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은 왜 노잼도시가 되었나
7화

에필로그 ; 당신의 #가 짓는 도시

(…)

간이역에서 속도를 늦추는 열차의 작은 진동에도
소스라쳐 깨어나는 사람들, 소지품마냥 펼쳐보이는
의심 많은 눈빛이 다시 감기고
좀더 편안한 생을 차지하기 위하여
사투리처럼 몸을 뒤척이는 남자들.
발밑에는 몹쓸 꿈들이 빵봉지 몇 개로 뒹굴곤 하였다.

그러나 서울은 좋은 곳입니다. 사람들에게
분노를 가르쳐주니까요. 덕분에 저는
도둑질 말고는 다 해보았답니다.
조치원까지 사내는 말이 없다.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의 마지막 귀향은
이것이 몇 번째일까, 나는 고개를 흔든다.
나의 졸음은 질 나쁜 성냥처럼 금방 꺼져버린다.
설령 사내를 며칠 후 서울 어느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한들 어떠랴. 누구에게나 겨울을 위하여
한 개쯤의 외투는 갖고 있는 것.

사내는 작은 가방을 들고 일어선다. 견고한 지퍼의 모습으로

(…)

〈鳥致院(조치원)〉, 기형도[1]


나(시인)에게 달걀을 건네는 사내는 조치원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서울에서 생활하다가 고향인 조치원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도둑질 말고 뭐든 해봤다던 서울 생활이 사내에겐 즐거웠던 것 같지 않다. 다정한 사람이지만, 사내의 표정과 말투에는 ‘금의환향’의 기쁨이 아니라 쓸쓸함과 수치심이 느껴진다.

그 기차에 함께 타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처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서울에서 좀 더 편안한 생을 차지하려고 꿈을 꿨던 사람들이 가져본 건 고작 싸구려 빵 같은 것들뿐이다.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오는 사투리 때문에 같은 고향 사람임을 눈치챘지만, 서로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는 외로운 사람들. 서울 갈 때 가졌던 꿈이나 바람은 초라해졌고, 돌아가는 고향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해 불안하다. ‘이번에도’ 나를 받아주는 고향, 조치원이 있다는 건 안도감을 주지만, 서울 생활이 남긴 상처와 패배가 남긴 수치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런 마음을 숨기기 위해 견고하게 입에 지퍼를 채우고 침묵하려는 ‘디나이얼 지방출신’에게 ‘#로 도시 짓기’를 권한다. 힙하고 핫한 도시 매력이나,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아름다움과 새로움은 서울에 내어 주고, 당신이 발견한 ‘진짜의 것’으로 #를 달아, 그 성과를 여러 사람과 공유하는 것이다. 거리를 걷고, 좋아하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뒷산에 올라 조금은 멀리 떨어져 동네를 바라보고, 길모퉁이 노랗게 익은 모과나무 열매를 사진에 담고, 그때의 느낌을 글로 남겨 보자. 그저 “마음을 끄는 장면을 만나면 멈춰 서서, ‘내가 사랑하는 도시의 구석들’”이란 제목으로 인스타그램이나 브런치스토리에 올릴 포스팅을 작성하는 것에서 시작해도 좋다.[2]

우리는 골목을 걸으면서 길이 좁아지고 휘어지는 모양을 알아챌 수 있다. 동네마다 내세우는 식재료와 그 이유를 식당 주인에게서 들을 수 있다. 우리 동네 옆에는 언제, 어떤 시설과 집들이 들어섰는지, 꼭 필요한 공간과 서비스를 우리 동네는 옆 동네와 어떻게 공유하고 있는지 살필 수 있다. 하필 모과나무가 많은 이유, 어떤 사람들이 살길래 저렇게 꽃과 나무를 잘 가꾸는지에 대한 얘기를 듣는 것도 흥미롭다. 어린 시절 자주 가던 소풍지의 역사·문화적 아이러니를 곱씹어 볼 수도 있다. 보문산 공원[3]은 일본 사람이 만든 공원이다. 그의 이름을 따서 이곳을 ‘스지 공원’이라 불렀다. 일제 강점기, 한반도 지배를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건설된 대전역 덕에 도시로 발전한 곳이 대전이다.[4] 어린 시절의 행복과 즐거움이 식민 통치의 흔적 안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사실에 누군가는 충격을 받는다. 식민화의 결과물을 문화로 향유하는 모순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지를 생각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도시 탐구 기획이 된다.[5]

