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유유서.” 정세균 전 국무총리가 이준석 국민의힘 당 대표 후보를 겨냥했던 일침입니다. 장유유서는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차례가 있다는 뜻이죠. 유교 경전인 《삼강오륜》에 나오는 말입니다. 《삼강오륜》의 삼강 가운덴 부위부강이 있습니다. 오륜 가운덴 부부유별도 있죠. 아내는 남편을 섬겨야 한다. 부부 사이에는 구별이 있어야 한다. 지독하게 시대착오적이죠. 정 전 총리는 장관직 여성할당제를 제도화한 문재인 정부의 두 번째 총리입니다. 자타공인 차기 대권 주자죠. 그런데 야당의 36세 당 대표 후보한테 삼강오륜을 가르친 겁니다. 지독하게 시대착오적이죠. 정세균 전 총리는 장유유서 발언이 악마의 편집이라고 해명했습니다. 그렇지만 지난 5월 31일엔 이런 발언까지 나왔습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 이준석 후보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국민의힘에 입당하면 여당의 네거티브 공격을 앞장서 막아 주겠다고 말했죠. 이걸 구태의연하다고 비판하는 과정에서 또 다시 구태의연한 비유가 나와 버린 겁니다. 이쯤 되면, 실수일까요.
사실 정세균 전 총리의 진짜 실수는 따로 있습니다. 이준석 현상의 본질을 착각했다는 점입니다. 이준석이라는 정치인의 시대정신을 부지불식중에 나이와 세대의 문제로만 국한시킨 것이죠. 이준석 돌풍은 이미 이준석 현상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입니다. 일단 국민의힘 당 대표 예비경선을 1위로
통과했죠. 이후 이뤄진 각종 여론 조사에서도 압도적인 1등을 달리고
있습니다. 이준석 후보 본인도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고 고백할 정도로 민심이 요동치고
있습니다. 당심 70퍼센트에 민심 30퍼센트로 치러지는 본선 룰이 유일한 변수입니다. 역시 민심이 요동치니 이젠 당심도 심상치가 않습니다. 국민의힘 내부는 이미 무엇을 상상해도 그 이상일 수 있다고 각오한 분위기입니다. 6월 11일 치러질 국민의힘 당 대표 선거에서 정말로 30대 보수 야당 당수가 등장할 수도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도 여야의 중진 정치인들 모두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준석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합니다. 정세균 전 총리의 장유유서 발언이 대표적이죠. 이준석의 나이만 본 겁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데 말입니다.
여도 야도 이준석을 모른다
그건 같은 당 나경원 전 원내대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경원 전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당 대표 선거전에서 이준석에 이어 2위를 달리고 있죠. 나경원 후보는 이준석 후보가 유승민계라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계파 프레임입니다. “유승민 전 의원만 국민의힘 대선 경선 열차에 태우고 그냥 떠나는 거 아니냐는 우려가 많이 있다.” 이렇게 주장하죠. 나경원 후보는 이번 국민의힘 당 대표 선거를 차기 대선 관리자 선거로 정의합니다. 그래서 계파에서 자유로운 자신이야말로 대선 관리의 적임자라는 논리죠. 보수 야당이 계파 정치로 파산한 건 사실입니다. 이명박근혜 정부에서 기인한 친이 친박 계파 정치가 박근혜 탄핵과 맞물려서 보수 야당의 몰락으로 이어졌죠. 정작 나경원 후보는 계파 청산이 아니라 계파 중립을 외치고 있습니다. 야당의 차기 대권 경쟁을 계파 경쟁으로 전제한 거죠. 그러면서 계파 청산을 주장하고 있는 이준석 후보를 특정 계파라고 비판하고 있는 겁니다. 솔직히 소위 유승민계가 계파로서의 실체가 없는 건 정치권에선 다 아는 사실인데도 말입니다. 급기야 유승민 전 의원도 나섰죠. 나경원 후보의 공격을 “저에 대한 모욕이고 젊은 정치인에 대한 모욕”이라고
일축했죠.
