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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 사기 피해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규모가 심상치 않다.
수원에서는 671세대, 810억 원 규모다.
대전은 3천억 원대로 추정된다. 서울 관악구를 중심으로 한 대학가에서도
의심 사례가 나왔다. 올해 전세 사기 피해자는 4천 명, 피해액은 5천억 원에
달한다.
WHY NOW
전세금을 떼이는 사고는 20년 전에도, 30년 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대규모 전세 사기가 횡행하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전세 계약은 개인 간의 거래다. 그리고 전세 사기는 그 과정에서 발생한 범죄다. 그러나 이 문제를 사적인 영역에만 놓고 보면 이해할 수 없다. 대규모 전세 사기는 국가라는 공범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작전이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청년 세대
전세 사기는 세대 범죄에 가깝다. 정확히는
청년 세대를 중점적인 먹잇감으로 노린다. 대부분 사회 초년생이나 신혼부부로 부동산 거래 경험이 없거나 적다. 공인중개사의 설명을 믿고 따르기 쉽다. 집을 매수하거나 아파트 전세로 들어가기에는 자본금이 충분치 않다. 전세자금 대출로 빌라 전세를 택하게 된다. 대규모 공단지역을 끼고 있었던 인천
미추홀,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등 대규모 사업장이 많았던 화성시
동탄신도시, 대학생들이 몰려 사는 관악구 등지 등이 전세 사기 주 무대에 포함되었던 이유다.
수법은 무자본 갭투자
대규모 전세 사기의 기본적인
수법은 ‘무자본 갭투기’와 ‘동시 진행’이다. ‘무자본 갭투기’는 집주인이 자기 돈은 들이지 않고 전세 보증금과 대출만으로 집을 사는 형태를 이야기한다. ‘동시 진행’은 전세 계약과 매매를 한 자리에서 동시에 진행하는 수법이다. 세입자에게 시세보다 높은 전세 보증금을 받아 바로 그 돈으로 매매 계약을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시세보다 높게 전세 계약이 가능할까. 여기에 일명 ‘작전 세력’들이 등장한다. 일부러 높은 가격으로 빌라 한 가구를 매매해서 시세를 조작하는 것이다.
신종 수법 공동담보
서울 강서구, 인천 미추홀구의 대규모 전세 사기가 공론화하면서 전세 세입자들도 계약에 있어 신중을 기하게 되었다. 아무리 사회 초년생이라도 집주인의 등기부 등본을 확인해야 한다는 사실이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사기의 수법은 더욱 교묘해졌다. 대표적인 것이 ‘공동담보’다. 일명 쪼개기 대출이다. 예를 들어 25억 원짜리 빌라 건물에 10가구가 있다면, 2가구씩 쪼개서 담보로 잡히고 대출을 받는 식이다. 101호 세입자는 등기부 등본을 확인하고 집주인의 빚이 5억이라고 생각한다. 빌라 전체의 가격을 생각하면 위험하지 않은 규모다. 안심한다. 하지만 실제 집주인은 빌라를 5등분하여 총 25억의 빚을 졌다. 위험한 규모의 빚이다.
공인중개사도 가담
이런 사실들을 숨기고 축소해야 세입자를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전세 사기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 바로 공인중개사다. 수원 전세 사기 의혹의 피의자인 정 모 씨 일당의 재무제표를 분석해 보면 자기 자본 비율이 1.9퍼센트에
불과하다. 정 모 씨는 ‘수원 왕 회장’으로 불리며 군림했지만, 세입자의 보증금으로 건물 쇼핑을 하며 세를 불렸을 뿐이다. 은행 빚과 전세 보증금으로 잔치를 벌이다 세입자가 들어오지 않으니 자금 흐름에 문제가 생겼다. 공인중개사들을
끌어들였다. 이들은 등기부 등본상의 빚은 문제가 없다, 집주인에게 재산이 충분하다며 세입자를 받았다. 이들 중 한 명은 정 씨의 아들이었다.
너무 먼 전세사기 특별법
지난 7월부터 전세사기 특별법이 시행되고 있다. 그런데 피해자로 인정받기가 어렵다. 임대인이 ‘의도적’으로 사기를 벌였다는 점을 피해자가 입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다세대 주택은 해당하지 않는다. 피해자들이 원하는 것은 떼여 버린 전세 보증금을 먼저 구제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민간 거래에서 발생한 피해를 정부가 구제해 준다면 시장 경제 원리와 상충한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이상한 빚, 전세자금 대출
전세 사기를 가능하게 한 것은 정부 차원의 제도다. 2008년 이명박 정부에서 시작된 ‘전세자금대출제도’가 그것이다. 1억 원 한도였던 대출 규모는 전세 보증금의 90%까지로 확장했다. 대책 없이 가계 대출이 늘어나면 경제 전반이 흔들린다. 그래서 갚을 능력이 있어야 빚을 질 수 있다. 소득요건 등을 따지는 것이다. 집을 살 때도 주택담보대출에 제한을 둔다. LTV(주택담보인정비율),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전세대출에는 ‘서민 주거 지원’이라는 명분 아래 별다른 규제가 없다. 가계 대출에도 잡히지 않는다.
작년 말 기준으로 약 170조 5000억 원의 불안한 자금이 부동산 시장에 흘러들어 있다. 그중 절반 이상이
청년세대의 몫이다.
전세 사기의 공범
이 과정에서 이득을 보는 것은 금융권이다. 공적 기관이 전액 보증해 주는 전세자금 대출은 앉아서 돈을 벌 수 있는 장사다. 돈 떼일 걱정은 없고 이자는 꼬박꼬박 들어온다. 그러니 여신 심사도 허술해질 수밖에 없다. 집주인은 세입자를 통해 별다른 심사 없이 대출받는 꼴이다. 그래서 전세 사기가 가능해진다. 능력이 없는데 몇백 명의 세입자를 통해 대출받아 집 장사, 임대 장사를 하는 것이 대출 사기의 본질이다. 전세제도에 혜택을 주며 경기를 밀어 올리려던 정부는, 그러나 그에 상응하는 안전망을 만들지 않았다. 이쯤 되면 전세 사기 사태의 공범은 정부라고 할 수 있다.
IT MATTERS
전세제도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은 것은 70년대 고성장 시기다. 목돈이 스스로 돈을 불리는, 개발과 투기의 시대였다. 전세는 집주인과 세입자가 윈-윈할 수 있는 제도였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졌다. 저성장 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이제 전세 제도는 정부가 부동산 시장에 자금을 지원하는 우회로가 되었다. 전세자금 대출이라는,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가계대출을 정부가 보증하고 있다. 시장개입이다. 이 문제부터 해결되어야 지금과 같은 대규모 전세 사기가 성립하기 어려워진다.
그런데 정부의 정책은 정반대다. 집값 상승세가 완화하거나 떨어지면서 전셋값이 따라 내렸다. 그러자 전세 시세가 기존 보증금보다 낮은 ‘역전세’ 현상이 발생했다. 다음 세입자를 받아도 나갈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온전히 돌려주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집주인이 집을 팔아야 한다. 그것이 시장 원리다. 그러나 정부는 여기에 다시
개입했다. 대출을 받아 보증금을 돌려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집값 하락을 정치적으로 감당할 수 없다는 계산 때문이다.
전세 사기는 사회적 재난이다. 국가가 만든 부동산 대책이 대규모의 집 장사를 가능케 했다. 가깝게는 피해자 구제를 서둘러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전세자금 대출 정책으로 불어날 대로 불어난 거품을 걷어내야 한다. 아플 수 있겠지만, 그냥 두면 터져버린다. 상처에 낀 고름 정도는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