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정치사

7월 6일, explained

라면은 경제가 아니다. 탄생부터 정치였다.

ⓒ일러스트: 권순문/북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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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가격이 내렸다. 경제 부총리가 직접 나섰다. 국무총리도 말을 얹었다. 값을 내릴 수 없다고 손사래 치던 기업들이 결국, 라면 가격 인하에 나섰다. 그러나 소리만 요란했다. 정부와 기업 간의 공방은 파괴력 있는 뉴스가 되었지만, 정작 효과는 6개월간 신라면 3개를 더 살 수 있는 정도다. 이래서 체감이 되겠냐는 이야기가 나온다.

WHY NOW

작가 김훈은 1960년대 이후 한국 라면시장의 팽창이 “그 무렵부터 구조적으로 전개된 빈부의 양극화, 인구의 대량 소외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라면은 빈곤으로부터 태어난 음식이다. 따라서 다분히 사회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라면은 정치적이기도 하다. 정치가 라면의 탄생을 허락했고, 성장을 부추겼다. 지금도 정치는 라면을 수단 삼아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다. 하지만 라면을 그렇게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 한국인에게 라면은 끼니의 마지노선이기 때문이다.

태초에 꿀꿀이죽이 있었다

인스턴트 라면을 만든 인물은 안도 모모후쿠다. 일본 닛신식품의 창업자이자 세계 최초의 봉지라면, ‘치킨라멘’을 개발했다. 한국 라면의 시작은 삼양식품의 전중윤 회장이었다. 지금도 판매되고 있는, ‘삼양라면’이다. 둘의 스토리는 비슷하다. 안도 모모후쿠는 일본 제국주의 패망 직후인 1948년 11월, 오사카 암시장에 늘어선 빈민들을 목격했다. 값싼 길거리 국수를 먹기 위해 늘어선, 배고픈 사람들이었다. 전 회장이 마주친 것은 1960년대 초, 남대문 시장에서 ‘꿀꿀이죽’을 사 먹으려 몰려든 인파였다. 미군 부대에서 나온 음식물 쓰레기를 솥에 부어 끓여낸 음식이었다. 라면의 창세기는 배고픔으로부터 국민을 구하겠다는 식품 기업 창업주들의 뜨거운 애국심, ‘음식보국(飮食報國)’의 신화로 장식되어 있다. 하지만 정작 라면 신화를 가능하게 한 진짜 주인공은 따로 있다. 바로 미국의 제34대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라는 인물이다.

그 많은 밀가루는 어디에서 왔을까

닛신의 치킨라멘은 1958년, 삼양의 삼양라면은 1963년 출시되었다. 일본도, 한국도 주식인 쌀이 부족했던 시기다. 대신 밀가루는 상대적으로 풍부했다. 그래서 라면이 대량 생산될 수 있었다. 쌀보다 밀가루가 그나마 흔했던 까닭은 미국으로부터의 원조 때문이었다. 아니, 원조라는 이름의 재고 처리 때문이었다. 바로 1954년부터 시행된 미국의 ‘농산물 무역 발전 원조법’ 얘기다. ‘잉여 농산물 처리법’이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하다.

미국의 재고 처리

미국은 1948년부터 밀이 남아돌아 문제였다. 전쟁을 치르며 정부 정책과 기술 발전으로 농업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늘었기 때문이다. 밀 가격이 폭락했다. 내수에서 다 소화가 안 되니 해외로 내보내야 했다. 처음에는 ‘마셜 플랜’이라는 이름으로 서유럽에 공급되었다. 유럽의 공산화를 막아야 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유럽은 빠르게 일어섰다. 그다음에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졌다. 다시 군수 물자로 쓰였다. 하지만 1953년 정전 협정이 체결되며 사실상 전쟁이 끝났다. 창고에 밀이 다시 쌓이기 시작한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만 했다. 텍사스 출신으로 캔자스에서 자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주요 지지기반이 바로 농심(農心)이었기 때문이다. 대규모 농업이 발달한 남부와 중서부 지역 얘기다.

밀가루가 애국이라는 프로파간다

잉여 농산물 처리법이 시행된 1954년부터 일본도, 한국도 미국과 협정을 맺고 미국산 밀을 공급받게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본과 한국에 미국산 밀이 쏟아져 들어온다. 문제는 평생 쌀만 먹던 사람들이 갑자기 빵을 먹게 될 리가 없다는 점이었다. 정부가 분식 장려 정책을 시작했다. 쌀을 먹지 말고 밀가루를 먹자는 정책이다. 일본 전역의 소학교에서 빵과 탈지분유 급식이 시작되었다. 한국의 식당에서는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쌀이 들어간 음식을 판매할 수 없었다. 삼양의 라면 사업은 이런 정치, 사회적 상황과 잘 맞아떨어졌다. 1967년에는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다. 식품 기업으로서는 최초였다.

