공할 수 있는 책인지를 자세하게 적고 있다. 한 페이지에 달하는 추천사도 있다. 독자에게 양질의 가이드를 제공해야 하기에 스트랜드 서점의 직원 채용 시험은 까다롭다. 열 개의 문학 작품 제목과 열 명의 저자를 연결하는 과제 등으로 구성된 시험은 1970년 프레드가 처음 만든 이래 40년이 넘게 유지되고 있다.
스트랜드 직원들이 손으로 쓴 추천사에는 독자를 위한 배려가 묻어난다.
《뉴욕타임스》는 이 시험에 지원한 제니퍼 로보(Jennifer Lobaugh)라는 여성의 이야기를 보도하기도 했다.[2] 러시아와 프랑스 문학을 전공한 로보는 “문제가 이렇게 어려울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전공자에게도 쉽지 않은 시험이기에 매주 60명 정도가 지원하지만 통과하는 사람은 많아 봐야 두 명 정도다.

반대로 말하면, 스트랜드에서 일하는 250여 명의 직원들은 모두 이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창고 담당 직원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인지 서점 곳곳에는 ‘우리에게 물어보세요(Ask us)’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책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다면 직원을 찾으라는 의미다. 이 문구를 발견할 때마다 서점 직원들이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말을 거는 것 같다. “책에 관한 거라면 무엇이든 우리에게 물어보세요!”

만약 직원들이 책을 더 빠르게 찾아 주는 역할만 한다면 도서 검색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독자의 곁에 200명이 넘는 직원들이 있는 이유는 이들의 역할이 단순히 책의 위치를 알려 주는 데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책을 더 빠르게 찾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독자의 질문에 공감하고 함께 답을 찾아가는 사람들이다.

스트랜드의 홈페이지에는 각 카테고리를 담당하는 직원들이 소개되어 있고, 이들이 추천하는 책과 그 이유도 자세하게 적혀 있다. 아만다(Amanda)라는 직원은 《꽃으로 말해줘(The Language of Flowers)》을 추천하면서 “달콤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관계와 신뢰라는 예민한 주제를 다룬다”고 설명했다. 어린이 도서를 담당하는 직원은 여덟 살짜리 조카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을 묻는 독자의 질문에 《찰리의 초콜릿 공장》과 《마틸다》를 추천했다. 홈페이지에는 직원들의 전공과 관심사가 소개되어 있고, 독자들은 원하는 직원에게 책 추천을 부탁하거나 질문을 남길 수 있다.

스트랜드에서 어릴 때 읽었던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발견하고 직원에게 물었다. “베푸는 사람(Giver)과 받는 사람(Taker)에 관한 책을 추천해 주실 수 있나요?” 경영 철학이나 심리학 도서를 추천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직원은 내게 질문을 던졌다. “정확히 원하는 분야가 있나요? 일러스트집이나 동화책을 찾나요? 아니면 성인용 도서를 찾나요? 국가 간의 문제를 다룬 책이나 논문의 연구 사례를 알아보고 싶나요?” 직원은 질문에 대한 답을 모두 듣고, 동료를 불러서 그의 의견을 물은 뒤에야 책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스트랜드에서 직원에게 질문을 하고 답을 찾는 과정은 여러 관문으로 구성된 사다리 타기 같다. 서점에는 200만 권의 책에 도달할 수 있는 수십 갈래의 선택지가 있고, 우리는 직원의 안내에 따라 서서히 선택지를 좁혀 갈 수 있다. 각 관문에서 직원의 질문에 어떤 답을 하는지에 따라 선택을 받을 책도 달라진다. 직원들은 나의 대답을 듣고 《나 자신의 국가(My Own Country)》라는 책을 추천했다. 병에 걸린 의사가 에이즈 환자를 치료하며 위로를 나눴던 실화를 바탕으로 쓰인 책이다. 직원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더불어 미국의 역사에 대해서도 공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직원들의 까다로운 안목은 서점이 중고 책을 사들이는 과정에도 반영된다. 스트랜드는 서점의 중고 도서 매입 방침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숫자와 상관없이 양질의 도서를 사고자 합니다. 우리는 여러 책을 구매하지만, 그 대상은 매우 선택적입니다. 때로는 당신이 판매하고 싶은 책의 절반 이상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세계 최대의 중고 서점이라면 어떤 책이든 수집할 것 같지만 실상은 다르다. 중고 책을 선별하는 열두 명의 직원은 서점의 기준에 맞는 책을 찾는 까다로운 검수 절차를 담당하고 있다. 스트랜드의 모든 책은 이 과정을 통과한 선택받은 책이다.

