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 농단의 비용

7월 21일, explained

엘리엇이 보낸 국정 농단 청구서가 날아왔다. 누구의 책임인가.

ⓒ일러스트: 권순문/북저널리즘
NOW THIS

우리 정부가 미국계 사모펀드 엘리엇(Elliott)에 1300억 원을 배상하라는 국제 기구의 판정에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앞서 엘리엇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합병할 당시 삼성물산의 최대 지분 보유 주주인 국민연금이 당시 정부와 결탁해 피해를 입혔다고 주장해 왔다. 정부의 취소 소송은 엘리엇이 2018년 국제상설중재판정소(PCA)에 제기한 국제 투자 분쟁 해결 절차(ISDS)에 대한 불복 선언이다. 1조 원짜리 소송에 7퍼센트만 인정된 금액이지만, 우리나라가 외국 펀드에 배상금을 물어 줘야 한다는 판정에 여론은 술렁이고 있다.

WHY NOW
   
다툼의 프레임은 복잡하다. 확실한 건 정경 유착에 혈세가 쓰일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엘리엇이 문제 삼는 2015년은 박근혜 정부 시절로, 2018년 이들이 손해 배상을 청구한 속칭 ‘엘리엇 사건’은 국정 농단의 결과물 중 하나다. 이번 ISDS 판정이 ‘국정 농단 청구서’로 불리는 이유다. 그러나 8년 뒤인 2023년, 이 싸움은 외국계 악성 투자 자본과 국제 기구의 월권에 맞서 국익을 지켜야 하는 문제로 그려지고 있다. 사건의 본질을 놓치면 우리가 모르는 부정은 계속된다.

엘리엇 사건 다시 읽기

엘리엇은 행동주의 사모펀드의 원조다. 이들은 저평가된 기업 주식을 사 회사 경영에 참여하며 기업 주가를 끌어올리고 이를 매각해 이득을 취한다. 삼성물산도 엘리엇의 물망에 올랐고 이들은 7퍼센트의 지분을 확보한다. 2015년 5월 제일모직이 삼성물산 주식을 1 대 0.35로 전량 매입하는 방식의 인수 합병안이 발표된다. 삼성물산 한 주로 제일모직 0.35주를 산다는 뜻이다. 엘리엇은 삼성물산이 저평가됐다며 당시 주요 주주였던 국민연금과 삼성 계열사 등에 합병 반대 의사를 표했다. 가처분 신청도 냈지만 거듭 기각당했다. 합병은 같은 해 7월 완료된다. 당시 캐스팅보트를 쥔 건 당시 삼성물산 11퍼센트, 제일모직 5퍼센트의 지분을 가진 국민연금이었다.
   
국정 농단과의 연결 고리

두 가지 의혹이 제기됐다. 첫째로 왜 국민연금이 제 살 깎아가며 합병에 찬성했는지다. 당시 삼성그룹은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승마 지원금을 주기로 하고 최순실은 청와대를 통해 국민연금을 움직여 합병을 도왔다. 이재용 당시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정경 유착이다. 또 하나의 의혹은 주가 조작이다. 제일모직이 최대 지분을 보유했던 삼성바이오로직스가 고의적 분식회계로 몸값을 키웠다는 혐의가 불거졌다. 그룹의 뿌리이자 자산도 많았던 삼성물산은 고의로 건설 수주를 미뤄 몸값을 낮췄다. 엘리엇은 한-미 FTA의 투자 보호 조항에 따라 중재 신청을 걸었고 그 판정이 올해 6월에 나온 것이다.

한동훈의 50분
   
지난 7월 18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기자들 앞에서 중재 판정부의 판정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요지는 이렇다. 한-미 FTA상 ISDS는 정부가 민간의 투자와 관련해 어떤 부당한 행위를 해야 제기할 수 있는데 애초 그 요건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장관은 중재 판정부가 국민연금을 ‘사실상의 국가 기관’이라고 본 점을 들어 나쁜 선례를 만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세상 모든 국부펀드에 적용될 수 있어서다. 같은 주주끼리 서로의 의결권 행사가 상대에게 피해를 줬다고 말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라 짚었다. 구상권 청구를 질문하는 기자들에겐 전략적으로 지금 논할 때가 아니라 답했다. 한동훈의 50분은 이 문제를 정의와 국익의 문제로 치환했다.

중재는 도박이다

국민 입장에서 국제 재판을 이기고픈 건 당연지사다. 세금도 걸렸고 국제 기구가 관할도 아닌 사건을 멋대로 판정했다면 바로잡을 필요도 있다. 한 장관은 넷플릭스 〈더 글로리〉의 명대사 “살면서 아끼면 안 되는 비용(변호사비)”까지 인용하며 승소에 자신감을 보였다. 그렇다면 승소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통상 ISDS에서 취소 소송이 이길 확률은 10퍼센트다. 확률도 낮은데 심지어 국제 중재는 단판이다. 지면 뒤가 없다. 돈이 많이 들고 확실할 때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점이 도박과도 닮았다. 한 장관이 국정 농단 수사의 책임자이자 특수통의 전설이더라도 그의 승부사 기질에만 기대할 수 없는 이유다. 도박판에서 사람을 바보 만드는 건 희망이다.

