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먼저 백신을 맞아야 할까
1화

어떤 선택이 윤리적인가

코로나19 중환자가 증가하는데 병실이 부족하다면


2020년 3월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하 코로나19) 판데믹을 선언한 이후, 현재까지 전 세계적인 확산세는 계속되고 있다. 호흡기 감염병인 코로나19는 환절기를 지나 겨울이 되면 더 심해진다. 2021년까지 잠잠해질 가능성은 없다. 안심할 수 없는 것이다.

2020년 11월 7일, 전 세계 누적 확진자 수가 5000만 명을 넘었다.[1] 5000만이라는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일 확진자 수와 일일 사망자 수가 감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2020년 11월 8일 기준, 일주일 평균 일일 확진자 수는 54만 9902명, 일일 사망자 수는 7759명이다(일주일 평균값을 보는 이유는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가 일주일 주기로 종형 곡선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2020년 11월 8일, 미국, 인도, 브라질 세 국가에서만 15만 9941명의 신규 확진자와 1114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코로나19는 전 세계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국내에서 성공적인 방역으로 확진자 수를 관리한다 해도 환자가 외국에서 유입될 가능성은 계속해서 존재한다.

코로나19 확산 초기, 감염을 줄이기 위해 여러 국가는 봉쇄(lockdown) 조치를 하고 해외 입국자를 대상으로 검역과 자가 격리 조치를 강화했다. 봉쇄는 전염을 차단하기 위한 방책이지만, 경제 활동을 심각하게 저해하는 부작용도 함께 가져온다. 봉쇄를 지속하면 경제에 어려움이 생기고, 봉쇄를 풀면 다시 코로나19가 확산하는 상황에서 아직 뾰족한 해결책은 나타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백신과 치료제 개발을 기다리고 있다.

2002년 발생했던 사스(SARS,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2015년 메르스(MERS, 중동호흡기증후군) 또한 변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었고 연구자들은 이미 코로나바이러스 백신 개발을 시도해 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뚜렷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으며 이는 코로나19도 마찬가지다. 백신은 건강한 사람에게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유사 항원을 주입하는 것으로, 몸은 이를 방어하는 항체를 만들어 낸다. 백신을 맞은 사람에게 감염원이 침투하면, 이미 생성된 항체가 작동하여 감염원을 조기에 차단하는 구조다. 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 항체는 오랫동안 지속하지 않으며, 이것이 백신 개발을 어렵게 하고 있다.[2]

코로나19에는 아직 뚜렷한 치료제가 없다. 현재 활용되고 있는 길리어드의 렘데시비르(Remdesivir)는 코로나바이러스의 RNA-의존성 RNA 중합 효소(RNA-dependent RNA polymerase)를 공격한다. 이 효소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세포에 침입하여 자신을 복제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으로, 이를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다면 코로나바이러스의 증식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렘데시비르는 기대한 만큼의 효과를 보이진 않았으나, 중증 코로나19 환자의 회복 기간을 감소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2020년 5월 램데시비르에 긴급 사용 승인(Emergency Use Authorization)을 내렸다.[3] 다른 대체재가 없는 상황이라 아직 연구가 진행 중인 약물의 사용을 승인한 것이다. 국내에도 렘데시비르가 도입되어 코로나19 중증 환자에게 사용되고 있지만, 치료에 큰 도움을 주지는 못하고 있다.

확진자 수 증가는 중증 환자도 함께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코로나19 치료에 효과적인 수단이 없다는 것은 중증 환자가 상당 기간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아야 함을 의미한다. 게다가 코로나19의 사망률은 70세 이상 고령자에서 급격히 증가한다(치명률은 60대 1.25퍼센트, 70대 7.15퍼센트, 80대 이상 20.44퍼센트).[4] 이미 다른 질병을 앓고 있을 가능성이 큰 노인층은 코로나19 증상만 치료할 수 없기 때문에 청소년이나 성인 환자와 다른 방식으로 치료해야 한다. 코로나19 중환자에게 주로 나타나는 증상이 호흡곤란이므로 인공호흡기 등의 장비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더불어, 코로나19 치료 과정에서는 다른 환자와 의료진의 감염을 차단해야 한다. 코로나19 중환자 치료를 위해 별도의 음압 병실이 필요한 것이다. 음압 병실은 병실의 음압을 유지해 바이러스가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는 구조다. 음압 병실에서 빠져나가는 공기는 기계 환기를 거쳐 병원균을 걸러 낸다. 2020년 5월 보건복지부의 발표에 의하면,[5] 전국 의료원을 대상으로 음압 병실 확충 사업을 시행한 결과 전국 244개 병실이 국가 지정 음압 격리 병실로 마련되었다.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니며, 여러 병원이 음압 병상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용한 음압 병실의 수는 훨씬 많다.