중고 책이 판매되는 과정을 보기 위해 한국에서 책을 가져갔다. 중고 책 카운터는 서점의 깊숙한 곳에 있다. 서점 매장에 있는 사람만큼 책을 팔기 위해 모인 사람도 많았다. 가져간 책들은 3달러에 팔렸다. 나의 손을 떠난 책은 한동안 정가의 절반 가격에 판매될 것이고, 더 많은 시간이 흐르면 1달러 팻말을 붙인 책 수레에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스트랜드에 책을 파는 사람들은 책의 가치가 판매 가격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18마일의 서점에 한 뼘을 더 보탰다는 자부심이 스트랜드에 책을 가져가게 만든다.
스트랜드에 중고 책을 판매했다. 18마일의 서점은 독자들과 함께 성장하고 있다.
스트랜드는 쉴 수 있는 공간이나 편리한 시스템과는 거리가 멀지만, 책을 읽고 싶은 독자에게는 이보다 더 친절할 수 없는 장소다. 스트랜드의 관심사는 책과 독자, 그리고 독자가 책을 발견하도록 돕는 직원이다. 서점의 본질에 맞지 않는 것이라면 타협하지 않겠다는 고집이 스트랜드를 뉴욕 문화의 터줏대감으로 만들었다. 뉴욕을 다니다 보면 스트랜드 로고가 새겨진 가방, 모자, 공책, 볼펜 등을 사용하고 있는 사람을 흔히 보게 된다. 이런 이유로 여행객 사이에서는 스트랜드 제품들이 뉴욕을 좀 아는 사람의 기념품으로 통하기도 한다. 뉴욕의 일상과 책을 잇는 18마일의 서점, 스트랜드는 지금도 자라고 있다.
스트랜드에서는 책뿐만 아니라 다양한 자체 제작 상품을 팔고 있다. 스트랜드의 로고가 담긴 제품들은 여행객에게도 인기가 높다.
 

우리 아직 여기 있어요; 아거시


뉴욕 최고의 번화가인 맨해튼 5번가에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록펠러 센터, 트럼프 타워와 같은 기념비적 건축물이 모여 있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센트럴 파크 등 뉴욕의 랜드마크가 된 공간들과 글로벌 명품 브랜드, 호화로운 럭셔리 호텔이 자리 잡은 화려한 거리다. 5번가에서 파크 애비뉴 방향으로 걷다 보면 화려한 거리와 어울리지 않는 낡은 간판이 보인다. 행인의 눈을 끄는 간판에는 “우리 아직 여기 있어요. 1925년부터(We're still Here. Since 1925)”라는 글이 쓰여 있다. 이 문구에 이끌려 뉴욕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인 아거시(Argosy)로 들어섰다.

아거시는 1925년 루이스 코헨(Louis Cohen)이 설립한 고서적 전문 서점이다. 코헨은 매디슨 서점의 서기로 일하며 중고 서적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 형편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돈이 생길 때마다 책 박람회에서 오래된 책을 모으는 수집가이기도 했다. 코헨은 21세가 되던 무렵, 친척에게 500달러를 빌려 아거시를 열었다.