장관의 눈속임

법리적인 부분은 어떨까? 승소의 핵심은 국민연금이 국가 기관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다. 국제 통상 전문가인 송기호 변호사는 북저널리즘과의 통화에서 한 장관의 주장이 법리적으로도 근거가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이미 ISDS의 다른 판례에서 상업 기업과 국가의 연관성이 인정된 사례가 여럿 있기 때문이다. 우리 대법원도 작년 4월 삼성물산 합병 당시 국민연금에 압력을 행사한 보건복지부 장관과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에 유죄 판결을 내렸다. 한 장관이 제기한 ‘관할권(재판권)’ 문제의 쟁점 역시 이미 ISDS에서 판단이 끝난 사안으로, 한 장관은 이미 배제된 논리를 재주장한 것과 다름없다. 질 싸움에 대해 눈속임하는 것은 국익과도 정의와도 거리가 멀다.

국익도, 정의도 없는 사건

사건의 본질을 상기해야 한다. 이 사건에 국익은 없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콜롬비아 대학교의 조셉 스티글리츠 교수는 미국의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 때 미국 정부가 막대한 혈세로 월가를 구제한 것을 들어 “이익의 사유화, 손실의 사회화”라 일갈했다. 엘리엇 사건도 마찬가지다. 재벌가의 경영 세습과 정경 유착에서 비롯됐기에 배상금에 세금을 상수로 둘 수 없다. 사건의 이해당사자 중 정의를 입에 올릴 주체도 없다. 순환출자로 경영권을 유지하는 재벌의 악습을 국제 투기 자본이 약탈적으로 노렸고, 관치 논란에서 자유로운 적 없는 연기금은 정경 유착에 취약성을 드러냈다. 대기업 의존도가 큰 경제 구조는 대마불사의 사고로 면죄부를 남발한다.

한-미 FTA의 덫

물론 취소 소송 자체가 아무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한 장관이 언급한 ‘나쁜 선례’가 향후 한국을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엘리엇 사건 이외에도 메이슨, 쉰들러 등 한-미 FTA 아래 우리 정부를 기다리는 소송이 남아있다. 론스타 사건은 한국에 외국계 투자 자본의 공세에 대한 경각심을 안겼다. 취소 소송의 어폐를 무릅쓰고서라도 방어적 조처를 하는 게 나은 판단일지 모른다. 여기에 대해 송 변호사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말한다. 삼성물산의 투자로 피해를 본 것은 엘리엇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내 개미들은 법적 다툼의 기회조차 없었다. 송 변호사 등은 한-미 FTA 체결 당시부터 이 투자자 보호 조항 자체가 해외 투자 자본의 특혜로 작용할 수 있음을 지적해 왔다. 형평성의 문제 역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주제다.

IT MATTERS

한 장관과 정부의 언사는 사안의 본질을 가린다. 동시에 최근 정치권의 문제를 그대로 드러낸다. 검사 출신 정치인이 늘어나며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할 정치는 종종 사법 정치의 행태를 보인다. 모든 사안에 법리적 잣대가 우선하고, 정적에 대해서는 의혹을 여럿 제기해 신뢰를 떨어뜨리는 검사의 수사 기법이 쓰인다. 이번 사건에선 과거 우리 정부가 합의한 한-미 FTA와 중재 판정을 내린 PCA, 엘리엇이 그 대상이 됐다. 판정 요지를 모를 리 없는 법률 전문가 한 장관의 재주장이 이를 뒷받침한다. 또 다른 문제는 도박 정치다. 가망 없는 사건에 국익과 전략을 들어 구상권 논의를 묵살한 한 장관의 발언에서 양평 고속도로 백지화를 선언한 원희룡 국토부 장관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건 우연이 아니다.

송 변호사는 취소 소송의 제기가 구상권의 검토를 늦추는 계기가 되어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박 전 대통령, 최순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한 구상권 시효는 2025년이다. 가망 없는 소송에 매달리면 이익의 사유화, 손실의 사회화가 그대로 실현될 수 있다. 이는 돈 이전에 정의의 문제다. 국정 농단의 수사자가 스스로 그에 배치되는 논리를 편다면 사법 정치가 강조하는 ‘법과 원칙’이라는 대원칙마저 무너져 내릴 수 있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신가요?
프라임 멤버가 되시고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 이용하세요.
프라임 가입하기
추천 콘텐츠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