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절, 나쁜 논란

8월 16일, explained

나라를 세운 시기를 특정하자는 주장이 다시 고개를 든다. 모순이다.

ⓒ일러스트: 권순문/북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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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를 두고 ‘건국절 논란을 피해 갔다’는 분석과 오히려 ‘논란에 불을 붙였다’는 분석이 동시에 나온다. “우리의 독립운동은 국민이 주인인 나라,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건국 운동이었다”는 경축사의 한 대목 때문이다. 윤 대통령의 인식대로 우리의 독립운동은 건국이라는, 특정 이벤트를 향하는 일련의 운동 과정이었을까. 분열의 언어가 너무 많았던 광복절 축사. 어느 쪽이든 그 안에서 건국절이라는 논란의 불씨를 발견한다. 이는 우리 사회 분열의 씨앗이다.

WHY NOW

건국절 논란은 그 역사가 20년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성격이 묘하다. 시민의 주된 관심사 밖에 있으되 매년 같은 주장이 소환되고 있다. 의미와 파장은 작지 않다. 우리에게 국가란 어떤 존재인가 묻는 주제임과 동시에 19세기 이후의 우리 역사를 어떻게 평가하고 기록할 것인지, 그 관점을 결정할 근간이다. 그런데 역사학자들 중 건국절이 역사적 주제가 아니라고 잘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역사가 아니라 정치이며, 심지어 ‘나쁜 논의’라는 것이다. 누가 건국절을 이야기하는지, 그리고 왜 이야기하는지를 짚어본다.

건국절 논의를 쏘아올린 사람

시작은 2006년 7월 31일 자 동아일보 지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도 건국절을 만들자”라는 제목의 칼럼이 실렸다. 글은 젊은이들에게 언제 나라가 세워졌는지 바로 가르치지 않았다는 문제 의식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중고등학교 역사책에 “대한민국의 건국은 민족의 통일 염원에도 불구하고 강행된 ‘남한만의 단독정부의 수립’이라는 불행한 사건으로 치부되어 있을 뿐”이라며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기념하자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칼럼의 저자는 이영훈 전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다. 대표적인 뉴라이트 학자다.

반일종족주의

정작 이 교수가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던 시기는 건국절 주장이 처음 나온 뒤로 13년이나 지난 2019년이었다. 논란의 책, 《반일종족주의》를 출간했기 때문이다. 책에는 “조선인을 노무자로 동원하여 노예로 부렸다는 주장은 악의에 찬 날조”, “거짓말의 행진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는 등의 내용이 실려있다. 이 교수의 주장은 식민지 근대화론에 기인한다. 이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반문한다. “일제시대에 근대화가 된 게 아니면 우리가 언제부터 근대화되었나요? 일제시대에 진행된 근대화가 왜곡된 근대화라면 진정한 근대화는 언제부터 진행된 것이죠?”

1948년 8월 15일

발제자의 이름에 주홍 글씨를 새겨 주장 자체를 없던 일로 만들 필요는 없다. 또, 그래서도 안 된다. 다만, 주장의 근거와 목적을 톺아 보고 결론을 내릴 필요는 있다. 1948년 8월 15일,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언한다. 그리고 같은 해 파리에서 열린 제3차 UN 총회에서 대한민국은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로 인정받았다. 국제 사회의 인정을 받은 국가는 1948년에 시작되었다는 논리다.

1919년 3월 1일

반면, 이에 반대하는 측은 1919년을 건국의 시점으로 보기도 한다. 3.1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이 우리나라의 시작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근거는 대한민국 헌법에 있다.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명기하고 있다.

특정할 수 없는 날짜

양측 모두 문제가 있다. 1948년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건국의 시점으로 보면 그 이전까지의 역사를 설명할 방법이 없어진다. 일본의 불법적인 강제 점유를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항일 독립운동의 의미가 축소되거나 삭제된다. 특히 임시정부의 존재는 의의만 남겨진다.  반면, 1919년을 기준으로 봐도 어색하다. 국가를 선포했으되 국민, 영토, 주권이라는 국가의 3요소가 다 채워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건국의 의미

정답은 무엇일까? 없다. 근대 국가의 건국 시점은 특정할 수 없어서다. 대다수의 국가는 정부수립일, 독립일, 혁명일 등을 기념한다. 건국은 역사적 흐름과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련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신화의 시대처럼, 불현듯 나타난 반신반인의 존재가 나라를 세울 수는 없다. 단군 할아버지는 하늘을 열고 고조선을 시작했다. 그 시대는 가능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근대 이후로 그렇게 시작되는 나라는 없다. 현대적인 의미의 건국 시점을 특정하고 기념하는 국가 대부분은 혁명 이전의 역사를 부정하는 북한이나 중국 등 공산주의 국가들이다.

주장의 의도

결국 건국절은 특정할 수 없는 추상의 날짜로 남는다. 그런데 이 추상의 개념을 현실의 개념으로 가져오고자 하는 시도가 계속된다. 현실 정치와 연결해 보면 이유가 보인다. 최근 ‘청’에서 ‘부’로 승격된 국가보훈부가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사업이 바로 ‘이승만 대통령 바로 세우기’ 운동이다. 이승만 기념관 건립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1948년 정부 수립을 선언한 이승만 대통령은, 진영 간 대립의 한가운데에 자리한다. 종전 70주년이자 한미동맹 체결 70년이 되는 올해, 반공의 아이콘이자 미국과의 동맹을 성사시킨 이승만 재평가는 유효할 수 있다. 건국절 논란은 결국 한국 보수의 뿌리를 소환해 명분과 명예를 확실히 선언하고자 하는 움직임이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쏘아 올려진, 보수 집결의 신호탄이다.

IT MATTERS

그래서 건국절 논란의 뒷맛은 더 쓰다. 보수가 집결할 의제는 진보가 반발할 의제다. 그리고 그런 의제는 보통 분열을 남긴다. 시민의 일상과 생존을 위해 논의하고 협상할 테이블까지 엎어버린다. 진영의 대립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심용환 역사학자는 2018년 자유한국당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건국절 논란은 “역사적 논쟁이 아니라 정치적 논쟁”이라고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2023년의 우리에게 국가란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할 개념이다. 누군가 창건하여 시혜적으로 하사한 것이 아니다. 국가와 국민이 운명공동체라는 환상도 깨졌다. 한국이 아무리 “심리적 G8”이 되어봤자 내 삶은 G8으로 올라서지 않는다.

건국일 논쟁에 목적이 있다면, 그 목적은 나쁘다. 건국일 논쟁에 목적이 없다면, 이 논쟁은 소모적이며 무의미하다. 우리가 역사를 들춰 찾아내야 하는 것이 있다면 나라를 세워낸 영웅적 ‘국부’가 아니다. 더 나은 미래를 조각하기 위한 레퍼런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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