코헨이 서점을 설립할 때만 해도 주변에는 다른 중고 서점이 많았다. 그러나 노후 건물이 재개발되고 고층 빌딩이 들어서며 치솟은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한 서점들이 쫓겨나기 시작했다. 아거시는 1950년에 서점 건물과 토지를 매입했기 때문에 문을 닫지 않았지만 크고 작은 위기를 겪어야 했다. 1963년에는 한 건설사가 40층 규모의 빌딩을 짓겠다며 집요하게 협상을 요청했다. 코헨이 “가격이 충분히 높지 않다”고 농담하며 그들의 제안을 거절한 덕에 아거시는 화려한 맨해튼 거리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점의 출입문에는 고서적, 한정판과 초판본, 고지도와 미술품을 판다는 설명이 적혀 있다. 아거시는 미국고서점협회(Antiquarian Booksellers Association of America)의 창립 멤버이자, 미국감정협회(Appraisers Association of America)의 회원이다. 단순히 오래된 중고 책을 파는 서점이 아니라, 진귀한 서적을 발굴하고 보존하는 공간이다. 서점 이름은 보물선으로 알려진 스페인 갤리온호에 실린 희귀한 보물을 뜻하는 단어에서 따왔다.[3] 보물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미국 문학 작품의 초판본, 희귀본, 사인본, 고지도와 미술품 등을 취급하는 고서의 박물관이기도 하다.
아거시에는 표지만 봐서는 어떤 책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래된 서적들이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만 꽂혀 있는 책장.
코헨은 명품 도서를 알아보는 안목을 인정받아, 국가 기관의 도서관을 담당하는 중책을 맡기도 했다. 코헨은 1960년대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Jacqueline Kennedy)와 함께 백악관 도서관(White House Americana Library)을 구성했고,[4] 빌 클린턴 대통령은 홍수 피해를 입은 뉴욕 채퍼콰(Chappaqua) 지역의 도서 복구를 맡기면서 아거시의 정기 고객이 됐다.[5] 아거시는 이스라엘 해양 연구 도서관과 바르일란(Bar-Ilan) 대학에도 수천 권의 히브리어 도서를 기증했고, 텍사스대학교와 캔자스대학교의 도서관을 만들기도 했다. 안목과 식견을 갖춘 책장을 만들고 싶은 세계의 기관이 아거시를 찾는다.

1991년 세상을 떠난 코헨을 대신해 현재는 그의 딸들이 서점 운영을 맡고 있다. 서점에서 초판본을 관장하는 첫째 딸 주디스는 “우리는 문화유산을 보호하는 사람들”이라며 “위험에 처해 있는 동시대 책들을 지키고 싶다”고 밝혔다.[6]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임대료를 자랑하는 거리에 아거시가 존재하는 이유를 이들의 사명에서 읽을 수 있다. 아거시는 인류의 지적 유산을 지켜 나가고 있다.

서점의 낡은 선반 위에는 오래된 책들이 정갈하게 꽂혀 있다. 수집 욕구를 자극하는 화려한 장식은 없다. 아거시는 고서적을 사치품이 아니라 그만한 가치가 있는 명품으로 다루고자 한다. 독자들도 시간이 만들어 낸 기품을 느끼며 진지한 태도로 서점에 들어서게 된다. 아거시가 소장하고 있는 책은 30만 권이 넘는다. 지하 1층부터 6층까지, 7층 규모의 서점에는 고서적과 미술품이 가득하다. 1층에는 문학, 철학, 예술 분야의 도서가 있고, 지하에는 음악, 종교, 과학, 요리, 건축 등 다양한 분야의 도서가 무려 4만 권이 넘게 있다.

2층은 미술품이 있는 갤러리인데, 뉴욕에서 가장 많은 종류의 종이가 있는 공간이라고 한다. 수십만 장의 고지도와 포스터, 그림들이 소장되어 있다. 5층에서는 19세기부터 출간된 각국의 역사책을 읽을 수 있고, 6층에는 유명 작가의 초판본과 사인본, 편지 등을 전시하고 있다. 한편 3층과 4층은 서점의 수장고가 있는 곳으로 일반 고객은 출입할 수 없다.

아거시는 보존할 가치가 있는 책을 찾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세상을 떠난 이들이 남긴 책장 전체를 구매하기도 한다.[7] 아거시의 직원들은 서재 앞에 서는 일에 대해 “자신의 지식과 재능을 시험받는 경험”이라고 말한다. 책의 가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엄청난 공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까다로운 검증 작업을 거쳐 아거시의 손에 들어온 책들은 맨해튼 서점의 3, 4층 또는 브루클린 지역에 있는 대형 창고로 이동한다. 아거시가 얼마나 많은 책을 가지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서점에 진열된 자료를 빼고도 도서관을 만들고도 남을 숫자의 명품 서적들이 아거시의 관리를 받고 있다.