문제는 이 병실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2020년 11월 4일 기준 수도권 내 감염병 전담 병원 병상의 29.4퍼센트는 사용 중이다. 서울시의 중증 환자 전담 치료 병상은 총 53개 중 21개가 사용 중이다.[6] 8월에는 수도권 감염병 전담 병원의 병상 가동률이 76퍼센트를 기록하기도 했다.[7]

발생해선 안 되겠지만, 힘든 상황이 발생했음을 가정해 보자. 현 상황에서 중증 환자가 40명 발생했다. 32명은 바로 입원할 수 있다. 나머지 8명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더 큰 문제가 있다. 먼저 입원할 사람을 어떻게 고를까? 상태가 더 심한 순서대로일까? 나이가 많은, 또는 적은 순서대로일까?

다른 문제도 있다. 그토록 바라던 백신이 발표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국내 1차 반입분은 100만 명이 맞을 만큼밖에 확보되지 않았다. 100만 명이면 전체 인구의 50분의 1이다. 50명 중 한 명만 백신을 맞을 수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먼저 백신을 맞혀야 할까? 미래를 지키기 위해 어린아이부터 맞힐 것인가? 혹은 추첨을 통해 맞아야 할까?

여기에 바로 답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이런 상황 때문에 우리는 누구를 먼저 치료해야 할지 정하는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더 정확히는, 고민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내몰린다.

 

누구를 먼저 치료할 것인가


보건 의료의 모든 자원은 불충분하다. 의료인도, 치료 재료도, 의약품도, 심지어 병실까지도 모든 사람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킬 만큼 충분하지는 않다.

정부나 기관이 공동체에 의료 서비스를 공급할 때 공급량을 추산하려면 세 가지 축을 고려해야 한다. 첫째, 접근성(access)이다. 얼마나 많은 환자에게 의료 서비스를 공급할 것인가? 전국의 모든 환자에게 공급할지, 아니면 특정 지역에 있는 사람에게만 공급할지의 문제다. 둘째, 서비스의 질이다. 어떤 수준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것인지의 문제다. 현존하는 가장 비싼 약제와 가장 유명한 의료진부터 복제약과 갓 의과대학을 졸업한 신참 의사까지 선택지는 다양하다. 셋째, 비용이다. 정부가 의료 서비스를 공급하는 것이므로, 서비스 비용의 일부부터 전부까지 보장해 줄 필요가 있다. 세 축에서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다. 예컨대 영국은 접근성과 비용을 최대한으로 보장한다. 영국 NHS(National Health Service, 국민 보건 서비스)는 1948년 출범하면서 모든 거주민에게 무상으로 치료를 해주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최고의 치료를 모두에게 제공할 수는 없었기에 최선의 치료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했다.

문제는, 세계 대전 이후 전 세계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으며, 의료 기술과 약제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고, 비용도 엄청나게 상승했다는 것이다. 세 영역 모두를 다 최대한으로 보장할 수 있는 국가는 전 세계에 하나도 없다. 그러려면 세금 모두를 의료 영역에 투자해야 할지도 모른다. 세 개의 축, 접근성, 질, 비용을 보건 의료 철의 삼각(iron triangle of healthcare)이라고 부른다. 한쪽을 강조하면 다른 쪽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그런 명칭이 붙었다.

의료 서비스는 처음부터 누구에게 얼마만큼 제공해야 할지 따져 보고, 결정하는 것을 요구한다. 가용 의료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모든 환자를 다 치료할 방법은 없다. 어떤 환자를 먼저 치료하면 그동안 다른 환자의 상태가 악화될 수도 있다. 어떤 환자를 선택하더라도 치료받지 못하는 환자가 발생하기 때문에 의료 서비스에서의 선택은 언제나 비극적이다. 비극적인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다면, 적어도 타당하고 옳은 선택을 내릴 수는 있어야 한다.

미국의 정치 철학자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이 집필한 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로 인해 유명해진 실험이 있다. 1967년 철학자 필리파 풋(Philippa Foot)이 처음 제안한 ‘트롤리 딜레마’라는 사고 실험이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열차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고, 당신은 선로를 변경할 수 있다. 원래 선로에는 다섯 사람이 서 있고, 변경할 수 있는 다른 선로에는 한 사람이 서 있다. 열차의 선로를 변경할 것인가? ‘다섯 사람을 구하기 위해 한 사람을 죽일 것인가?’의 질문인 셈이다. 샌델 덕에 트롤리 딜레마는 공리주의와 의무론을 가르는 일종의 척도로 자리 잡았다. 공리주의, 의무론 등 이론을 살피기 전에 이 문제의 의료적 판본을 먼저 살펴보자. 제목은 ‘섬의 장기 이식 딜레마’다.

