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DNA를 신봉하는 이유

2023년 8월 22일, explained

절박한 부모들이 나쁜 선택을 한다. 그 선택의 이유는 기울어진 의료 접근권이다.

NOW THIS

왕의 DNA. 중세적 세계관과 현대 과학 개념의 기묘한 조합이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나 ADHD 등을 가진 아이들을 약물 없이 치료한다는 한 사설 기관이 만들어 낸 표현으로, 교육부의 5급 사무관을 통해 세간에 알려졌다. 우리는 이 표현에서 교권 추락을 본다. 내 새끼를 위해서는 어떤 민폐든 끼칠 각오가 되어있는 ‘내 새끼 지상주의’에 불쾌감을 느낀다.

WHY NOW

이 사건은 학부모의, 그것도 힘을 가진 학부모의 갑질로 소비되었다. 그러나 문제의 또 다른 본질이 대중의 분노 뒤에 있다. 절박한 부모들이 사이비 치료에 빠져드는 과정은 개인의 무지나 판단 착오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울증갤러리로 몰린 청소년 우울증 환자들에게도, 오은영 박사의 위로에 공감하며 스스로를 ‘금쪽이’로 인식하는 사람들에게도 이유가 있다.

왕의 DNA

문제의 표현을 사용하는 사설 민간 연구소는 ADHD(주의력결핍장애)나 자폐 스펙트럼, 발달장애 등을 가진 아이들이 ‘극우뇌’형이라며, 좌뇌와 우뇌의 발달 차이가 장애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전국초등교사노동조합이 공개한 해당 부모의 편지를 본 전문가는 이것이 전형적인 ‘사이비 치료’라고 단언했다. 실제로 “고개를 푹 숙여 인사하면 안 된다”는 지침 등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부모의 선택

이런 사이비 치료를 선택하는 부모들은 어리석은가? 권정민 서울교대 유아특수교육과 교수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권 교수는 논문에서 자폐성 장애 아동의 부모는 전문가와 상담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지만, 병원에서는 의사와 대면 시간이 매우 짧아 충분한 상담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또, 장애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 아이가 자폐성 장애 진단을 받게 되면 부모는 정보를 찾아 헤매게 되는데, 대부분 맘카페나 유튜브 등을 이용한다는 점도 문제의 원인으로 들었다. 리뷰나 정보를 가장해 사이비 치료사들이 활발한 마케팅을 펼치고 있는 공간이다.

21세기, 정보 접근권

부모들에게 필요한 것은 공신력 있는 지식과 정보, 믿을 수 있는 전문가의 도움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너무 멀리 있다. 장애가 있는 아이를 어떤 과정으로 양육하고 지원해야 하는지, 사이비 치료가 무엇인지에 관한 정보를 찾는 일은 우리나라에서 쉽지 않다. 정부가 직접 나서 자폐 치료에 권장되지 않는 사이비 치료를 설명하는 미국이나 영국 등과는 차이가 크다. 또, 신뢰할 만한 전문가는 굳이 맘카페 등 온라인 공간에서 마케팅 활동을 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틱톡과 정신 건강의 관계성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커뮤니티나 유튜브로 내몰린다. 그리고 이들의 존재가 검증되지 않은 의학 정보의 가치를 키운다. 더 많은 콘텐츠가 생산된다. 더 많은 사람이 현혹된다. 이 악순환의 고리가 미국에서는 틱톡과 의료계 사이의 갈등으로 터져 나왔다. 최근 미국 의학계에서 ‘해리성정체장애’를 호소하며 병원을 찾는 청소년이 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에게는 ‘다중인격’으로 알려진 이 현상은, 학계에서 아직 논란의 대상이며 전체 인구의 약 0.01~1퍼센트에서만 나타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틱톡에서 이 장애를 소재로 한 동영상이 인기를 끌고, 근거 없는 자가 진단법이 퍼지면서 청소년들이 스스로를 해리성정체장애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트렌드의 부작용

심지어 더 많은 팔로워를 확보하고 ‘좋아요’를 받기 위해 해리성정체장애는 물론 틱 장애 및 투렛 증후군, 자폐 스펙트럼 등 각종 증상을 흉내 내는 콘텐츠도 생산된다는 것이 의학계의 주장이다. 그리고 이러한 ‘트렌드’는 각각의 증상이나 장애를 사소한 헤프닝으로 축소한다.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골든타임을 놓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정신 건강이나 발달 장애에 관한 ‘잘못된 편견’을 키운다. 의학계가 틱톡을 위시한 소셜미디어를 주시하는 이유다.

그들이 만든 세상

다만, 이런 주장을 공개적으로 했던 하버드 의대의 매튜 로빈슨 박사는 틱톡 이용자들로부터 매서운 공격을 받고 있다. 자신의 증상을 밝히고 활동하는 해리성정체장애 인플루언서들에게 ‘가짜’라는 낙인을 찍어 이들을 향한 혐오를 정당화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틱톡에서 형성된 커뮤니티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고 경험을 공유하며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우울증갤러리 바깥에는

그러한 공간은 우울증을 앓고 있는 한국의 청소년들에게도 필요했다. 디시인사이드의 ‘우울증갤러리’로 사람들이 몰렸던 이유다. 하루에 6000여 개 글이 업로드되는 이곳은 지난 4월 한 사용자의 극단적인 선택을 계기로 도마 위에 올랐다. 심리적으로 취약한 이용자들을 상대로 한 온라인 괴롭힘, 가스라이팅, 성범죄 등이 끊이지 않고 벌어졌다는 사실이 공개됐다. 하지만 이 게시판을 닫을 수는 없었다. 공유와 연대감이 필요한 청소년들은 아직도 다른 대안이 없다.

IT MATTERS

감기, 몸살에만 걸려도 항생제를 잔뜩 처방받을 수 있는 한국에서, 자폐 아동을 자녀로 둔 부모도, 우울증에 시달리는 청소년도 갈 곳이 없다. 한국이 정말 의료 선진국이라면 이들에게도 의료 접근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상담이 필요할 땐 그 문턱을 낮춰야 하고 공감과 연대를 구할 수 있는 건강한 공간도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친구와 이웃으로서 이들의 모습이 편견과 왜곡 없이 알려져야 한다. 최근 EBS 아동 프로그램에 등장한 ‘별이’의 모습이 그 좋은 예시가 될 수 있다.

이와 함께 이 시대가 ‘완벽한 인생’을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도 있다. 권 교수의 논문에서 부모들은 아이의 장애를 수용하게 된 순간 사이비 치료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증언한다. 자폐 스펙트럼을 고쳐내야 할 질병이 아니라 아이의 특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마찬가지다. 눈이 나쁜 사람도 있고 걸음이 느린 사람도 있다. 받아들여야 안경을 쓰고 자세를 고쳐 잡는다.

완벽한 인생을 이루지 못한 우리는 종종,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는 위로를 받고 싶어 한다. ‘금쪽이’를 향한 공감도 그런 맥락에서 소비된다. 지금 나의 불행은 다른 누군가 때문이라는 이야기는 달콤하다. 내 아이의 현실이 부모인 내 잘못이 아니라 왕의 DNA, ‘극우뇌’ 때문이라는 설명은 안심이 된다.  그러나 실은 다 알고 있다.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이다. 완벽을 강요하는 사회에는 문제가 있다.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 문제를 떠안은 개인에게 각자도생이 강요된다. 그것도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할 수 없도록 하는 그 모든 시도가 해결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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