이런 책들을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만지고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은 아거시의 가장 큰 장점이다. 아거시에서는 종이에 따라 페이지를 넘기는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활자 인쇄 방식으로 나온 책도 있고, 요즘 즐겨 쓰지 않는 전통적인 제본 방식으로 묶인 책도 있다. 내용만이 아니라 형식적인 부분에서도 책이 주는 즐거움이 있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다.

아거시에서는 책을 빨리 사야 할 이유가 없다.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여러 사람의 손을 타고 아거시로 건너온 책들에서는 풍부한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 다른 곳에서 접할 수 없는 책들이 있기에 독자는 아거시의 서재 사이에서 걸음을 늦출 수밖에 없다. 오히려 걷는 시간보다 멈춰서 책을 보는 데 쏟는 시간이 더 많다.

아거시는 오래된 책에서 떨어져 나온 표지와 내지를 낱장으로도 판매한다. 완전한 책은 아니지만 저자의 필체와 서명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아거시에서는 한 장의 종이도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다.
1860년대 발간된 신문이 주제별로 분류되어 있다.
오래된 책의 표지나 내지, 그림 등을 낱장으로 구매할 수 있다.

시간을 느낄 수 있는 장소


초록색 갓을 쓴 전등이 있는 따뜻한 공간. 타닥타닥 소리를 내는 타자기와 오래된 책들이 쌓인 서가. 아거시는 많은 이들의 상상 속 서점과 닮아 있다. 한국 시인의 시집을 건네자 사인본을 관장하는 코헨의 딸 나오미가 작가의 이름을 여러 차례 되묻고 받아썼다. 작가의 나이, 직업과 함께 그가 살았던 시대에 대해 묻기도 했다. 다른 하나는 미국 작가 E. B. 화이트(E. B White)의 수필집 《여기, 뉴욕(Here is New York)》의 한국어 번역본이었다. 나오미는 놀라워하면서 “그의 책이 얼마나 유명한지 아느냐”고 물었다. 《여기, 뉴욕》은 1948년 뉴욕 풍경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돋보이는 뉴욕의 스테디셀러다. 나오미는 “《여기, 뉴욕》의 외국어 번역본은 처음 본다”며 “특별한 손님들이 자주 오는 5층의 전시관에 보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서점을 여행할 때면 늘 한국에서 서점의 가치와 잘 맞는 책을 가져갔다. 책을 기부하거나 판매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서점 직원과 대화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해외 서점에 가면 한국 책이 거의 없거나, 있어도 오래된 자료라는 점이 아쉽기도 했다. 실제로 서점에서 준비한 책을 건네면서 직원들과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나오미는 서점을 여행하는 이유를 조금 더 묻더니 “고지도와 그림들을 보러 가자”며 승강기로 안내했다. 아거시의 수동식 승강기는 직원이 핸들을 돌려야 움직였다. 건물 전체가 마치 하나의 거대한 골동품처럼 느껴졌다.
나오미는 《여기, 뉴욕》의 한국어 번역본을 보고 반가워하며 서점의 전시실에 보관하겠다고 했다.
아거시에는 직원의 도움을 받아야 탑승할 수 있는 수동식 승강기가 있다.
갤러리에 들어서자 엄청난 양의 고지도와 지구본, 회화 작품과 포스터가 보였다. 뉴욕에서 가장 많은 종이 작품이 있다는 설명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서점에서 1500년대 지도가 전시된 모습을 보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나오미는 “일부 작품은 온라인 사이트에서도 구매할 수 있지만, 작품의 진가를 알려면 서점에 꼭 방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종이 질감과 두께와 같은 정보를 가까이서 확인할 수 있고, 공간과 그림이 어울리며 만들어 내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오미는 1947년 발간된 《예일 셰익스피어(Yale Shakespeare)》라는 책을 추천했다. 예일 대학에서 셰익스피어 문학을 해석한 책으로, 셰익스피어의 전기와 당대의 사회 환경, 예일 대학의 풍부한 해석이 담겨 있는 책이다. 그녀는 책 설명에 저자와 출간 당시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서점에서 책을 찾는 것은 자신에게 울림을 주는 문장들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오래된 서점에는 독자에게 깨달음을 주는 책이 그만큼 많고, 책을 읽는 행위를 더 풍요롭게 해주는 조예 깊은 직원들이 있다. 나오미와 대화를 나누며 한국에서 책을 가져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점 2층의 갤러리에는 고지도와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거시는 책을 파는 곳이기도 하지만 책의 가치를 감정하고 복원하는 곳이기도 하다. 코헨이 서점을 운영할 때부터 지금까지 수천 건의 작품들을 감정했다. 감정 비용으로 시간당 일정 금액을 받지만, 가치를 알아보기 위해 온 사람들에게는 무료로 상담을 해준다. 1000달러의 감정가를 확인받기 위해 300달러를 쓰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에서다. 고서 복원 전문가를 고용해 책 수리 서비스도 제공한다. 오래된 책들은 아거시에서 새로운 외피를 입고, 바인딩 작업을 거쳐 다시 태어난다. 아거시에 복원을 맡기면 얼룩이나 주름이 생기지 않게 하는 온도 조절 방법, 얇은 종이를 보강하기 위해 린넨을 덧대는 방법 등을 자세하게 설명해 준다. 단순히 책이나 서비스를 판매하는 곳이 아니라, 책의 가치를 이해하고 아끼는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다.

