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병원 폐원은 시작에 불과하다

6월 23일, explained

서울시 중구의 마지막 종합 병원이 사라진다. 한국의 현주소가 드러난다.

ⓒ일러스트: 권순문/북저널리즘
NOW THIS

서울 중구에 위치한 인제대학교 서울백병원이 83년 만에 폐원한다. 인제학원 이사회는 지난 6월 20일 만장일치로 폐원안을 가결했다. 백병원의 누적 적자는 1745억 원, 외부 전문 기관의 경영 컨설팅 결과 ‘의료 관련 사업 추진 불가’라는 답변을 받았다. 의료 공백 우려로 서울시엔 비상이 걸렸다. 백병원이 중구의 마지막 종합 병원이기 때문이다.

WHY NOW

백병원 폐원은 한국 사회의 현주소를 비추는 거울이자 또 하나의 결정적 순간이다. 한국 의료 체계의 난맥상, 사학 재단의 위기, 인구 공동화, 도시 계획의 딜레마, 노사 갈등까지 복합적으로 진단할 수 있는 교보재다. 백병원 이사회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수많은 분야에 경종을 울렸다. 지금 당장 논하지 않으면 집 앞 병원과 대학, 그 밖에 사회 필수 시설이 연쇄적으로 백병원과 같은 운명을 맞을 수 있다.

백병원의 헤리티지

1941년 한국 근대 의학의 개척자인 백인제 박사는 지금의 명동 인근에 ‘백인제 외과병원’을 개원한다. 백 박사의 명성으로 병원은 크게 성공했고, 1946년 한국 최초의 민립 공익 법인인 ‘재단법인 백병원’이 탄생한다. 백병원은 한국 전쟁 도중 백 박사가 납북되며 위기를 맞는다. 이후 병원 현대화 바람이 불며 세브란스, 성심병원 등 종합 병원이 우후죽순 생기자 일제 강점기에 지은 목조 건물 백병원의 입지는 더 좁아진다. 1972년 백병원은 신축과 전면 리모델링으로 위기를 돌파한다. 1992년 국내 최초 성인 간암 환자 간 이식 성공,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지정 병원으로 활약하며 의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썼지만 2000년대부터 암흑기가 시작된다.

적자의 늪

2004년 백병원은 최초로 적자를 기록한다. 당시 적자 규모는 73억 원이었다. 위기의 백병원은 투자 은행 등 외부 전문 기관으로부터 컨설팅을 받아 병상을 줄이고 수익성 좋은 외래 중심 병원으로 재편하고자 했다. 2016년에는 경영 정상화 태스크포스(TF)팀도 꾸려졌다. 한때 500개가 넘던 가동 병상 수를 올해 122개까지 줄였다. 비용 감소로 2015년 적자 규모를 48억 원까지 줄이기도 했지만 흑자 전환에는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병상 수와 비용 지출을 줄일수록 가동률이 떨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입원 환자 수, 외래 진료 수, 수술 건수 모두 2017년에 비해 반 토막 났다. 백병원은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구도심의 사정

명동이었기 때문이다. 1972년의 백병원은 신축과 리모델링으로 위기를 넘었다. 그런데 2004년의 백병원은 그럴 수 없었다. 명동은 공시지가 기준 2004년 이후 국내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곳으로, 당시 임대료는 세계 10위 수준이었다. 2021년 기준 평당 가격이 6억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병원을 확장하려 해도, 수익 사업을 위한 편의 시설을 만들려고 해도, 외래 환자를 유치할 주차장을 만들려고 해도 필요한 건 공간인데 배보다 배꼽이 더 컸다. 애초에 병원을 이용할 사람이 줄어든 탓도 있다. 도시가 성장기를 지나면 도심의 땅값이 올라 주거 시설은 외곽에 몰린다. 인구 공동화 탓에 중구의 상주 인구는 줄었고 내원 환자도 감소했다.

노후 종합 병원의 사정

입지 탓만 할 순 없다. 백병원은 경쟁에서 밀렸다. 자본력을 갖춘 수도권의 대형 병원들을 이길 수 없었다. 대형 병원들의 과열 경쟁으로 이미 2008년 이대 동대문병원, 2011년 중앙대 용산병원, 2019년 성바오로병원, 2021년 제일병원 등이 쓰러져 나갔다. 경증, 중증 할 것 없이 상급 병원으로의 환자 쏠림이 심한데 건강 보험의 보장성이 좋으니 응급 환자가 아닌 다음에야 좋은 병원을 찾게 된다. 노후한 종합 병원은 살아남기 어려운 구조다. 돈 많은 대학 병원들은 지금도 분원을 거듭하며 수도권을 중심으로 병상 수를 늘리고 있다. 백병원 폐원은 이 쏠림 현상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의료 전달 체계의 유명무실함을 보여 준다.

