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의 조건, 도전 정신
1화

특별하지 않은 시작

백조 목 플라스크 실험, 저온 살균법, 백신 개발. 이 모든 업적을 이뤄 낸 과학자 파스퇴르. 그는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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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술을 좋아하고 화학을 공부하던 학생


미생물학과 백신학의 위대한 과학자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1895)는 프랑스 동부의 작은 마을에서 평범한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파스퇴르가 태어난 1822년은 나폴레옹의 집권이 종말을 맞고 중남미, 아프리카의 식민지들이 독립하는 등 유럽 전체가 격변의 시기를 지나던 때였다. 과학은 여전히 대중의 관심에서 멀었지만,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나 앙드레마리 앙페르(André-Marie Ampère)의 전류 이론 등 현대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준 과학적 업적들이 이뤄지던 시기기도 했다. 여느 동네 친구들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유년기를 보낸 파스퇴르는 진지하고 모범적인 소년이었다. 어린 시절의 기록에 그는 영리하고 우수한 학생이라는 평가보다는 부지런하고 성실한 학생으로 서술돼 있으며 가족, 특히 나폴레옹 시절 군인이었던 아버지의 꿈에 부합하기 위해 일찍부터 학자에 대한 꿈을 품었다고 한다. 대학에서의 기록에 따르면 한 교수는 그가 유능한 교수가 될 소양이 충분하다고 평가했다. 결국 프랑스의 이 성실한 시골 소년은 미생물학의 선구자로서 백신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겨 누구나 경외하는 과학자가 됐고, 인류 건강에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된다.

사실 파스퇴르가 어려서부터 과학자만을 꿈꾼 것은 아니었다. 그는 청소년 시절까지 학문만큼이나 미술에도 뛰어난 재주를 보였는데, 젊은 교수 시절에는 당대의 유명한 화가들로부터 과학자가 아니었다면 프랑스를 대표하는 화가가 됐을 것이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파스퇴르의 미술에 관한 재주는 그의 인생에서 예술 활동 자체로 드러나기보다는 과학자에게 필요한 재능의 하나인 관찰력과 집중력을 함양하는 데 기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성인이 된 파스퇴르는 당시 프랑스에서 유능한 과학자나 교수가 되기 위한 최고의 등용문인 파리고등사범학교(École Normale Supérieure)에 입학했고 이곳에서 당대 최고 수준의 학문을 연마했다. 그런데 고집스럽고 경쟁심이 강했던 파스퇴르는 스무 살 때 16등으로 합격한 입학 성적에 만족하지 못해서 진학을 미루고 1년 후에 다시 시험을 치러 5등으로 재입학했다. 파스퇴르는 대학의 학위 과정 동안 화학과 물리학을 전공해 우등으로 졸업하고 젊은 교수가 되어 연구를 이어갔다. 이후 그는 상대적으로 새로운 이론들이 많이 등장하던 생물학으로 점진적으로 전공을 전환해 순수 과학과 응용 과학을 아우르는 다양한 분야의 연구를 했다. 화학과 물리학을 연구하던 초기에는 주석산결정(crystal)의 성질에 관한 이론적 연구를 했다. 이러한 활동은 미생물부터 백신에 관한 임상 연구까지 종합적이고 다양한 업적을 이루는 데 사용된 치밀하고 탄탄한 지식과 연구 방법의 근본이 됐다.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 파스퇴르가 박사 학위 과정 동안 연구한 주제는 당시 크게 유행하던 결정학(crystallography)이었다. 주석산염 결정(tartrate crystal)을 대상으로 새로운 광학적 이성체 분석법과 해석을 제시한 20대 중반의 젊은 파스퇴르는 저명한 화학자였던 장 바티스트 비오(Jean Baptiste Biot)의 칭송을 받았을 만큼 학위 과정 때부터 우수성을 드러냈다. 박사 학위를 받은 파스퇴르는 졸업 후 스트라스부르대학교(Université de Strasbourg)의 화학과 교수로 임용되어 연구자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는데 이때 소속 대학교 총장의 딸인 마리 로랑(Marie Laurent)을 소개받아 결혼했다. 젊고 고독한 과학자의 길을 시작하는 파스퇴르의 배우자가 된 마리 파스퇴르는 이후로 루이 파스퇴르의 연구적 고뇌를 나누고 가정의 재정적 부담을 담당하며 평생의 동반자로서 함께했다. 또한 파스퇴르의 연구와 업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바이러스의 약독화에 대한 파스퇴르의 해설을 기록하는 등 수많은 역할을 했다. 마리 파스퇴르와 루이 파스퇴르는 그들 주변의 많은 지인으로부터 비할 데 없는 친구이자 세상 누구보다 확실한 최상의 협력자로 표현되곤 했다.