육지에서 조금 떨어진 섬이 있다. 관광객이 많이 찾고, 규모도 일정 수준 이상인 섬이라 상당한 시설을 갖춘 병원이 운영되고 있다. 바람이 심하게 불던 날, 관광객 대부분은 위험하기 때문에 관광 일정을 취소했다. 하지만 작은 배 하나가 낚시를 즐기기 위해 출항했고, 비를 동반한 바람 때문에 섬으로 복귀하던 배가 뒤집혀 승객 다섯 명이 크게 다쳤다. 바람은 점점 거세져 당장 육지로 건너갈 수는 없는 상황이다. 한편 병원에는 오토바이를 타다가 사고를 당한 환자가 입원해 있다. 환자는 뇌 손상으로 식물인간 상태며, 다른 가족은 없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우연으로, 오늘 다쳐서 온 환자 다섯 명은 각각 다른 장기 이식이 필요하다. 교통사고 환자가 죽으면 다섯 명을 살릴 수 있는 것이다. 어차피 회생 가능성이 없는데, 다섯 명을 살리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당신이 이 병원의 이식 외과 의사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트롤리 딜레마보다 좀 더 디테일을 살렸지만, 골조는 같다. 한 명을 희생해 다섯 명을 살려도 될까? 하지만, 설문 조사를 하면 트롤리 딜레마보다 섬의 장기 이식 딜레마에서 한 명을 희생해 다섯 명을 살리겠다는 사람이 훨씬 적다. 우리는 의학을 신성한 것으로 여기며, 의사는 환자를 살리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 의사가 다섯 명을 살리기 위해 다른 환자를 죽이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다. 하지만 똑같지는 않더라도 비슷한 일이 현실에서 벌어진다. 진료하는 상황에서 위와 비슷한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생기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를 살펴보자. 신부전 환자, 즉 신장 기능이 완전히 망가진 환자는 피에 노폐물이 계속 쌓여 곧 죽게 되기 때문에 피를 걸러 주는 혈액 투석 치료가 필요하다. 투석 장치는 1943년 나치 독일 점령하에 있던 네덜란드의 빌렘 콜프(Willem Kolff)가 발명했다. 전쟁이 끝난 뒤 장치가 전 세계에 알려지고 개량되기 시작했지만, 장치를 정맥에 직접 연결하던 초기 장치는 오래 사용하기가 어려웠다. 정맥이 금방 막혀서 주삿바늘을 꽂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1960년 워싱턴대학교의 벨딩 스크리브너(Belding Scribner)가 해결책을 내놓았다. 혈관을 연결하는 관을 설치하고, 주사를 관에 꽂는 방식이었다. 마침내 지속적인 혈액 투석을 통해 만성 신부전 환자의 생명을 유지할 방법이 생겼다. 하지만 기계는 몇 대 없었고, 환자는 너무 많았다. 1962년 미국에서 혈액 투석을 받을 수 있는 환자는 50명 중 한 명뿐이었다.

1962년 잡지 《라이프》에 기자 샤나 알렉산더(Shana Alexander)가 특종을 실었다. 스웨디시병원 시애틀 인공 신장 센터는 투석 대상자를 결정하기 위해 위원회를 운영하고 있었다. 외과 의사 한 명과 여섯 명의 익명 위원으로 구성돼 있었는데, 이들의 직업은 변호사, 목사, 은행원, 주부, 주 정부 공무원, 노조 위원장이었다. 이들은 환자 거주 지역, 직업, 종교, 교육 수준, 자녀의 수, 정서적 안정성을 환자 선택의 기준으로 삼았다. 기사는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위원회 구성도 문제라고 봤지만, 더 큰 쟁점은 환자 선택 기준이었다. 직업이나 교육 수준, 정서적 안정성이 투석을 받아 생명을 유지할지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타당한가?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으로 투석 대상자를 결정해야 할까?

