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채, 취업, 계급

2023년 9월 14일, explained

공채 문은 좁아진다. 청년은 취업하지 않는다. 새로운 사다리가 필요하다.

ⓒ일러스트: 권순문/북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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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들의 하반기 공채 시즌이 시작됐다. 삼성그룹, 기아, 현대글로비스, CJ 등 대기업이 9월 들어 신입 사원 공개 채용에 나선다. 취업 문턱은 높아졌다. 전체 채용 규모가 예년에 비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최근 전국경제인연합회 설문 조사에서 대기업 10곳 중 6곳은 채용 계획이 없거나 아직 계획을 수립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채용 방식도 대규모 공채보다는 수시 채용으로 전환하고 있다.

WHY NOW

대졸 신입 채용 경쟁률은 평균 81 대 1로 예상된다. 지난해 77 대 1보다 높아진 수치다. 전체 취업자 수가 증가하는 가운데, 청년 취업자 수는 10개월 연속 감소세를 보였다. 경쟁률은 높아지고 고용은 둔화하며 정부는 대응안을 찾겠다고 하지만, 청년 백수들에게는 이 말이 와 닿지 않는다. 청년들은 취업하지 않는 것일까, 취업하지 못하는 것일까. 고용 트렌드와 한국의 경제 구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공채 절벽의 시대

기업은 공채를 줄였다. 5대 기업 중 정기 공채를 남겨둔 기업은 이제 삼성이 유일하다. 단기간에 많은 인력을 뽑을 수 있는 공채는 대기업이 사업을 확장하던 시절에는 효율적인 채용 방식이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비효율을 낳았다. 대기업 공채가 고시처럼 변해 가며 스펙 경쟁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어렵게 회사에 들어가도 기업이나 직무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사원도 발생했다. 기업은 오버 스펙을 쌓았지만 직무 지식은 없는 신입보다는, 직무에 딱 맞는 온스펙 신입을 받기 위해 공채를 폐지하고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채용하는 방식으로 전환한다. 합격과 탈락을 좌우하는 것은 전공 지식이 아니라 직무 역량이다. 경험이 중요해지면서 경력이 있는 중고 신입이 유리한 판이 되었다는 분석이 나왔다.

중소기업 안 가는, ‘노는’ 청년들

청년들은 중소기업에 가서 스펙을 쌓고 대기업에 입사하면 될까? 말처럼 쉽지 않다. 대학 혹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취업 상태인 ‘청년 백수’는 지금 126만 명에 달한다. 그러나 청년층의 중소기업 선호도는 15.7퍼센트에 그친다. 중소기업은 반대로 구인난에 허덕인다. 여기서 한국 청년 실업 문제의 본질이 드러난다. 일자리 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고용 시장에서는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는 미스매칭 현상이 벌어지고 있고, 이로 인해 청년의 취업 시기는 점점 지연된다. 중소기업에 입사하고 싶지 않은 청년은 학원에서 돈과 시간을 써가며 몇 년이 걸리더라도 대기업이 원하는 스펙에 맞추기 위해 치열한 취준 과정을 거친다.

첫 직장의 중요성

취업 과정에서 강조되는 것은 ‘첫 단추’다. 어쩌다 시작하게 된 커리어는 내 직무와 업계를 결정한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첫 직장은 신분처럼 작용한다. 대기업 취업 문을 뚫으면 이직 시에도 대기업으로 갈 수 있다. 정규직으로 커리어를 시작했다면 그 다음 직장에서도 정규직일 가능성이 높으며, 첫 직장의 월급이 높을수록 다음 직장의 월급도 높아진다. 그만큼 구직 기간이 길어져도 첫 직장을 합리적으로 선택하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지금 청년들은 대학교에 가자마자 즐길 새도 없이 취업 준비를 하고 있다. 그 시간이 얼마나 길어지더라도, 대기업 정규직이 되기 위해 사회 진출을 끝없이 유예한다.

노비를 해도 대감집 노비를 해라?

지금 청년층은 직장에서 높은 보수를 원한다. 물가가 오르고 지갑이 비어가는 시기에, 매월 통장에 꽂히는 월급은 퇴사를 결정할 만큼 중요한 삶의 조건이 됐다. 그렇다고 연봉이 전부는 아니다. 연봉이 만족스러워도 복지가 부족하고 꼰대로 가득한 회사에 청년들은 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아이러니컬한 점은 연봉이 높은 대기업이 기업 문화는 어떨지 몰라도 워라밸을 보장하고 복지도 좋다는 점이다. 삼성전자와 SK, 포스코 등 대기업은 격주 주 4일제 근무를 선제적으로 도입했다. 복지 제도로써 통신비와 포인트, 자기계발비와 육아 혜택도 주어진다. 청년 구직자들은 가치관이 맞으면 중소기업에 다닐 의향이 있다고 얘기하지만, 중소기업에 지원하지 않는 이유를 물으면 연봉과 복지를 가장 최우선으로 꼽는다.

