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연전이 드러낸 시험능력주의

2023년 9월 12일, explained

분교생을 향한 혐오가 고연전에 얼룩을 남겼다. 우리 사회가 불행한 탓이다.

ⓒ일러스트: 권순문/북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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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9월 8일과 9일 이틀간 축제가 열렸다. 고려대학교과 연세대학교의 대항전인 ‘정기 고연전(연고전)’이다. 매년 9월 열리는 두 대학의 친선경기대회는 대학생 스포츠 축제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응원전에 생각지도 못했던 동문이 등장하는가 하면, 암표 거래까지 성행하는 등 그 체급이 만만치 않다. 이 축제가 만들어내는 담론의 크기도 거대하다. 바로 ‘엘리트주의’다.

WHY NOW

거한 축제 뒤에 남은 것은 언론의 비난이다. ‘원세대’와 ‘조려대’로 상징되는 분교생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새삼스레 입길에 올랐다. 그러나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정기 고연전은 출신 학교에 대한 강력한 소속감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행사다. 전통의 힘과 집단의 가면이 얽혀 만들어낸 축제의 애교심은 우리 사회의 시험능력주의와 맞물려 일그러진 정체성을 만들어낸다. 대학생들이 철이 없다는 지적은 잘못됐다. 우리 사회가 불행해서 그렇다.

유구한 전통

고연전의 시작은 1925년 5월 열린 보성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의 정구 경기다. 한국 근대 스포츠 도입과 궤를 같이하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현재와 같은 형태의 정기전은 1965년부터 자리 잡았다. 야구, 축구, 농구, 럭비, 아이스하키의 다섯 종목을 겨룬다. 80년대와 90년대에는 스타 선수들의 등장과 함께 폭발적인 인기도 누렸다. 지상파 방송국을 통해 중계될 정도였다. 볼거리, 즐길거리가 많아진 지금은 경기 자체에 대한 관심도는 줄어들다. 하지만 여전히, 고연전은 존재감 있는 대학 축제다.

학생이 즐기되 학생이 만들지 않는

작년에도 했으니 올해도 한다는 개념이 아니다. 100년 전부터 지켜온 축제다. 각 대학의 구성원은 입학과 동시에 100년짜리 전통을 수용할지, 거부할지 결정하게 된다. 이것이 고연전 문화를 둘러싼 지배담론, “전통계승담론”에 해당한다. 축제든, 스포츠 행사든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전통계승담론은 변화를 용인하지 않는다. 야구를 비롯한 다섯 종목은 금과옥조처럼 지켜야 할 ‘전통’이 된다. 응원전을 비롯한 경기장 밖의 문화도 마찬가지다. 갓 스물을 넘긴 학생들이 왈가왈부할 수 있는 범주를 한참 벗어나 있다. 결국, 시대를 창조하는 축제의 상상력은 허용되지 않는다.

학교 간판으로 만든 마스크

전통과 함께 고연전을 규정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집단’이다. 개인이 집단에 숨어들면 정체를 확인하기 어려워진다. 고대생은 고려대학교라는, 연대생은 연세대학교라는 가면을 쓰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 정체성의 소멸은 구성원으로 하여금 익명성을 획득하게 하며 책임감을 떨어트린다. 음식점 등에 몰려들어 공짜 술과 음식을 강요하는 ‘기차놀이’나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추태를 부리는 등의 행동이 익명성과 책임분산에 기댄 집단 행동으로 규정될 수 있다.

우리 학교의 탄생

그리하여 고연전은 집단에 의해 수행되는 전통으로 기능한다. 고연전의 기획과 진행에 있어 실제 학생회의 역할은 매우 제한적이다. 매년 행사 실무를 담당해 온 대학 행정처가 대부분의 관련 업무를 처리한다. 즉, 이 축제는 학생들의 축제이되 전통이 만든 가상의 매뉴얼에 따라 대학 당국에 의해 열리는 축제에 가깝다. 또한 이 축제는 집단으로서만 즐길 수 있다. 고연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선택을 한 학생들은 소속 학교라는 가상의 공동체를 체감하게 된다. 응원전을 경험하며, 밤거리를 행진하며 그 공동체의 힘을 목격하게 된다. 스포츠 경기가 근대 국가의 실체를 학습하는 데에 이용되었던 것과 같은 원리다. 애매모호했던 소속감이 명징해진다. 단단해진다.