의료 윤리, 그중에서도 의료 정의론(medical justice)의 관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할 수 있다. 의료 윤리는 상당히 범위가 넓은 분야로, 의료적 문제로 벌어지는 윤리적 갈등을 다루는 학문이다.[8] 여기에는 여러 영역이 있다. 우선, 병원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는 임상 윤리(clinical ethics)와 사람을 대상으로 한 의학 연구를 다루는 연구 윤리(research ethics)로 구분한다. 그 외에도 의과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전문 직업성(professionalism)과 관련된 주제들이 중요해진다. 여기에 나름 독립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영역으로 의료 정의론이 있다. 기존 정치 철학과 정의론이 살피던 내용을 의료적 문제에 적용하는 분야다.

의료 정의론은 차별 문제와 자원 분배 문제를 다룬다. 전자는 환자나 연구 참여자를 차별해선 안 된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하여, 차별처럼 보이는 어떤 행위는 사실 차별이 아니라서 용인될 수 있다거나, 반대로 무심코 해오던 일이 차별이라고 주장하게 된다. 후자가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논의를 다룬다. 의료 서비스는 불충분하며, 영원히 불충분할 것이다. 순간마다, 상황마다, 누구에게 먼저 줄 것인가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이때 의료 서비스를 순서대로 배정하기 위한 원칙을 제시하는 방법으로 경제학과 정치학이 있다. 경제학은 이득을 최대화하는 방법을 추구하며, 정치학은 다수의 합의나 상위의 정치적 기준에 호소하는 결정 방법을 추구한다. 이득을 최대화하는 것, 다수의 합의, 상위의 정치적 기준은 각각 윤리적, 정의론적 관점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의료 자원 분배의 원칙을 정하는 것은 결국 정의의 문제로 회귀한다.

이것은 의료인 개인 차원에서 시작하여 병·의원의 차원에서도 작동하며, 국가와 세계 수준에서도 문제가 된다. 수준별로 각각 살펴보자. 한 간호사가 동시에 심정지를 겪는 환자들을 앞에 두고 누구에게 먼저 심폐 소생술을 할지 고민한다면 개인, 미시 수준에서 자원 분배의 고민이다(간호사의 심폐 소생술이라는 제한된 의료 서비스를 어느 환자에게 제공할 것인가의 문제). 병원이 새 MRI(자기 공명 영상) 장비를 구입하여 영상 진단을 보강할지, 아니면 호스피스 병동에 투자해 말기 환자 돌봄 서비스를 확충할지 고민한다면 이것은 병·의원 차원, 중간 수준에서 자원 분배의 고민이다(병원이 각기 다른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의료 서비스 중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지의 문제). 국가가 효과가 다른 두 항암제를 놓고 어느 쪽에 보험 급여를 제공할 것인지를 고민한다면 국가 차원, 거시 수준에서 자원 분배의 고민이다(국가가 여러 의료 정책 중 어떤 것을 제공할 것인지의 문제).
의료 자원 분배 결정의 다양한 수준
수준 작동 영역 당면 문제 의사 결정
미시 환자-의료인 어떤 개인에게 자원을 분배할 것인가? 의료인
중간 전문가 단체, 병·의원, 보험사 자원 분배에 어떤 정책을 적용할 것인가? 관련 정책
거시 정부 어떤 정책을 세울 것인가? 관련 법
이런 다양한 수준의 결정 과정에는 원칙이 필요하다. 아무런 원칙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누군가가 생명을 살리고 죽이는 결정을 내린다면 우리는 그 결정을 따를 수 없다. 원칙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일단 세 가지만 짚자. 첫째, 원칙이 있어야 그 원칙이 타당한지, 아니면 문제가 있으므로 고쳐야 할지 논의할 수 있다. 원칙이 없다면 문제를 제기할 수도 없다. 둘째, 원칙이 있어야 공동체가 그 원칙을 놓고 합의하거나 다른 방향을 살펴볼 수 있다. 의료 서비스의 분배에 관한 결정은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것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어야 우리가 어떻게 서비스를 분배하는지 이해하고 여기에 합의할 수 있게 된다. 셋째, 원칙이 작동하는 방식을 살펴 현 상황을 개선할 방안을 찾을 수 있다. 원칙이 명확하지 않으면, 현 상황에서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어떤 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알기 어렵다. 현실 상황은 언제나 복잡하기 마련이며, 분석하기 위해서는 어떤 원칙에서 출발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우리가 살피고자 하는 원칙은 윤리적 원칙, 정의로운 원칙이다. 단 하나의 윤리, 단 하나의 정의만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에는 여러 윤리와 정의가 공존한다. 원칙 각각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이것이 어떻게 의료 현장에 적용되고 있는지 확인해 보자.