정부 주도 라면 정책

표창만 받은 게 아니다. 정부로부터 돈도 받고 조언도 받았다. 삼양 라면은 일본의 기계와 기술로 만들었다. 일본 기계를 수입하려면 외화가 필요하다. 정부로부터 5만 달러의 차관을 받아 기계를 수입하고 공장 문을 열었다. 달러가 귀했던 60년대의 사정을 생각하면 파격적이다. 일본 기술로 만들었으니, 삼양라면은 닭 육수 기반의 ‘하얀 라면’이었다. 국물이 얼큰해진 까닭은 당시 대통령의 입맛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고춧가루를 좀 넣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했던 것이 계기였다. 심지어 라면 가격도 정부가 정했다.

라면이 가격을 올리지 못한 까닭

70년대 한국은 고도성장 시기에 접어든다. 가난이 옅어지는가 싶더니 물가가 뛰어올랐다. 거기에 중동발 오일쇼크까지 겹치며 물가 상승률은 25퍼센트까지 치솟았다. 물가가 오르면 지지율은 떨어진다. 결국 1974년, 정부는 ‘12·7경기대책 특별조치’를 발표한다. 라면을 비롯해 설탕, 간장, 고무신 등 58개 주요 공산품의 가격을 정부가 통제한다는 방안이 포함되었다. 가격 통제가 끝난 1981년까지 라면은 정부의 관리 대상이었다. 그래서 라면은 빈자(貧者)에게 허락된 정찬이 될 수 있었다. 가난을 딛고 일어선 인생 역전 스토리에는 언제나 라면이 함께 했다. 어딘가 씁쓸한 자부심이, 라면의 얼큰한 국물에 섞였다.

최소 생존의 상징과 공정거래

21세기, 한국은 꽤 풍요로워졌다. 그러나 반세기 넘게 한국인과 함께하며 ‘제2의 쌀’로 자리매김한 라면은, 여전히 한국인의 ‘기댈 곳’이다. 우리는 감염병 재난이나 안보 위기 상황이 닥치면 라면을 사재기한다. 생존배낭에도 라면을 챙겨 넣는다. 외환위기 시대에 라면 매출은 오히려 뛰었다. 한국인에게 최소 생존의 상징은 다름 아닌 라면이란 얘기다. 그 상징성 때문에 라면 가격은 여전히 타깃이 된다. 물가를 잡기 위해 제일 먼저 잡아야 할 타깃 말이다. 2010년, 이명박 정부는 ‘MB 물가 지수’를 만들어 라면값을 끌어내렸다. 대통령이 선언하고 공정거래위원회가 칼자루를 잡았다. 2023년, 지금도 비슷하다. 경제부총리가 선언하고 공정위가 나섰다.

IT MATTERS

사실, 라면 가격이 물가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다. 1000분의 3 정도다. 통계청 소비자물가지수 대표품목 가중치 얘기다. 전체 가중치 총합을 1000으로 뒀을 때 라면은 2.7이다. 휴대전화료는 31.2, 휘발유는 20.8, 전기료는 15.5다. 먹거리를 놓고 보면 돼지고기 10.6, 쌀 5.5다. 물가 잡으려면 어딜 잡아야 하는지 숫자가 명료하게 드러낸다.

그럼에도 정부의 칼끝이 굳이 라면으로 향한 이유가 있다. 정치인들에게 쌀은 어렵다. 쌀값이 떨어지면 농심과 함께 표심이 떠나기 때문이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창고에 쌓인 밀 재고를 떨어내야 했던 것과 똑같은 상황이다. 반면 정치인들에게 밀은 쉽다. 농사짓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50년대 이후 쏟아져 들어온 미국산 밀의 저렴한 가격을, 우리 밀은 당해낼 수가 없었다. 밀 농사가 고사했다. 결국, 밀로 만든 라면 가격은 정치적으로 간편한 도구가 된다. 탄생과 성장의 역사처럼, 라면은 여전히 정치적이다.

라면 가격이 내려서 소비자는 행복해질까? MB 물가 지수로 관리했던 52개 품목의 5년간 물가 상승률은 전체 소비자물가 상승률의 1.6배에 달했다. 인플레이션을 잡겠다는 명분으로 정부가 시장 원리를 아예 거슬렀을 때 어떻게 되는지, 이미 그 결과치가 나와 있다는 얘기다. 지금은 못 올려도 기업은 언젠가 올린다. 눌러뒀으니 더 튀어 오른다. 결국 갑작스러운 가격 인상의 피해는 소비자가 감당할 수밖에 없다. 라면 한 그릇이 오늘 저녁의 유일한 선택지인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잔인한 결말이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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