결과적으로 나경원 후보는 이준석 현상을 계파 프레임에 가두려다가 스스로가 계파주의자가 돼버렸습니다. 이번 보수 야당 당권 선거의 의미를 계파 관리자이자 대선 관리자 선거 정도로 축소시켜 버렸죠. 엄밀히 따지면 당 대표가 대선 관리자라는 논리도 말이 안 됩니다. 국민의힘 당헌 당규에 따르면 대통령 후보는 대통령 선거일까지 당무 전반의 권한을 갖게 돼 있거든요. 대선 후보가 사실상의 당 대표 역할을 하게 된단
말입니다. 나경원 후보의 이준석 후보에 대한 공격은 이렇게 변죽만 울리는 격입니다. 3선의 관록 있는 정치인 나경원 후보조차 시대가 왜 이준석을 요구하고 있는지는 그다지 돌아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준비된 이준석한텐 당할 자가 없다
“그 남자에게서 히틀러의 향기가 난다.” 박진영 더불어민주당 전 상근 부대변인은 페이스북에서 이준석 후보를 비판하면서 히틀러에
비유했습니다. 매우 거친 비유입니다. 그래도 나경원 후보나 정세균 전 총리에 비하면 이준석 현상의 본질에는 더 가깝습니다. 박진영 부대변인은 “이준석의 논리를 보면 사회적 약자나 소수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고 썼습니다. 이준석 현상의 본질이 경쟁주의라는 걸 꿰뚫어 보고 있는 겁니다. 이준석 현상의 약점이 과도한 경쟁주의라는 것도 내다보고 있죠. 《삼강오륜》보다야 훨씬 시대정합적인 비판입니다. 문제는 이준석 후보가 이미 이런 비판에 대비가 돼 있다는 점입니다. 이준석 후보는 이렇게 곧바로 맞받아쳤죠. “히틀러 같은 파시스트는 공정한 경쟁 같은 것을 언급 안 한다.” 스스로를 공정한 경쟁주의자라고 정의한 겁니다. 덧붙였죠. “젊은 사람이 정치하려면 부모님 화교설은 기본이고 히틀러 소리까지 겪어야 한다. 그걸 뚫고 나면 장유유서에 동방예의지국, 벼는 고개를 숙인다는 소리까지 있다.” 말 나온 김에 모두 까기를 해버린 겁니다.
정치권과 방송가에선 말싸움과 논리 싸움에서만큼은 이준석의 초식을 이길 자가 별로 없다는 게 이미 일반 상식입니다. 초선뿐만 아닙니다. 중진도 방송 토론에서 이준석과 맞붙기를 꺼려합니다. 이준석 현상은 이준석이란 그릇에 국민의 여망이 모인 시대정신이 담겨서 벌어진 정치적 이벤트입니다. 바꿔 말하면 이준석이란 그릇이 시대정신을 온전히 담아낼 준비가 덜 돼 있으면 결코 완성되지 못합니다. 과거 안철수 현상이 그랬죠. 찰나였지만 반기문 현상도 그랬습니다. 반면에 이준석 후보는 이준석 현상을 담아낼 준비가 돼 있어 보입니다. 자기 논리가 튼튼하고 그걸 눈에 보이게 말할 줄 아는 이준석 후보의 종특만 봐도 알 수 있죠. 박진영 대변인의 과도한 경쟁주의자 프레임에 공정한 경쟁주의자 프레임으로 곧바로 맞서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만반의 준비가 돼 있단 말입니다.
이준석 후보가 2019년 6월에 출간한 책이 한 권 있습니다. 0선 정치인의 정치 책이라 출간 당시에는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죠. 심지어 출간 직후엔 이른바 조국 사태가 터져서 완전히 묻혀 버렸죠. 살펴보면 당 대표 선거 과정에서 이준석 후보가 내세우는 주장과 정책의 논리가 모두 이 책 안에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도 거침이 없는 것이죠. 준비된 후보인 겁니다. 책의 부제는 이렇습니다. “대한민국 보수의 가치와 미래를 묻다.” 책의 제목은 이렇습니다.
