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 드리운 트럼프의 그림자

2023년 8월 31일, explained

트럼프가 돌아온다. 세계의 운명을 쥔 미국 유권자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일러스트: 권순문/북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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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년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출신 인물이 머그숏을 찍었다. 현지 시간 지난 24일, 2020년 대선 조지아주 선거 개입 사건으로 기소된 트럼프 전 대통령이 검찰에 출두했다. 전 세계 언론이 트럼프가 비행기를 내리는 순간을 라이브로 보도했고, 그의 머그숏은 발표되자마자 인터넷을 뒤덮었다. 거의 동시에 공화당의 대선 캠페인도 막이 올랐다. 검찰 출두 하루 전날, 폭스 뉴스에서는 트럼프를 제외한 공화당 대선 예비 후보들의 1차 토론이 방송됐다.

WHY NOW

트럼프는 기소됐고, 토론회에도 출연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트럼프에게는 유리한 국면이다. 다가오는 2024년 미국 대선은 트럼프와 바이든의 재대결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트럼프 당선 시, 그가 불러올 세계관은 역시나 ‘위대한 미국’이다. 전기차를 죽이고, 나토(NATO)를 탈퇴해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관세를 올릴 트럼프의 미국은 다시 전 세계를 뒤흔들 것이다. 세계인의 운명을 쥔 것은 트럼프를 찍거나 찍지 않을, 미국의 유권자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나라를, 세계를 바꾸는 한 표에 대해 더 잘 알아야 한다.

‘결코 굴복하지 않는’ 트럼프

트럼프는 91개 혐의로 4차례 형사기소됐다. 그런데 검찰 기소가 트럼프에게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은 낮다. 트럼프는 자신의 경쟁력이 화제성이라는 것, 이를 위해 외부의 적을 이용하는 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X(트위터) 계정에 머그숏 사진을 올리고 ‘선거 방해(ELECTION INTERFERENCE)’,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NEVER SURRENDER!)’라는 메시지를 달았다. 카메라를 노려보는 머그숏은 즉시 밈이 되고 선거 자금 모금을 위한 웹사이트에서는 티셔츠와 커피잔 등 기념품 판매가 시작됐다. 총 710만 달러, 우리 돈으로 94억 원이 순식간에 모였다. 검찰 기소는 지지 세력의 분노를 자극해 그들을 더욱 결집시킬 뿐이라는 걸, 트럼프는 알고 있다.

트럼프 지지자는 누구인가

트럼프는 누가 자신을 지지하는지도 잘 안다.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를 찍은 유권자 성향을 종합하면 ‘시골에 살며 대학을 나오지 않은 백인’으로 요약된다. 특히 백인 비율은 트럼프 지지자 중 88퍼센트로 압도적이다. 정치학자 유혜영 교수는 이들이 ‘변화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흑인과 히스패닉 인구 비중이 높아지고 지위가 향상된 것이 보수적 백인에게는 전통적인 미국 가치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진 것이다. 이민을 막은 트럼프의 과거 회귀적인 정책을 지지자들은 환영했다. 확고한 지지는 공화당도 변화시켰다. 더 이상 공화당은 과거 레이건 시대의 ‘건전 재정, 보수적 사회관, 안보 매파’를 표방하는 ‘세 다리 의자’ 정당이 아니다. 전통적인 보수주의자가 자유 무역을 외칠 때 보호 무역으로의 회귀를 지지하는, 포퓰리스트 트럼프의 정당이다.

트럼프의 공화당

지지자가 변하면 정치인도 변한다. 공화당의 신진 정치인은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고민하고 거기에 맞는 캐릭터를 설정한다. 트럼프 지지를 선언하며 중앙 정치에 나타난 대표적인 인물 마조리 테일러 그린(MTG)은 극우 음모론자이자 트럼프 지지 성향 집단 ‘큐아넌’과 함께하곤 했다. 반유대주의와 백인 우월주의, 푸틴 칭송 등 극단적인 발언으로 인해 모든 상임위는 물론 공화당 내 ‘프리덤 코커스’에서도 퇴출당했지만 지역구에서의 영향력은 여전히 강력하다. 역시 트럼프 지지를 천명했던 조지 산토스는 캐릭터를 내세웠다. ‘홀로코스트 피해자이자 이민자 출신, 9.11 테러 희생자 부모를 둔 자수성가한 금융가 출신의 LGBT 정치인’의 면면은 공화당과 일부 민주당 유권자, 그리고 그의 지역구인 뉴욕 시민들에게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전부 거짓임이 드러났다. 산토스의 등장은 미국 유권자가 무엇에 강하게 끌리는지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사례다. 그것은 정책이 아니라, 강한 캐릭터다.

동조자, 라마스와미

트럼프가 검찰에 출석하기 하루 전, 공화당은 트럼프 없는 예비 후보 토론회로 2024 대선의 막을 연다. 진행자 브렛 바이어는 ‘방에 없는 코끼리’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며 트럼프 이야기를 꺼냈다. 그가 유죄 판결을 받을 경우 공화당 대선 후보로서 트럼프를 지지하겠냐는 질문을 후보들에게 던진 것이다. 여기에 곧바로 손을 든 인물이 있다. 토론회에서 트럼프를 “21세기 최고의 대통령”이라고 평한, 생명공학 기업가 출신의 30대 신인 정치인 비벡 라마스와미다. 크리스 크리스티 전 뉴저지 주지사는 라마스와미를 ‘챗GPT’라고 조롱했다. 정치 아마추어에 대한 괜찮은 조롱이었다. 하지만 트럼프가 대통령이던 시절 내내 비판 칼럼을 써온 기자 수잔 글래서는 이 조롱이 “의도치 않게 공화당의 성격을 드러냈다”고 평한다. 이미 트럼프화된 공화당이 챗GPT처럼 트럼프와 매우 유사한 후보를 내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토론회에서는 트럼프에 비판적인 입장을 내비친 크리스티에게 야유가 쏟아졌다.