아거시에서는 어떤 욕구를 가진 독자라도 원하는 책을 발견할 수 있다. ‘풋 바이 북스(Foot by Books)’ 서비스를 이용하면 고객을 위한 맞춤형 서재를 기획해 준다. 책장에 꽂힐 책들은 작가나 주제는 물론 제본 방식이나 디자인, 종이, 서체, 발행 연도, 서명 유무 등을 고려해서 까다롭게 선정된다. 방대한 양의 책을 활용할 수 있는 서점만이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다.

주변 사람에게 좋은 책을 추천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아거시의 선물 추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선물을 받을 사람에 대한 정보를 알려  주면 예산과 취향에 맞춰 적합한 책을 골라준다. 실제로 아거시의 단골손님들은 선물 추천 서비스를 자주 이용한다고 한다. 아거시의 홈페이지에는 ‘상사에게 선물하고 싶은 150달러 안팎의 사진집’이나 ‘은사를 위한 100달러 내외의 역사책’ 등을 추천받은 고객들의 후기를 읽을 수 있다. 아거시는 책 추천 서비스가 매출에도 크게 기여한다고 말한다. 아거시의 고객들은 할인이나 포인트 제도보다, 아거시의 안목이 담긴 서비스에 더 많은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아거시에 대해 한 독자는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을 장소”라고 평가했다. 이것은 단순히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서점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9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아거시는 수많은 나이테를 두르고 있는 나무처럼 하루하루 무게감을 더해 간다. 아거시에서는 책을 통해 후대에 지식을 전하고자 했던 인류의 노력을 엿볼 수 있고, 그들의 역사를 지키려는 이들의 사명감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행위의 가치를 알아보는 독자들로 인해 아거시의 역사는 조금 더 두터워진다.
[1]
Ruth Brown, 〈Owner of NYC’s iconic Strand Books dies at 89〉, 《NEWYORK POST》, 2018. 1. 3.
[2]
Annie Correal, 〈Want to Work in 18 Miles of Books? First, the Quiz〉, 《New York Times》, 2016. 1. 15.
[3]
Stephanie Strom, 〈Louis Cohen, 87, Rarities Expert And Founder of Argosy Book Shop〉, 《New York Times》, 1991. 1. 6.
[4]
Stephanie Strom, 〈Louis Cohen, 87, Rarities Expert And Founder of Argosy Book Shop〉, 《New York Times》, 1991. 1. 6.
[5]
Janet Malcolm, 〈The Book Refuge - Three sisters keep a family business going〉, 《The Newyorker》, 2014. 1. 23.
[6]
Anthony Mason, 〈Welcome to Argosy Bookstore, Manhattan's hidden gem〉, 《CBS NEWS》, 2016. 8. 22.
[7]
Janet Malcolm, 〈The Book Refuge - Three sisters keep a family business going〉, 《The Newyorker》, 2014.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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