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 없는 삶
2화

노년이라는 집단 속 개인

4. ‘노년 문화’는 없다


앞에서 살펴본 노년기 일상의 재구성이나 평등주의 문화는 노년기에 대두되는 문화적 실천이라는 의미에서 ‘노년 문화’로 간주하는 것이 적절할까? 자세히 살펴보면 특정 활동을 재배치하며 일상을 재구성하는 것은 한국의 현 노년 세대의 경우 주로 도시에서 직장 생활을 마치고 은퇴한 노년 남성들에게만 해당하는 과제다. 오랫동안 가정에서 보살핌 노동을 담당해온 여성들은 노년에 접어들더라도 일상이 갑자기 달라져서 정체성이 흔들릴 일은 거의 없다. 또 직장을 다니던 여성도 퇴직하면 집 안에서 보살핌 노동 시간이 거의 줄어들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남편의 퇴직과 함께 외려 늘어나는 경우도 흔하다. 농촌에서 농사를 짓는 경우에는 대부분 젠더와 무관하게 나이가 들며 일을 점차 줄여 가는 방식으로 노년의 일상이 서서히 변화하기 때문에 갑자기 일상을 재구성할 필요를 느끼는 상황 자체가 드물다. 따라서 노년기 일상 재구성 사례들은 산업화된 사회의 노년의 삶에서는 널리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노년 전반의 문화로 일반화할 수는 없으며, 굳이 문화 개념을 차용하자면 도시에서 직장을 다니다 은퇴한 노년 남성들의 하위문화(subculture) 정도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일상의 재구성 측면에서 보면 노년은 다양성이 증대하는 시기다. 한국 사회의 경우 주로 여가 생활로 소일하는 소수의 여유로운 노년이 있는가 하면, 폐품 수거로 생계를 꾸리는 것처럼 경제적 필요성 때문에 일을 손에서 놓거나 원하는 방식으로 일상을 재구성할 여유가 없는 노년도 부지기수다. 나이 들어 시작한 운동이나 새로 시작한 공부, 혹은 자원봉사 활동이 일상의 중심이 되기도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일상을 재구성하기에는 체력이나 공부 습관이나 경제적 여유 등이 따라 주지 않는 경우들이 더 많을 것이다. 요컨대 노년으로 갈수록 다양한 영역에서 ‘위치성(positionality)’의 차이가 커지는 만큼 노년의 일상이 구성되는 방식도 다양해진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일하는 자아상’의 위기에 대응하는 일상의 재구조화는 은퇴의 경우에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일반 실직의 경우에도 비슷하게 나타나므로 이를 딱히 노년의 고유한 문화로 간주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

노년에 대두되고 있는 평등주의적 문화도 나이로 인해 발생하는 노년 문화로 간주하기에는 그 실천이 다른 변인들과 밀접히 관련돼 있으며, 그 확산이 제한적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가령 노년 사이의 평등주의적 실천은 계층적으로는 중하위의 사회·경제적 배경, 그중 특히 하위 계층의 노년들 사이에서 주로 형성된다. 사회·경제적 위상이 상대적으로 높은 노년들은 위상이 낮은 노년들과 같은 공간을 공유하거나 상호 작용하는 것 자체를 회피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노년 평등주의 문화의 핵심이 성취든 실패든 노년들 사이의 위상 차이가 드러나지 않도록 배려하는 실천이라면, 상위 계층 노년들은 외려 그 차이를 부각시키려는 ‘구별짓기’의 아비투스(habitus)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가령 최상위급 사회·경제적 배경을 가진 노년들이 거주하는 고급 ‘시니어타운’의 경우, 시설 내 식당에 갈 때에도 번듯하게 정장을 차려입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젠더 차원에서의 차이도 눈에 띈다. 노년 여성들은 사회·경제적으로 최상위에 위치하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다양한 사회적 장면에서 노년 남성들에 비해 더 쉽게 평등주의적 문화와 에토스를 구축해 나가는 경향을 보인다. 요컨대 노년 평등주의 문화는 나이라는 요인 이외에도 계층, 젠더와 같은 요인들과도 맞물려 있다.