더 좋은 일자리를 찾는 세계의 청년층

세계의 청년에게도 일은 하나의 화두다. 중국과 베트남, 인도 등 아시아 국가의 공장들은 최근 심각한 인력난을 겪고 있다. 청년층이 공장 취업을 외면하기 때문이다. 이 국가의 젊은이들은 부모 세대보다 교육 수준이 높다. 고등 교육 기회가 넓어지며 청년층은 공장보다는 IT 전문직, 사무직이 되기를 원한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젊은 세대의 반(反)일 성향은 안티워크(antiwork)라는 현상으로 진화됐다. 대퇴사 열풍과 ‘레이지걸잡(#lazygirljob·게으른 소녀 직업)’ 트렌드는 일과 삶이 균형을 이루는, 압박이 없는 직업을 선호하는 요즘 세대의 직장 선호를 보여준다.

거세지는 인플레이션 압력

청년층이 어떤 직장을 선호하는가. 이 물음은 개인의 안녕을 넘어 우리의 지갑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들이 직장을 떠남으로써 발생하는 비용이 소비자 물가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베트남 공장의 임금은 2011년 이후 두 배로 올랐다. 그 영향으로 바비 인형 제조사인 마텔과 장난감 업체 해즈브로, 스포츠 용풉 업체 나이키는 줄줄이 가격 인상을 발표했다. 사회가 고도화할수록 교육 수준은 높아지고 젊은 인력은 귀해지며 인건비는 올라간다. 1990년대부터 아시아 청년들의 값싼 노동력에 의지했던 지구촌은 이제 초저가 시대와 이별하고 계속되는 인플레이션을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

사다리 아래에서

좋은 일자리의 기준이 대기업이 된 한국,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 가는 사다리가 끊긴 한국에서는 좀 더 큰 차원의 문제가 벌어진다. 노동이 비효율적으로 배분되면서 경제 전반의 생산성이 하락하고, 결과적으로 국내총생산이 잠식하게 되는 문제다. 2010년대 들어 우리나라에서 생산성이 높은 산업과 낮은 산업 간의 노동 이동은 더욱 경직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결과 전 산업의 평균 임금 수준은 약 1.8퍼센트 축소됐고, 가계 후생도 0.6퍼센트 잠식되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가르는 노동 시장 이중 구조가 우리 모두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셈이다.

IT MATTERS

더 잘 살고 싶은 한국 사람들에게 공채는 사회가 제공할 수 있는 공평하고 합리적인 방안 중의 하나였다.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잘 살 수 있을 거란 믿음은, 슬프게도 그것을 쟁취한 사람만의 특권이 됐다. 소설가 장강명은 저서 《당선, 합격, 계급》에서 공채 제도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배제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공채 제도, 이것이 특권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기업 채용 방식이 직무 중심의 수시 채용으로 전환되는 흐름은 긍정적이다. 대기업 선호도는 여전히 높겠지만, 중소기업에 입사했다가 대기업으로 이직할 수 있는 루트가 만들어지는 것만으로도 취업이 지연될 일이 어느 정도 사라질 것이다. 중소기업 입장에서도 일정 수준 활력이 생길 일이다.

하지만 이상적인 방향이다. 여기에 선행되어야 할 것은 중소기업이 괜찮은 일자리가 되는 것이다. 중소기업은 대기업의 인력 양성소도, 대기업에 못 가서 울며 겨자 먹기로 가는 곳이 아니어야 한다. 유인이 필요하다. 한국의 노동 시장 이중 구조를 타파하기 위해 제안되는 한 가지는 ‘사회적 직무급’이다. 비슷한 일을 하면 비슷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원칙하에 운영되는 이 시스템하에서, 임금 협상은 기업 내에서 이뤄지지 않는다. 산업별로 노조가 비슷한 직무를 나누고, 그 안에서 숙련도별로 등급을 매긴다. 임금 결정권은 기업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가 합의로 결정하는 것이다. 독일에선 이미 타리프시스템(Tarifsystem)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된 제도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대기업에 기대하는 역할 1순위는 ‘일자리 창출’이다. 이 답변에서 엿볼 수 있는 욕망이 있다. 단순히 대기업에서 주는 임금만큼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다.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들만큼은 존중받고, 일터에서 행복하고 싶다는 욕망이다. 청년들은 취업하지 않고 있다. 동시에 취업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개인의 선택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즉, 청년의 취업이 늦어지면서 발생하는 비용도 우리 모두가 감당해야 한다. 인플레이션, 불평등, 그리고 박탈감의 문제 등 많은 것이 걸려 있다. 다양한 삶에 대한 상상력을 만드는 것은 선의나 환상의 영역이 아니다. 임금 제도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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