《공정한 경쟁》. 정치인 이준석은 진작부터 스스로를 공정한 경쟁주의자로 정의한 겁니다. 바로 이것이 상대당의 대선 후보도 같은 당의 당권 후보도 완전히 놓쳐 버린 부분인 거죠. 이준석 현상의 본질은 세대교체도 계파 교체도 아닙니다. 시대 교체입니다.
예외 없이 경쟁해야 공정한 경쟁이다
당권 경쟁에서 이준석 후보를 상징하는 공약은 공천 자격 시험제입니다. 국민의힘에서 공직 후보자가 되려면 능력 시험을 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준석 후보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젊은 세대는 9급 공무원에 임용되려고 수년 동안 수험 기간을 거치는데 우리 당도 그에 준하는 노력을 보여 줘야 한다.” 정치권을 통해 어쩌다 공무원이 된 어공들도 공무원 시험을 통해 공무원이 된 청년 세대와 똑같이 경쟁해야 공정하다는 말입니다. 기성세대한텐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청년 세대 입장에선 빈틈없이 공정한 논리입니다. 2030세대들이 이준석 후보한테 열광할 수 밖에 없는 이유죠. 이준석 후보는 주요 당직도 공개 경쟁으로 선발하자고 주장합니다. 토론 대회를 열고 정책 공모전을 개최하자는 거죠. 정치 오디션을 하자는 얘깁니다.
당직이야말로 연공서열과 계파 정치의 소유물입니다. 여의도 정치는 결국 내 사람과 네 사람을 당직에 꽂아 주고 밀어주고 나눠 주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이준석 후보의 공약들은 하나같이 여의도 정치의 관행을 파괴하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청년 세대를 경쟁을 내면화한 오디션 세대로 만든 건 다름 아니라 기성세대입니다. 이준석 현상은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와서 나를 제발 ‘픽미’ 해달라고 심사 위원들 앞에서 경쟁하던 2030 MZ세대들이 이젠 거꾸로 당신들은 왜 경쟁하지 않느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시대적 질문인 겁니다. 제1야당이라고는 하지만 국민의힘 당 대표 선거도 결국엔 당직자 선거입니다. 내각제도 아닌 상황에서 야당 당권 선거에 이렇게나 관심이 쏠리는 건 참 이례적이죠. 2030세대가 이번 선거를 당권 선거 이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보수 야당에 시대적 질문을 하고 있는 겁니다. 기성세대는 무슨 자격으로 경쟁에서 예외인 것이냐는 필연적인 물음인 거죠. 나아가서 보수 야당이 집권 여당보다 먼저 경쟁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이준석 후보는 호남할당제나 여성할당제에 대해서도 비판적입니다. 이준석 후보한테 할당제는 어떤 식으로든 공정한 경쟁을 왜곡시킬 수 있는 제도입니다. 《공정한 경쟁》에선 이렇게 말하죠. “약자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보증을 공정한 경쟁이라고 하지만 실은 그것이 심각한 불공정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이준석 후보는 시장주의자입니다. 시장 안에서 공정한 경쟁이 이뤄지면 합리적 결과로 이어진다고 믿죠. 당연히 이준석 후보는 자유주의자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자유라고 봐요. 공정은 그 위에서 하는 달리기 게임입니다. 저는 자유의 가치가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준석 후보가 호남할당제 대신에 석폐율제를 도입하자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험지에 출마했다 낙선한 후보들의 득표율을 당의 비례대표 선출 과정에서 고려해야 한다는 얘깁니다. 이준석 후보는 그래야 공정하다고 보는 겁니다. 분명한 건 이런 이준석식 공정의 잣대가 MZ세대의 기준에 부합한다는 사실입니다.
불공정한 정부가 공정한 시장을 만들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