노년의 평등주의 문화는 또 종묘 공원이나 노인 복지 센터와 같이 주로 노년들만 모여 있어 비노년 세대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공간에서 더 활성화되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비노년 세대가 함께 있어 언제든 자신들을 향한 비하의 시선과 마주할 수 있는 공간에서는 많은 노년들이 거꾸로 다양한 신분적 상징을 활용해 자신의 위상을 제고하려는 시도를 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렇듯 노년의 평등주의 문화가 주로 노년 차별적 시선으로부터 ‘안전한’ 공간에서만 발현된다는 사실은 이런 문화적 실천이 단순히 나이 듦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 노년이 주류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는 점을 보여 준다. 주류 사회로부터의 소외는 종종 “우리는 같은 배를 탔다”는 인식의 공유를 촉진한다. 종묘 공원이나 은퇴촌처럼 일반적으로 주류 사회로부터의 소외 정도가 심할수록 그 내부에서 평등주의의 강도가 높아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즉, 노년의 평등주의 문화 발현에는 계층과 젠더에 더해 주류 문화로부터의 소외라는 요인도 관여하고 있다. 요컨대 현재 한국 사회의 노년 사이에는 널리 일반화되어 있거나 고유한 문화현상으로서 ‘노년 문화’라는 두루뭉술한 범주로 포착될 만한 적절한 현상을 찾아보기 어렵다.

 

5. 노인이라는 정체성


노년의 삶을 둘러싼 문화적 층위에서의 공통점은 노년 세대 스스로가 상호 작용하며 구축한 문화에 있다기보다는, 열등한 타자로서의 노년 이미지가 핵심인 지배적 노년 담론의 위협과 맞닥뜨려야 한다는 ‘문화적 처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배적 노년 담론은 노년을 둘러싼 현실로서 공통적인 문화적 처지를 경험하게 한다. 노년이 어떤 문화적 처지에 처해 있는지를 살피는 작업은 지배 문화가 노년을 어떤 특성을 지닌 타자로 규정하는지, 또 그런 지배 문화의 시선과 맞닥뜨리면서 노년 주체들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어떤 압력, 혼란, 위축, 고통, 위기를 경험하는지 살피는 작업이다.

현재 한국 사회의 노년은 자신이 아직 ‘근대에 진입하지 못한 시대에 뒤처진 존재’, 혹은 “나 때는 말이야” 식의 ‘꼰대’, 혹은 ‘소외되고 갈 곳 없어 별 볼 일 없는 노인’ 등 이 시대의 열등한 타자로 간주되지는 않을까 하는 문화적 강박을 느끼게 하는 수많은 계기들을 일상에서 만나게 된다. 그런 만큼 이러한 노년 비하의 시선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실천도 널리 퍼져 있다. 가령 앞서 거론한 서울 구도심에 위치한 종묘 공원은 ‘갈 곳 없고 소외된 노인들의 해방구’라는 사회적 낙인으로 인해 자아감의 유지라는 측면에서는 특히 불리한 환경이다. 따라서 공원 방문자들 사이에는 외부의 비하적 시선에 대한 첨예한 의식이 존재하며 그만큼 특정한 방어적 태도가 널리 퍼져 있다. 예를 들어, 공원의 노년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물어보지 않아도, “난 여기 몇 달에 한 번이나 올까 말까 해,” 혹은 “난 친구하고 약속이 있어 왔지 보통 때는 안 와” 식의 얘기를 종종 듣게 된다. 종묘 공원에 머물다 보면 이렇게 사회적 낙인과 소외의 공간인 종묘 공원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려는 시도의 새로운 판본들을 끝없이 만난다.[1] 이런 의미에서 종묘 공원을 찾는 노년 남성들의 대개 ‘단정’하게 차려입은 복장도 자신들을 향한 외부의 비하적인 시선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일종의 ‘갑옷’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사회·경제적 위상이 상대적으로 높은 노년들도 노년을 향한 비노년 세대의 비하적 시선의 위협에 처해 있기는 마찬가지다. 상위 계층의 노년들은 노년을 향한 무작위적인 비하의 시선을 익명의 존재로서 감당해야 하는 공간에 홀로 노출되는 상황을 회피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자신들의 개인적 성취와 고유성이 열등한 타자로서의 ‘노인’이라는 범주에 묻혀 자신도 한낱 ‘노바디(nobody)’로 취급될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려는 선택이다. 피치 못하게 익명의 공간에 노출될 경우에는 앞서 소개한 것처럼 시니어타운에서 구내식당에 갈 때도 번듯한 정장을 차려입듯이 자신의 위상을 드러내는 상징들을 동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과거가 화려했던 노년일수록 노년에 들며 내가 바라보는 나와 외부에서 바라보는 나의 격차가 더 아프게 다가올 것이고 이로 인한 좌절감과 분노에 더 취약해지기 쉽다. 결국 노년 차별적 사회 속의 노년은 누구든 잠재적 비하와 무시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또한 이런 강박이 계급적 스펙트럼을 가로지른다는 사실은 노년이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열등한 타자로 간주되며 연령주의가 얼마나 널리 확산했는지를 보여 준다.

