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위해 유엔이 할 수 있는 것

7월 28일, explained

예멘 앞바다에 방치된 유조선은 대재앙을 예고한다. 누구도 치울 생각 없는 시한폭탄 제거에 어쩔 수 없이 유엔이 나선다.

ⓒ일러스트: 권순문/북저널리즘
NOW THIS

예멘 앞바다에서 썩어 가는 유조선 ‘FSO 세이퍼호(이하 세이퍼호)’가 8년 만에 구출된다. 현지 시간 25일, 유엔이 ‘노티카호’를 투입하여 유조선에 들은 석유 110만 배럴을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바다 위에 방치된 유조선은 부식이 진행되며 인도주의적, 환경적, 경제적 재앙을 예고하고 있다. 기름이 유출되는 순간, 홍해 생태계와 지역 해안 공동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19일 동안의 위태로운 작전이 이제 막 시작됐다.

WHY NOW

1970년대에 만들어진 낡은 배 세이퍼호는 예멘 내전의 상징이자 상흔이다. 예멘 국영 석유 회사가 원유 창고로 이용하던 이 배는 예멘 내전 발발 이후 2015년, 반군의 손에 들어갔다. 중동에 화해 분위기가 감도는 지금, 세이퍼호는 환경을 위협하는 시한폭탄이 됐다. 부식된 배에서 석유가 유출되기 시작하면 홍해를 낀 모든 나라의 국민은 물론 상어, 바닷새와 산호초를 포함한 많은 바다 생물이 죽게 된다. 세계에 또 다른 환경 재앙이 닥칠 만한 위기 상황이다.

국제 정치의 하수처리장

아무도 세이퍼호를 구하기 위해 나서지 않아서, 유엔이 나섰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카메라에 대고 말했다. “이 임무를 수행할 의향이나 능력이 있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유엔이 위험을 무릅썼습니다.” 아무도 나서지 않은 이유는, 전쟁 때문이다. 후티 반군이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인도적 목적만을 위해 세이퍼호를 구할 국가는 없다. 그러나 세이퍼호를 방치했을 때 생겨날 문제는 더 컸고, 비정부기구와 학계의 경고가 이어졌다. 결국 후티 반군은 작년 3월, 유엔이 세이퍼호에 접근할 수 있다는 합의에 서명했다. 고위 관리인 모하메드 알리 알후티는 ‘신의 뜻에 따라 작업이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예멘 내전

그가 말한 ‘신’은 이슬람의 신 ‘알라’를 말한다. 알라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는 이슬람권은 지도자 칼리파가 예언자 무함마드의 정통 후손이어야 하는지, 아닌지에 따라서 시아파와 수니파로 나뉜다. 이란과 이집트가 대표적인 시아파 국가라면, 사우디아라비아와 UAE 등은 수니파다. 중동 갈등의 핵심인 종교를 두고 두 세력은 시리아와 예멘에서 대리전을 펼쳐 왔다. 그 결과, 예멘 국민의 80퍼센트는 기근에 시달리고, 국민 14퍼센트가 난민이 되었으며, 여파는 한국 제주도에까지 미쳤다. 그런데 지난 3월, 분위기가 반전된다. 중국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화해를 중재한 것이다. 예멘에도 전쟁 종식의 기대감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4월, 사우디 대표단은 후티 반군이 장악한 예멘 사나를 방문해 휴전에 합의했다.

중동에서 이득 보는 중국

수니파의 파트너는 2020년대 들어 미국에서 중국으로 바뀌었다. 2018년 자말 카슈끄지 살해 사건으로 사우디와 관계가 악화하기 시작한 미국은 2022년 1월 예멘 후티 반군이 UAE 수도 아부다비에 미사일 공격을 한 이후에도 군사 원조를 지연했다. 두 나라 관계 사이에 벌어진 틈새를 중국은 놓치지 않았고, 수니파는 미적지근한 미국 대신 중국을 택했다. 그리고 수니파와 시아파의 화해를 중재한 중국은 중동의 수혜를 입고 있다. 이란은 상하이협력기구(SCO)에 공식 가입하고, 사우디와 UAE 등 걸프 국가 기업들은 올 들어 중국에 53억 달러를 투자했다. 지난해와 비교해 1000퍼센트 이상 급증한 수치다. 중국은 서방에서 빠진 투자액을 아시아와 남미, 중동에서 채우고 있다.

전쟁의 시대, 힘 빠지는 유엔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이득을 보는 중국과 달리, 세이퍼호에서 석유를 옮겨야 하는 유엔은 위험과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2000만 달러로 추산되는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유엔은 세계에 기부를 요청했으며, 우리나라도 20만 달러를 지원했다. 시민들의 크라우드펀딩도 받고 있다. 사실 유엔도 예멘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다. 2018년에는 평화 회담을 개최했는데 후티 반군 측이 불참하며 무산됐고, 2019년에도 두 번의 선상 회담을 진행했지만 실질적인 성과는 없었다. 2022년에 합의한 결과는 겨우 2개월 휴전 연장이었다. 그간 정부군과 반군을 화해시키기 위해 재주를 부린 것은 유엔인데, 이득은 중국이 얻은 셈이다.