시험능력주의라는 종교

그런데 대학에의 소속감이 서열주의와 만나면서 왜곡된 배타성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서열주의는 우리 사회에 팽배한 “시험능력주의”와 맞닿아 있다. 입학 시험, 입사 시험, 공무원 시험, 각종 국가고시까지. 시험 결과가 곧 신분으로 고착화하는 시스템에 우리는 너무 익숙해져버렸다. 승자는 부모 세대와 비슷한 삶을 영위할 수 있지만, 패자는 안정된 신분을 획득하지 못한 채 될 때까지 시험에 재도전하거나 계급 사다리에서 추락하는 수 밖에 없다.사회학자 김동춘은 저서 《시험능력주의》에서 “지금 한국은 ‘시험선수’ 엘리트들이 권력과 부를 차지하고, 그 자녀도 좋은 학교 보내서 지위까지 세습하는 나라가 됐다”면서 능력주의가 신흥종교, 도덕적 표준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2023 계급의 조건

때문에 소속 학교의 순위는 오롯이 나의 노력으로 획득한 계급이 된다. 나와는 급이 다른 수능 점수를 받았던 분교 학생들이 같은 계급이어서는 불공정하다. 나와 같은 계급이 되기에 그들의 노력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겼고 그들은 졌기 때문에 우리가 같은 계급일 수는 없다. 따라서 고연전과 같은 ‘우리’들의 축제에서 그들이 소외되는 것은 당연하다. 분교라는 이름으로 입장이 허락되었을지라도 그들은 ‘원세대(연세대 미래캠퍼스, 원주시 소재)’, ‘조려대(고려대 세종캠퍼스, 세종시 조치원읍 소재)’ 소속일 뿐이다.

철학이 사치가 되는 시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로 촉발되었던 인천국제공항 사태가 겹쳐 보인다. 이를 두고 청년 세대의 과도한 개인주의로 해석하는 시각이 있었다. 지독한 오독이다. 한눈팔면 진다. 20년을 넘게 경험했을 우리 사회가, 지금의 대학생들에겐 그렇다. 때문에 수치화된 시험만으로 사람을 선별하거나 배제하는 시스템 자체를 의심할 철학적 여유는 허락되지 않는다. 그런 여유는 오히려 태어날 때부터 삶의 여유가 보장되어 있는 소수에게나 가능한, 사치스러운 얘기다. 절차 자체의 공정함에 의문을 제기하기보다는 절차의 수행 과정이 공정했느냐를 묻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IT MATTERS

정기 고연전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심지어 매년 강화하는 엘리트주의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높은 수능 점수는 인정받을 만한 성과다. 그러나 철학자 악셀 호네트는 다양한 인정 방식이 공존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양한 개별적 존재의 삶과 맥락이 수능 점수라는 잣대만으로 간편하게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배부른 자들에게나 허락된 이상론이다.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는 그렇다. 의학대학과 법학전문대학원이 아니면 안정적인 미래를 약속받을 수 없는 우리 사회 말이다. 28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한 올해 수능시험 N수생 비율은 이런 통념을 증명하는 뼈아픈 수치다.

상위권 대학일수록 공고하게 자리 잡은 학력위계주의는 86세대의 학벌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동문 선후배가 서로를 챙기고 끌어주는 그 시대의 인정주의는 지금의 대학생들에게는 편법이며 불공정일 뿐이다. 반면 출신 대학의 가치에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고, 그에 따른 합당한 사회적 지위를 요구하는 학력위계주의는 대학이 취업 시장의 성실한 공급자를 자처한 순간 부정할 수 없는 법칙이 되었다. 기회는 너무 적고 기준은 너무 높다. 이 시장에서 대학은 영원히 ‘을’일 수밖에 없다. 학생들에게는 스스로의 브랜드 가치를 인정하고 그만큼을 주장하는 것 외에 선택지가 없다. 과연 ‘원세대’와 ‘조려대’를 창조한 것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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