 

어떤 선택이 윤리적인가


의무론과 공리주의는 근대 윤리 이론을 양분하고 있다. 의무론은 독일의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가 주창한 것이다. 칸트에게 윤리란 정언 명령을 따르는 것, 즉 법칙을 수립할 수 있는 존엄한 인간이 모두에게 적용 가능한 법칙을 스스로 세워 따르는 것이 선을 행하는 일이라는 생각에 기초한다. 공리주의란 영국의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의 생각을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이 확장한 것으로, 흔히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표어로 일컬어지는 견해를 가리킨다.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은 행복을 가져오는 행위가 윤리적이라는 생각이 골자다. 의무론을 동기주의 윤리 이론, 공리주의를 결과주의 윤리 이론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전자는 행동의 동기를 중요하게 따지고, 후자는 행동의 결과를 살피기 때문이다.

행동을 윤리의 중심에 놓는 위 견해들을 비판하면서 행위자를 윤리의 중심에 놓는 덕윤리도 최근 주목을 받았다. 덕윤리에선 ‘어떤 행위가 윤리적인가?’ 대신 ‘어떤 사람이 윤리적인가?’를 묻고, 윤리적인 사람(덕 있는 사람, 동양에선 군자)이 할 만한 행동이 윤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이 이론은 의무론과 공리주의가 빠진 교착 상태를 극복하고 사람들에게 윤리적으로 행동할 동기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교육학과 연결점을 지닌다.

정의론에서도 큰 흐름은 비슷하다. 정의론에서 중요한 이론으로 제시되는 것은 공리주의, 계약주의, 자유지상주의, 공동체주의, 운 평등주의이다. 공리주의는 앞선 공리주의와 같고, 계약주의와 자유지상주의, 운 평등주의는 칸트적 의무론을 따르며, 공동체주의는 덕윤리에 기초한다. 이것이 자원 분배에서 어떤 주장으로 이어지는지, 이론을 중심으로 각각 살펴보자.

공리주의

공리주의는 분배에서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장한다. 더 많은 사람이 더 많은 행복을 누리는 방법으로 자원을 나누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때 행복의 양은 자원을 통해 개인이 경험하는 행복 또는 효용으로 계산한다. 어떤 사람에게 자원을 나눠 주었을 때 그 사람이 느끼는 행복감의 양을 살펴볼 수도 있으며, 그가 자원을 투자하거나 활용하여 얻는 이득의 양을 살펴볼 수도 있다. 즉, 단순히 누가 많이 가지는가를 놓고 싸우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인 경제학적 접근은 공리주의를 가정한다. 같은 비용이라면 더 많은 사람에게 더 큰 이득을 주는 선택을, 같은 이득이라면 더 적은 비용을 들이는 선택을 추구하는 것이 경제학의 기본이라면, 공리주의 또한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보건 경제학은 보건학적 개입, 즉 공중 보건의 향상을 위한 방법을 선택함에 있어 비용 대비 효과를 분석하는 방법을 오랫동안 발전시켜 왔다. 간단히 말해 같은 값으로 더 큰 효과를 나타내는 약품이나 치료법을 선택한다는 것인데, 효과는 보통 해당 약품이나 치료로 인해 연장된 수명을 계산한다. 한 사람을 기준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해당 질병의 이환율, 즉 인구 집단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특정 질병에 걸리는가를 같이 고려한다. 즉, 더 많은 환자가 더 많은 수명을(행복을) 최소 비용으로 획득하는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런 비용-효과 분석에 기초한 분배의 선택은 공리주의적이라고 볼 수 있다.

국민건강보험은 새로운 치료법이나 예방법, 재료, 약재 도입 여부를 결정함에 있어 비용-효과 분석을 기본으로 한다. 국민 다수에게 더 많은 효용을 누리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건강 보험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다분히 공리주의에 기초한 정책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으며, 국내에서는 오랫동안 이런 정의론적 관점이 의료에서 전부인 것처럼 여겨져 왔다.

공리주의는 간단해 보이지만, 행복을 어떻게 개량할 것인가를 놓고 이견이 있다. 당장 벤담은 개인의 쾌락을 중시했고, 밀은 행복을 중시했다. 현존하는 공리주의자로 가장 유명한 피터 싱어(Peter Singer)는 행복 대신 개인의 선호를 중시한다. 문제가 하나 더 있다. 공리주의는 행복의 총량을 계산하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조금씩 행복을 누리는 것보다는 소수의 사람이 큰 행복을 누리는 방식을 우선하게 된다. 사회 자원을 모두가 나눠 적은 생산을 만들어 내는 상황보다는 소수의 자본가에게 자원을 집중하여 사회 전체의 생산량을 극대화하는 방식을 선호한다는 의미다. 이를 비판한 것이 미국 정치 철학자 존 롤스(John Rawls)다.