사학 재단의 사정

경영 논리로 의료 공백이 생겨도 괜찮은 걸까? 폐원의 이면엔 재단의 경영상 노림수가 있다는 시각도 있다. 백병원은 최근 외부 컨설팅 과정에서 해당 병원 부지를 상업 시설로 전환할 수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중구의 노른자, 백병원 부지의 땅값은 3000억 원에 달한다. 여기에 판을 깔아 준 건 교육부다. 지난해 6월 사학 재단이 재산을 유연하게 운용해 경영난을 해소할 수 있게 지침을 개선한 것이다. 일정 수준의 교육용 건물·토지를 확보했다면 나머지 유휴 재산은 조건 없이 수익용으로 바꿀 수 있게 됐다. 이 조치는 사실 경영난으로 파산 후 회생 절차를 밟고 있는 명지학원 때문에 생겼다. 교육계의 ‘사학 먹튀’ 논란과 이번 논란이 이어지는 지점이다.

서울시의 명분

명동은 리오프닝으로 다시 활개를 폈다. 병원만 아니라면 금싸라기 땅이다. 여기에 제동을 건 것은 서울시다. 폐원이 가시화하자 병원 부지를 ‘도시 계획 시설’로 지정하며 정치적 메시지를 보냈다. 각 지자체는 도시 운영에 필요한 학교, 도로, 병원, 도시공원 등을 도시 계획 시설로 지정해 용도를 강제할 수 있다. 매각해도 병원밖에 못 지으니 제값을 받고 땅을 팔기 어렵게 된다. 지난한 행정 소송이 예고되는 대목이다. 서울시의 명분은 정의롭지만 사유 재산권을 가로막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난 2020년 ‘도시공원 일몰제’로 인해 전국 지차체는 장기간 사업 집행이나 보상 없이 도시공원으로 지정해 둔 토지에 천문학적인 돈을 지출해야 했다.

백병원은 누구와 싸우는가

서울시의 초강수에도 최종적으로 폐원을 결정한 만큼 인제학원은 긴 싸움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시는 이사회와 호각을 다툴 체급이 되지만 임직원과 입원 환자, 중구 구민들, 주변 약국은 언더독이다. 백병원은 폐원하며 직원 393명의 전원 고용 승계를 약속했는데 이는 직원들에겐 강제 발령이 되고 재단에는 연쇄적 위기가 된다. 보건의료노조는 의료 공백과 노동자 처우를 들어 폐원을 연일 규탄하고 있다. 가장 문제는 입원 환자들이다. 폐원이 결정되면 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옮기는 전원 조치가 최우선인데 백병원 측은 아직 제대로 된 조치도 발표하지 않았다. 경영진이 사망 선고를 내린 병원에 응급·소아 환자의 진료를 기대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IT MATTERS

백병원 폐원 사태는 의료의 공공재 여부에 관한 오래된 질문을 상기시킨다. 병원과 학교 같은 시설을 시장 논리로 이해할 것인가, 사회 서비스의 관점으로 바라볼 것인가. 이에 대해 한국은 구체적인 사회적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고 백병원 폐원 결정은 그 결과의 하나로 드러났다. 의료계는 백병원을 시작으로 종합 병원의 본격적 폐업 러시가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낸다. 서울 시내에 적자를 기록하고 있는 종합 병원 이상 의료 기관은 11곳에 달한다. 서울은 도심의 의료 공백을 걱정하지만 지방의 의료 체계는 이미 상당 부분 무너져 내렸다.

묘수는 없다. 미래를 예견하지 못한 의료 보험 체계는 필수 의료 분야에서 의료계의 부담을 수십 년간 가중시켜 왔고 대부분의 국민에게는 의료가 사실상 공공재라는 인식이 강하게 박혀 있다. 여타 중대한 사회 갈등과 마찬가지로 갈등을 겪는 주체들은 권리 의식에 대한 일말의 양보를 보이지 않는다. 《의사들은 왜 그래?》의 저자 김선영은 이를 두고 “병원은 의료인을 쥐어짜고 정부는 병원을 쥐어짜며, 건강 보험료와 세금을 더 낼 여력도, 의지도 없는 국민은 정부를 쥐어짠다.”고 평하며 노동 경시와 갑질 풍조를 지적한다.

백병원과 동시에 지켜봐야 하는 것은 제주 녹지병원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영리 병원으로 추진되어 설립되었지만 의료 민영화 논란으로 개설 허가가 취소되는 등 부침을 겪었다. 제주도는 내국인 진료 제한을 내걸고 개설을 허가했으나 녹지병원이 이에 반발하며 소송이 오가고 있다. 모순적인 의료 체계를 손보기 위한 논의가 늦어지면 녹지병원이 새로운 모멘텀을 마련할 가능성이 있다. 지난 2023년 2월의 2심에선 광주고등법원이 제주도의 손을 들어 줬지만, 녹지병원이 내국인을 받을 수 있게 되는 날, 의료 민영화의 파도가 한국을 덮칠지 모른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신가요?
프라임 멤버가 되시고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 이용하세요.
프라임 가입하기
추천 콘텐츠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