 

2. 생명의 기원과 백조의 목


스트라스부르에서의 연구가 늘 성공적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 시절 파스퇴르는 많은 새로운 시도를 했다. 파스퇴르는 결정학을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생물학적 현상을 근거로 한 화학적 분별법을 이용해 현미경으로 쉽고 빠르게 주석산염의 결정을 분리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했다. 이 연구는 화학자 파스퇴르가 최초로 생물학의 세계로 들어선 행위였다. 1857년 파스퇴르는 곰팡이의 성장과 주석산 용액의 광학적 이성체의 특성 사이에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이용해 곰팡이를 이용한 광학적 이성질체의 분리 방법을 고안했는데, 이때부터 파스퇴르의 생각은 결정학이라는 화학 분야에서 생명이라는 새로운 대상으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다. 이 당시 파스퇴르는 수많은 증명 실험을 하면서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만 온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곤 했다고 한다.

이러한 연구 업적에도 불구하고 스트라스부르에서 연구했던 시기는 파스퇴르에게 어렵고 힘든 때였다. 실험 장비와 재료를 사비로 조달해야 하는 팍팍한 생활 때문에 파스퇴르는 30대 초반이었던 1854년에 프랑스 북부의 릴대학교(Université de Lille) 화학과 학장으로 이직했다. 릴의 대학에서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순수한 학문적 연구를 수행하는 것뿐만 아니라 연구의 결과물을 릴 지역의 산업적 수요에 응용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발전시켜야 했다. 이로 인해 파스퇴르는 이전까지 순수한 과학적 탐구에만 몰두하던 학자에서 지역 산업의 발전에 기여할 방법을 고안해 내는 개발자로서의 역할에도 흥미를 갖게 된다. 이 시절 파스퇴르는 순수 과학과 응용 과학 간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정리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며 “서로 다른 두 개의 과학이 있는 것이 아니고, 과학이 있고 과학의 응용이 있는 것이다”라고 역설했다. 파스퇴르는 릴에서 당시 그 지역의 주요 산업 중 하나였던 알코올 발효에 대한 지식 축적과 문제점 해결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이런 새로운 관심은 이후 맥주 제조, 포도주 저장, 백신 개발 등에 관한 연구로 발전한다. 릴에서 알코올 발효 문제를 처음 접한 파스퇴르는 공장에서 발효 중인 시료를 실험실로 가져와 관찰하고 실험하면서 발효가 단순히 화학적 반응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 활동과 연관된 현상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파스퇴르는 발효 용액을 현미경으로 관찰해서 효모 외에 작은 구조체들을 발견하고 이 구조체들 역시 살아 있는 유기체임을 알아냈는데, 이들은 특성이나 반응이 효모와는 상당히 달랐다. 혼합물 속의 유기물 구조체는 세균이었다. 파스퇴르는 이 세균과 효모의 상관관계에 따라 발효 산물의 맛이나 향이 달라지는 현상에 대해 지속적으로 분석했다. 이를 통해 이후 알코올 발효 공업 공정을 보다 효과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지식과 방법을 제공했으며, 발효 연구에서 얻은 이 시기의 업적은 향후 미생물학과 미생물 이용 산업의 기초가 됐다. 그가 발표한 〈젖산 발효에 대한 보고〉라는 논문이 나온 연도는 100년 후인 1957년에 과학과 기술의 신기원이 열린 해로 지정됐을 만큼 미생물학의 위대한 족적으로 알려져 있다.