계약주의

롤스의 이론은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데, 이 글에서는 계약주의로 부르고자 한다(평등주의적 자유주의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명칭이 길어 간단한 표현으로 대신했다). 그는 공리주의적 분배 방식을 비판하고 대신 최소 수혜자의 최대 이득이라는 원칙을 제시했다. 이 원칙은 롤스가 내놓은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이라는 사고 실험에 기반한다. 사람들이 모여 사회 제도와 정책을 결정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들에겐 제약 조건이 있다. 지금까지 학습한 지식은 가지고 있으나,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에 속하는 사람인지는 잊어버린 것이다. 이를 ‘무지의 베일’이라고 부른다.

롤스는 이런 상황에 있는 사람들은 공리주의적 정책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리주의는 소수의 이익이 극대화되는 상황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9] 무지의 베일 상태에서 사회 정책 결정에 임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사회 경제적 배경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 부자일 수도 있지만, 홈리스일 수도 있다. 롤스는 이들이 자신이 홈리스가 될 위험을 무릅쓰고 도박에 뛰어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회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가능한 한 자원을 평등하게 분배하는 방법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롤스의 정의론적 원칙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평등한 자유의 원칙. 모든 사람은 평등한 기본적 자유와 권리를 지닌다. 둘째, 차등의 원칙과 기회 균등의 원칙. 사회 경제적 불평등은 사회에서 가장 불리한 위치에 있는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의 이득이 가도록 하는 한에서 허용될 수 있으며, 공적 지위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열려 있어야 한다.

앞서 살폈던 투석 사례로 돌아가 보자. 스웨디시병원 시애틀 인공 신장 센터의 투석 대상자 결정이 논란이 되자, 미국 의회는 특별 위원회를 소집하여 이 문제를 논의했다. 당시 혈액 투석 환자 협회의 부회장이자 본인이 투석을 필요로 하는 환자였던 솁 글레이저(Shep Glazer)는 위원회에서 증언을 하면서, 투석을 받아야 하기에 직업도 잃어버린 자신은 그냥 죽어야 하느냐고 물었다. 닉슨 대통령은 1972년 수정 조항에 서명했고, 말기 신부전 환자의 투석 비용은 모두 국가가 부담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투석기를 도입하는 병원이 많아지면서 점차 투석을 받을 환자를 결정하는 위원회는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런 결정은 신부전 환자에게 큰 이득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혈액 투석을 받아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신부전 환자는 약자로서 기계에 의존하는 삶을 살고 있으며, 삶에 큰 제약을 받는다. 이들에게 이미 가해지고 있는 사회 경제적 불이익을 일소할 수는 없더라도, 최소화하는 방안을 선택하는 것은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의 이득을 부여하는 일이다. 계약주의적 관점이 의료 정책에 적용된 사례다.

롤스의 생각은 20세기 정치 철학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이론은 여전히 여러 분야에서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동시대의 철학자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은 롤스의 생각을 비판했다.

자유지상주의

롤스의 생각을 실현하려면 결국 정부가 부를 재분배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사회는 이미 불공정하게 자원을 분배하고 있으며, 시간이 갈수록 소수에게 더 많은 자원이 집중된다. 이런 상황에서 약자에게 그나마 자원을 가장 많이 제공하는 정책을 선택한다는 것은 정부의 상당한 개입을 요청하는 일이다.

노직은 그런 정부의 개입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개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권리다. 이 권리는 일반적으로 기본권이라고 불리는 인권, 행복 추구권, 평등권, 표현의 자유 등을 가리키지만, 노직이 보기에는 사유 재산권 또한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로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한 개인이 자원을 정당하게 취득했는지 여부다. 부정하게 얻은 자원이라면 교정해야 하지만, 정당하게 소유한 자원이라면 이를 재분배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만 보면 노직은 현재의 불평등을 강화하는 논리를 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가 정당한 소유에 방점을 찍고 있음을 면밀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상황을 떠올려 보자(노직은 하버드대학교 철학과 교수였다). 미국이 부를 쌓은 것은 신대륙을 원주민으로부터 강탈하고, 아프리카로부터 들여온 흑인 노예의 노동력을 통해서였다. 이렇게 얻은 이득을 정당한 소득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소유의 기원을 쫓으면 아메리카 대륙은 다시 원주민에게로 돌아가야 하고, 노예 노동으로 형성된 부는 원래 흑인의 것이다. 즉, 노직의 주장은 생각보다 훨씬 이상적이며, 현실에서 실현되기 어려워 보이기까지 한다. 실제로 의료 정책에서 자유지상주의가 적용된 사례는 찾기 어렵다.