씁쓸한 뒷맛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발발하고 패권 다툼이 거세지며 국제 평화를 위한 기구인 유엔의 위상은 추락하고 있다. 반면 힘을 얻는 것은 안보와 경제에 있어 블록 단위의 이익을 공고히 하는 나토와 G7, 상하이협력기구 등이다. 특히 이득을 보는 것은 미국과 중국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미국은 나토를 통해 유럽 국가들과의 군사적 단합 및 영향력 강화에 성공했다. 핀란드에 이어 스웨덴이 나토 가입을 준비하며 그 영향력은 발트해에까지 이른다. 전쟁은 각 나라의 욕심 때문에 일어난다. 예멘 내전은 중동 패권을 위한 시아파와 수니파의 대결이었다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배경에는 나토의 동진이 있었다. 강대국과 강대국 연합체가 세력에 대한 이기심으로 전쟁을 일으켰는데 오히려 그들의 권력은 더욱 강해지고, 피해는 세계인 모두가 보는 모양새다.

유엔의 힘이 통하지 않는 세계

그래서 유엔이 존재한다.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유엔은 국제 평화를 위한 기구로 창설됐다. 유엔은 현재 안전보장이사회를 중심으로 전쟁 발발을 막는 것과 동시에, 차별과 빈곤 등 전쟁의 원인이 되는 구조적 요인도 제거하려 한다. 그러나 세계 평화를 위한 유엔의 목소리는 힘의 논리에 묵살돼 왔다. 예멘 내전 종료를 위한 유엔의 중재에도 사우디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러-우 전쟁에 있어 유엔은 안보리에서 러시아가 거부권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러시아를 규탄하는 결의안을 무산시켰고, 휴전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지금 유엔은 러시아에 흑해 곡물 협정을 재개할 것을 촉구하지만 푸틴 대통령의 반응은 차갑다. 국가주의가 부상하고 글로벌 정서가 약화하며 상임이사국 간에 골이 깊다는 게 2019년 내부 문건에서 드러나기도 했다. 1945년 만들어진 유엔은 2023년의 국제 질서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최후의 보루

그럼에도 유엔은 최후의 보루다. 국가들의 이기심으로 시작된 전쟁은 세이퍼호를 낳았고, 또 이기심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구하려 나서지 않을 때 유엔이 마지막 남은 희망으로서 여기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급박한 상황이다. 부식은 시작됐고 기름이 유출되면 복구에는 30년 이상 걸린다. 누군가라도 움직여야 했다. 유엔은 일어나고 있는 전쟁을 당장 막을 힘은 없다. 하지만 환경과 인권 등 시민들의 생활 수준이 중대하게 침해받는 상황에 경고를 하고 행동을 촉구한다. 한국의 위안부, 차별금지법 제정 등의 문제에 있어서도 유엔은 관심을 환기하고 여론을 형성하는 역할을 했다. 세이퍼호에 유엔이 나서는 것은, 가장 최후의 순간에 유엔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나타낸다.

IT MATTERS

2년 후면 유엔은 창설 80주년을 맞는다. 한 세기 가까이 인류와 함께한 유엔은 국가들이 언제든 자발적으로 참여하거나 탈퇴할 수 있는 ‘정부간 기구’로서 태생적 한계를 품는다. 미국과 중국이 정치경제적으로 각자의 영향력을 불려 가는 사이, 평화라는 공허한 외침은 힘을 잃고 있다. 안보 분야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린 워싱이라고 지적받는 COP, 중국과 러시아 등 인권 탄압 비판을 받는 국가가 포함된 인권이사회, 내부 비리 등의 문제를 두고도 유엔은 무용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그럼에도 유엔은 필요하다. 세계 국가들이 한데 모여 문제를 논의하는 유일한 중립적인 장소이기 때문이다. 유엔 안보리에서 러시아에 대한 결의안을 표결할 때, 러시아만이 결의안에 반대했다는 것은 러시아가 세계에서 고립되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당장의 문제 해결에는 실패했지만, 유엔은 그 사실을 역사에 증거로 남긴다.

유엔은 불완전하다. 그러나 국제 평화의 안정을 위해서는 없어서 안 될 존재다. 《워싱턴 포스트》 설문 조사에 의하면, 세계 시민들은 유엔의 권한이 더 강력하기를, 그리고 일부 국가의 집행부만이 아니라 시민들의 의사를 더욱 잘 반영하기를 원한다. 6개국의 국민들이 참여한 이 설문조사 결과는 각 나라의 지도부가 아니라 세계의 시민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말해 준다. 세계는 평화를 원하고 있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신가요?
프라임 멤버가 되시고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 이용하세요.
프라임 가입하기
추천 콘텐츠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