파스퇴르는 1857년 모교인 파리고등사범학교의 부책임자로 옮겨 갔다. 이곳에서 발효와 효모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던 중에 그는 생명의 ‘자연 발생(spontaneous generation)’ 이론에 관한 연구로 관심사를 확장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이어져 온 자연 발생설의 모순을 입증하기 위해 수많은 플라스크 속의 물질들을 관찰하면서 길고 긴 시간을 보냈다. 파스퇴르가 작은 실험실에서 평범한 플라스크들을 이용해 연구했다는 사실은 풍부한 시설과 장비가 위대한 과학적 성과를 담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파스퇴르가 미생물 연구에 매진하면서부터 줄곧 그의 생각을 붙잡고 있던 의문은 바로 생명의 ‘자연 발생설’이었다. 포도가 포도주로 발효되는 것, 포도주가 식초로 바뀌는 것, 고기나 음식이 부패하는 것 등이 미생물 때문에 발생한다면, ‘이 미생물은 과연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라는 문제였다. 유럽에서는 오랫동안 생명, 부패, 미생물에 관해 생명이 없는 물질에서 자연적으로 어느 순간에 생명체가 생기게 된다는 자연 발생설을 믿어 왔다. 하지만 1800년대 중반을 지나던 격변의 시기에 유럽의 많은 과학자와 철학자들은 자연 발생설을 부인하고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은 유사한 종류의 다른 생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루돌프 피르호(Rudolf Virchow)의 “세포에서만 세포가 생긴다(omnis cellula e cellula)”라는 기술로 대표되는 이 사상은 실험적 증명은 없었으나 적어도 수적으로는 자연 발생설에 뒤지지 않는 지지자가 있었을 만큼 대중적인 생각으로 자리 잡았다. 파스퇴르도 당시의 이 격렬한 논쟁에 뛰어들었다. 파스퇴르가 애초부터 자연 발생설에 대해 한쪽의 편견을 가지고 연구와 실험에 임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적어도 자신의 비상한 실험 능력을 동원해 자연 발생설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고자 하는 데 열정적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파스퇴르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도한 수많은 실험의 내용을 다 모은다면 아마도 백과사전 정도의 분량이 나올 것이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일명 ‘백조 목 플라스크(swan-neck flask)’라는 장치로 알려진 살균 배양액에 관한 실험이다. 파스퇴르는 자연 발생설 논쟁에 보다 명확한 실험적 근거를 제시하고자 아주 새로운 모양의 기기를 고안했는데, 이것이 바로 백조 목 플라스크다. 오늘날 거의 모든 생물학 교과서에 실려 생명의 생물속생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인용되는 이 실험은 논리나 실험 과정이 너무도 단순하고 명료해 파스퇴르의 주장을 반대하던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결론을 제시했다. 그는 발효할 수 있는 배양액을 목이 길쭉한 플라스크에 넣은 후, 플라스크의 목 부분을 가열해 늘이면서 옆으로 S자 형태가 되도록 변형시켰다. 그리고 플라스크 내부의 배양액을 끓여서 생명체를 죽이고, 이 가열 과정에서 발생한 수증기를 백조 목 모양으로 구부러진 부분에 응축되어 모이게 해서 멸균 차단막으로 작용하도록 고안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백조 목 플라스크 내부의 배양액은 플라스크를 깨서 외부 공기에 노출하기 전에는 미생물 같은 생명체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유명한 백조 목 플라스크의 결론이다. 100년도 더 전에 만들어진 백조 목 플라스크는 파리의 파스퇴르연구소에 지금도 전시돼 있으며 그 안의 액체는 처음 멸균한 그날의 상태처럼 여전히 깨끗하다. 파스퇴르의 이러한 실험적 노력을 바탕으로 생명의 자연 발생설은 폐기됐으며, 이런 연구 과정에서 수행한 경험을 토대로 개발된 무균조작법과 살균법 등 세균학 연구의 기본 기술은 오늘날 미생물학 연구의 바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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