노년의 주변성이 심화된 연령주의 사회에서는 나이가 들었다는 사실이 정체성을 구성하는 우선적인 범주로 개인에게 강요된다. 개별적 주체의 정체성에 ‘나이’라는 요인이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노년이라는 문화적 범주가 노년의 개별적 정체감을 덮어 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 노년은 연령주의 이데올로기라는 상징 질서의 거울에 비친 자신을 정체성으로서 받아들이기를 강요받는다. 앞에서 다룬 일상의 재구성이나 노년의 정체감 유지를 위한 다양한 문화적 실천들은 타자화된 범주의 일원이 된 노년 주체들이 ‘보잘것없는 노년 자아’라는 이미지에서 안전거리를 확보하려는 의식적, 무의식적 욕망이 투영된 것이다.

퇴임한 대통령이나 재벌 회장 등 누구에게나 위상이 알려져 있는 극소수의 특권적 노년을 제외하고는 한국 사회의 노년 누구도 이러한 지배 문화의 차별적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노년을 이해할 때 중요한 과제는 개별 노년들의 문화적 실천에 ‘노년 문화’라는 공유된 상징 질서가 존재할 것이라고 상정하는 일이 아니라, 다양한 처지의 노년들이 자신을 향한 문화적 위협에 대응해 각기 어떠한 문화적 실천을 수행하는지, 또 그런 실천의 구체적 의미는 어떤 것인지를 드러내는 작업이 될 것이다.

 

6. 노년학의 역설적 과제


우리는 태어날 때는 서로 비슷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어 가며 여러 면에서 남들과 달라져 간다. 그렇기 때문에 노년에 관한 논의는 종종 어려움을 맞닥뜨린다. 노년은 인생의 어느 시기보다도 다양성이 커진 시기여서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노년의 현실을 일반화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노년’ 내부에는 나이에서 대략 30~40년의 차이가 존재한다. 혹은 나이가 비슷하더라도 건강, 성격, 은퇴 여부, 경제력, 직업, 가족 관계, 사회적 관계 등등의 수많은 조건에서 차이가 커진다. 이런 이유로 노년학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나이는 그 자체로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는 “무의미한 변수(empty variable)”[2]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특히 현 한국 사회의 노년은 폭넓은 연령대에 따른 나이 차이부터, 학력, 경제력, 취향, 건강 등에서 다른 어느 세대보다도 다양성이 큰 세대라 할 수 있다.[3] 이는 노년의 삶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설명할 때 다양한 변수들이 중층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밝히는 작업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게 보면 다양한 변인이 작동하면서 생기는 현상들을 미디어나 학계가 습관적으로 ‘노년’이라는 범주로 환원해 재현하고, 또 노년에 일반화된 ‘노년 문화’를 상정하는 것부터 문제 삼을 필요가 있다.

‘지방’이라는 범주든 ‘인종’이라는 범주든 ‘노년’이라는 범주든, 세상을 설명할 때 범주화를 피할 수는 없다. 관건은 그 개념적 범주가 설명하는 것은 무엇이고 가리는 것은 무엇인지를 살피는 것이다. 타자화된 범주 내부의 다양성은 항시 쉽게 부인되고 삭제된다. 65세 이상의 다양하고도 방대한 인구 집단을 노년이라는 단일한 범주로 환원하는 학문적 실천도 노년의 삶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돕기보다는 외려 노년 내부의 다양성을 가리고 노년에 대한 부정적 고정 관념만 강화할 위험이 크다.

이런 문화적 상황에서 노년학은 노년의 삶을 설명할 때 연령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서 나이는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는 무의미한 변수라는 것을 알리는 역할을 해야 한다. 노년을 어떤 고유한 본질을 지니는 타자로 보는 연령주의적 시선을 극복하면, 노년이 겪는 문제는 대부분 다른 여러 사회·문화적 요인들이 빚어내는 일종의 효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노년학은 역설적으로 노년학이라는 학문의 경계를 흐트러뜨리는 작업을 해야 한다. 이미 노년이라는 범주에 타자성이 집적된 현실에서, 타자화된 노년 이미지를 극복하는 것은 그 범주 자체를 교란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1]
정진웅, 《노년의 문화인류학》, 한울, 2012.
[2]
Bernice L. Neugarten, 〈Adult Personality: Towards a Psychology of the Life Cycle〉,  《Reading in General Psychology》, American Book Co., 1968.
[3]
필자가 대학에 입학하던 1975년에 대학 입학 학령 인구 중 대학에 진학한 인구의 비율은 채 5퍼센트가 안 되었다. 현재는 70퍼센트를 상회한다. 현 노년 세대는 초등학교도 못 다닌 사람도 많을 만큼 학력 배경도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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