경쟁자, 디샌티스

트럼프를 지지할 거냐는 질문에 망설인 후보도 있다. 플로리다 주지사 론 디샌티스다. 공화당 내에서 트럼프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꼽히는 그는 적극적으로 트럼프를 옹호하지 않았다. 트럼프의 지지자가 결집할수록 자신의 표가 줄어드는 디샌티스는 지금 검찰의 기소가 반갑지 않다. 그런데 디샌티스가 대통령이 된 미국은, 과연 트럼프 시나리오와 크게 다를까? 둘은 동성애, 낙태, 총기, 인종, 이민 문제 등에 있어서 크게 이념적 차별성이 없다. 디샌티스는 지난 1월 플로리다 공립 고등학교에서 ‘미 흑인 역사’를 가르치는 걸 금지했고, 학교와 직장에서 인종과 성에 대한 논의를 제한하는 ‘워크 중단 법안’을 추진했으며, 트럼프와 같이 출생 시민권 폐지 공약을 내놓았다. 지난 7월 말에는 경제 공약을 발표하며 중국에 대한 무역 특혜를 폐지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트럼프가 없을 시 가장 강력한 후보가 되는 디샌티스는, 극우 의제를 적극 무기화하고 정치적 권력을 이용해 이념을 강요한다. 이 역시 국가 권력의 비대화를 경계하는 전통적인 보수주의자들과 다른 태도다.

트럼프가 바꾼 미국 사회

트럼프의 존재, 그리고 트럼프를 닮아 가는 미국 보수당은 미국 사회를 뒤집었다. 무역과 이민의 나라였던 미국은 문을 닫았고, 소득세 인하와 오바마 케어 폐지 등으로 인해 서민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트럼프는 대법원 구성도 바꾸었다. 그가 임명한 세 명의 대법관은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어, 여성이 더 이상 임신 중단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게 됐다. 세 대법관은 최근 대학 입학에 있어 인종·성별 차별을 막기 위해 도입된 적극적 차별 철폐 조치(affirmative action)에 대해서도 위헌 의견을 밝혔다. 트럼프가 뒤집은 건 미국 안의 사회만이 아니다. 그의 집권기부터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은 가시화됐다. 바이든 역시 이 기조를 바꾸지 않아 보호무역주의가 전 세계로 퍼졌다. 그리고 노골적으로 소수자를 혐오하는 발언을 세계에 뿜어냈다. 세계 곳곳에서는 제2, 제3의 트럼프가 나오고 있다.

장로 정치의 문제는 나이가 아니다

지금 미국 정치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장로 정치’다. 다음 대선은 81세 바이든과 77세 트럼프가 대결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치인의 나이는 실질적으로 건강 및 판단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한 요건이다. 하지만 정말로 제기해야 할 문제는 정치인의 생물학적 나이가 아니라, 그들이 얼마나 ‘젊은’ 의제를 던지고 있는가다. 2020년 대선에서 2030이 78세의 버니 샌더스를 지지한 이유는, 그가 연로한 정치인임에도 불구하고 메시지와 공약이 젊었기 때문이다. 지금 미국에는 새로운 캐릭터가 아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후보가 없다.

IT MATTERS

트럼프가 쪼갠 사회는 결국 그에게 도움이 될까? 대통령 후보에 오르는 데까지는 순탄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본선에서 이겨 대통령이 될 거란 시나리오는 성립 가능성이 반반이다. 검찰 기소를 ‘정치적 탄압’으로 여기고 결집하는 지지층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극도로 양극화된 미국에서 민주당을 지지하는 측은 트럼프에 대한 기소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즉, 법원의 판단이 나온대도 유권자는 트럼프에 대한 마음을 바꾸지 않을 확률이 크다.

하지만 2016년의 깜짝 당선을 맛보았던 세계 각국은 지금 트럼프가 당선될 상황을 서둘러 대비하고 있다. 독일은 공화당 유력자나 트럼프의 지인과 접근하며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고, 프랑스는 미국의 나토 탈퇴로 인해 무기 지원이 끊길 것을 우려하여 유럽이 자체적으로 무기 생산 역량을 확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한국에도 영향이 있을 전망이다. 오직 미국을 위해서만 돈을 쓰고 싶은 트럼프는, 이전 집권기에 주장하던 것과 같이 주한미군을 철수하거나 주둔 비용을 부담하라고 나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바이든 대통령하에서 만들어진 한미일 관계도 재설정될 것으로 예상된다.

각국 정부는 바쁜데 미국 유권자들은 다가오는 바이든과 트럼프의 대결이 벌써부터 지겹다고 말한다.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이 된다면 세계의 모든 흐름이 뒤바뀔 수 있는데도 유권자들이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은 지겨움이다. 그 근원에는 이미 트럼프가 만든 세상을 겪어 봤기에 느끼는 피로감이 있다. 피곤한 유권자들의 선택이 세계를 뒤흔들 전망이다. 이 모두가 새로움 없는 게으른 정치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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