운 평등주의

롤스와 노직의 논쟁은 1970년대의 일이었다. 노직은 그 자신이 저명한 학자로 자리매김했으나, 학파를 만드는 데엔 실패했다. 한편, 1990년대 들어 롤스의 생각을 비판한 일군의 학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롤스의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고 보지는 않는다.[10] 단, 롤스가 책임을 고려하지 않았기에 문제가 생긴다고 주장한다.

최소 수혜자의 위치에 처하게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경제적 문제로 한정한다면, 누군가는 나태하여 사업에 실패했기 때문이고, 다른 누군가는 천재지변으로 재산을 다 날렸기 때문이다. 이때 두 사람 모두 다 최소 수혜자이므로 동등하게 대우해야 하는가? 전자는 다분히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최소 수혜자의 위치를 갖게 되었고, 후자는 어쩔 수 없는 불운으로 인해 현 위치에 있다. 후자를 지원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전자를 지원하는 것은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도 든다.

사실 사람은 자신이 한 행위의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위험한 일을 하다가 사고를 당한다면(직업으로 인해 위험한 상황에 내몰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즐거움이나 다른 이유를 위해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면)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진다. 예컨대, 요트로 세계 일주를 하는 사람은 값비싼 보험을 드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개인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 윤리적 논의도 불가능해진다. 의무론은 스스로 법칙을 세우는 자로서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선택할 수 없는 자는 법칙을 세울 수도 없고, 그가 존엄성을 가지는지도 의문시된다. 만약 최소 수혜자의 최대 이득을 엄격하게 적용해 가장 약한 사람을 항상 사회가 보조, 지원한다면 이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 약자의 삶은 전적으로 국가의 통제에 놓이게 되고, 이들은 자유 의지를 행하기 어려워진다.

따라서 운 평등주의는 선택적 운과 맹목적 운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맹목적 운은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천재지변 같은 것으로, 이로 인해 발생한 피해는 사회가 최소 수혜자의 최대 이득에 따라 보전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선택적 운, 즉 개인이 선택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결과(예를 들면 도박)로 인하여 피해가 발생한다면 이를 보전하기는 어렵다.

운 평등주의는 논의의 역사가 무척 짧아서 아직 이론이 실제에 반영된 예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최근 보건 의료 정책에서 나오는 여러 논의는 사회적 보조와 개인의 책임을 조화시키는 방향을 추구하고 있다. 독일은 의료 보험 제도를 개혁하면서 정기적으로 건강 검진을 받는 사람에게 치료 비용을 덜 받는 정책을 채택했다. 정기 검진을 받는 사람은 그만큼 조기에 치료를 받아 전체적인 치료 비용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공동체주의

마지막으로 공동체주의를 살펴보자. 공동체주의도 롤스의 생각을 비판하면서 나왔다. 공동체주의는 롤스가 제시했던 원초적 입장이 현실에서 불가능하다는 점에 주목한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지 못한 채로 합의하는 상황은 상상에선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의 문제를 풀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공동체주의는 사람은 공동체를 이루며 산다는 당연한 사실에 주목한다. 개인은 고립되어 살 수 없으며, 그가 가진 이해와 판단은 공동체에서 학습하고 부여받은 것이다. 현실과 분리된 상황(롤스가 가정한 상황)에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 자신이 처한 공동체의 문제를 놓고 씨름한다. 이들에게는 공동의 목표가 주어지며, 함께 문제를 헤쳐 나가야 한다. 개인은 각자의 삶을 살지만, 전체의 문제를 놓고 공동의 선을 추구할 운명을 지고 있다.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 구성원 각자가 좋은 삶을 살기 위한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

공동체주의는 사회의 미덕을 중시하고, 전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동선에 호소한다. 자원을 분배하는 일에 있어서 공동체는 각 영역에서 자신의 미덕 또는 공동선을 확립하고 이에 따라 자원을 나눠야 한다. 공동체주의는 하나의 분배 방식이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구성원이 좋은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답을 찾아 나가야 하며, 그 과정에서 계속 수정해 나가는 것이 공동체주의가 추구하는 분배의 방식이 된다.

공동체주의적 결정은 이미 사회에 오랫동안 녹아 있기에, 여러 곳에서 실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참전 용사를 위해 운영하는 보훈 병원이 대표적으로 공동체주의적 의료 정책이다. 공동체를 위해 공헌한 노력에 따라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의론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의료 서비스는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분배의 원칙을 지니고 있다. 대표적으로 응급실을 살펴보자. 응급실에선 누가 먼저 치료를 받는가? 내원한 순서대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정확히는 아픈 순서대로다. 내가 치료받는 중이라도 저쪽에서 긴급 환자가 들어오면 응급실 의사는 그쪽으로 가야 한다. 응급실은 한국형 응급 환자 분류 도구(Korean Triage and Acuity Scale)를 사용해서 환자의 중증도, 즉 상태의 심각도를 구분하여 그에 맞는 대처를 한다. 심각한 환자를 우선 치료하는 것은 위 이론 중 계약주의와 롤스의 생각에 해당한다. 현재 심각한 상태인 환자가 병원에선 가장 약자다. 이들에게 의료 서비스와 자원을 먼저 공급하는 것은 최소 수혜자의 최대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즉, 응급실에서 중증도를 평가해 심각한 환자부터 먼저 치료하는 것은 롤스의 정의론에 따르면 정의로운 결정이며, 많은 사람이 여기에 동의할 것이다.

한편 추첨이 활용되는 경우도 있다. 2011년 개봉한 영화 〈컨테이젼〉은 전염 속도가 빠르고 치사율도 높은 감염병이 전 세계를 위협하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영화 막바지, 한 과학자의 자기희생적 노력으로 백신이 완성된다. 정부는 담화문을 발표하고, 추첨을 통해 백신 접종 순서를 결정하겠다고 말한다. 맞아야 할 사람은 많은데, 백신의 수는 한참 부족하기 때문이다. 실제 상황이라면 이런 식으로 우선순위를 결정하진 않는다(백신 우선순위는 아래에서 다시 살펴보자). 하지만 때로 추첨이 활용될 필요도 있다. 추첨은 위에서 살펴본 이론 중 자유지상주의, 노직의 생각에 가깝다. 선정 과정에 누구도 개입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 결과에 따른 분배는 전적으로 공정하다.[11]

재난 상황에서 우리는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노력한다. 한국을 뒤흔들었던 참사들, 삼풍백화점 붕괴나 세월호 침몰 사고에서는 누구를 살리는가보다 한 명이라도 더 살리는 것이 중요했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관점이다. 공리주의와 계약주의 모두 이 생각을 지지한다. 더 많은 생명을 살리는 것은 공리주의적이다. 생명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고 보는 것은 계약주의의 근간인 의무론의 기본 바탕이다. 단, 이런 방법은 재난 상황에만 한정된다. 병원 근처에서 20중 추돌 사고가 벌어져 수십 명의 사상자가 동시에 응급실에 몰려든다면, 더 위중한 사람을 구분하기는커녕 한 사람이라도 더 치료하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의료 자원 분배 상황은 재난적이지는 않고, 어떤 환자를 우선할지 고려할 시간 정도는 주어진다. 비록 비극적인 선택일지라도 말이다. 단순히 더 많은 생명을 구하는 것을 분배 결정 방법으로 선택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은 이유다. 이는 뒤에서 살필 코로나19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진이나 태풍 등 재난 상황에서 긴급 치료 물자를 정부 필수 인력과 의료진에게 먼저 공급하는 결정은 공동체를 유지, 더 많은 생명을 살리기 위한 응급조치다. 사회적 효용을 위해 특정 집단을 우선하는 것은 공동체주의적 결정이라고 볼 수 있다.
[1]
그리니치 표준 시간 기준. 〈Covid-19 Coronavirus Pandemic〉, Worldometer, 2020. 11. 9.
[2]
김민수, 〈코로나19 사태 반년 ‘풀리지 않는 5가지 미스터리’〉, 《동아사이언스》, 2020. 7. 6.
[3]
약학정보원 학술정보센터, 〈렘데시비르와 COVID-19〉, 《팜리뷰》, 2020. 5. 11.
[4]
11월 7일 기준. 중앙방역대책본부 대응관리팀,〈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국내 발생 현황〉, 보건복지부, 2020. 11. 7.
[5]
자원관리과, 〈코로나19 등 대비 음압병실 83개 확충〉, 보건복지부, 2020. 5. 29.
[8]
한국에서 ‘윤리’라는 분야가 일반적으로 의미하는 것처럼, 의사가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학문이 아니다.
[9]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나, 논의를 간단하게 하기 위해 그렇다고 가정하자.
[10]
물론, 이 견해를 지닌 학자들이 하나의 관점을 공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에는 다소 어폐가 있다. 그러나 현재의 논의에선 이렇게 정의해도 충분할 것이다.
[11]
물론 추첨도 조작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가능성은 일단 배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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