도시학 전문가들은 이 관찰과 탐구의 과정을 ‘도시 기록’이라 부른다.[6] ‘도시 기록’이란 거창한 이름을 내세웠지만, 용기 있는 접근과 독특한 시각과 상상력에 근거한 일종의 관찰 일지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낯선 곳에 구경 온 관광객만 장소 방문 후기를 남기고, 전문가만 도시 기록을 남기란 법은 없다. 후기를 쓰고, 도시 기록을 남기는 방법과 과정은 너무 많고 다양해서, ‘1인 1방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일 새로운 장소를 찾는 사람이 있지만, 한 장소를 깊이 탐구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누구나 마치 홍상수 영화의 주인공처럼 한 장소에 자주 가서, 새로 만나는 사람들과 생긴 일을 관찰하고 기록할 수 있다. 장소는 같지만, 그 안에 있는 존재들과 발생한 사건이 달라지면, 장소는 순간순간 낯설어지기도, 익숙해지기도 한다. 그때 한 장소의 매력이 보인다.

언뜻 회색빛만으로 보이는 도시도 멈춰 서서 바라보면 다채로운 빛깔이 보인다. 도시의 빛은 혼합돼 있기 때문이다. 오래된 도시 상점 가판대는 그만큼이나 오래된 빛깔의 물건들이 매대를 채우고 있고, 낡은 색감의 간판과 홍보물은 주인할머니의 옷이나 화장과 묘하게 대비를 이룬다. 눈여겨본 적 없던 도시의 구석은 흡연자들이 밀려나 모여 선 ‘섬’이라는 걸 알게 되고, 붉은 등이 줄줄이 켜진 골목길의 의자들은 누군가가 쉬는 곳이 아니라, 누군가를 부르는 곳이라는 걸 알게 된다. 재개발 후 아파트가 세워지면 그럴듯하게 한 자리 내어 주겠다고 약속받았던 옛 집성촌의 비석들이 공터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착착 쌓여 있는 모습은 매장되기 전 관(棺) 같아서, 애도하게 된다.

도시 기록자들은 도시의 순간을 잡아채 모으는 수집가(collector)다.[7] 아침 7시 출근길, 문득 올려다본 파란 하늘은 잠시의 위로가 된다. 노을이 지면서 만들어 낸 건물 위 검은 그림자와 황금빛 햇살의 대비, 카페의 가장 어두운 자리에서 밝은 밖을 바라보는 시선에 걸린 사람들의 까만 실루엣이 슬픈 안정감을 준다. 할머니들이 모여 사는 낡은 동네엔 정갈하게 가꾼 화단이 많다. 반질반질하게 닦아 낸 작은 창과 문고리는 이 동네에서 그간은 발견하지 못했던, 서먹한 이면이다. 당신은 이 모든 걸 혼자서 알아낼 수 있다.

전문 사진작가나 소설가, 학예사가 아니어도 우린 도시의 어떤 곳에서 찾아낸 모습과 순간의 감정을 사진에 담고 글로 쓸 수 있다. 예술가처럼 작품을 만들진 못해도, 예술적인 감성을 가지고 작품을 감상하고 수집하는 컬렉터처럼 도시를 감상하고 그 결과를 정리해 차곡차곡 수집할 수 있다. 수집의 결과물은 기성품이 아닌, 도시의 속성을 직접 꿰뚫어 낸 창작물이다. 내가 만들었으니, 포장지에 현혹될 일도 없다. 사기꾼에게 속아 엉뚱한 걸 고를 위험도 없다. 나의 도시 기록은 내가 나를 위해 ‘맞춤형’으로 제작한 ‘나만의 도시’다.

이런 도시 기록은 만드는 과정과 그 결과물에서 나만이 갖는 사회적 위치와 관점, 독특함을 드러낸다. 도시의 구석과 숨을 곳을 찾는 내 시선은, 실은 사회적으로 환영받지 못하는 흡연자와 소수자의 위치를 드러낸다. 하늘이 보이는 도심이 위로가 된다는 건 내가 피로한 직장인이라는 점을 상기시키고, 아무도 관심 없는 비석들을 보러 가는 건, 내가 사라진 사람들과 장소에서 내 뿌리를 찾기 때문이다. 낙천적인 내 성격은 도시의 색깔과 사물의 유머러스한 표정을 잡아내는 훌륭한 방법론이다.

그러니까, 도시 기록의 본질은 수동적인 ‘구매’가 아니라 능동적인 ‘체험’이다. 요약본을 구매하지 말고, 작은 부분이라도 도시를 느끼고 이해하고 마침내 소유하자. 도시의 이 공간이 좋았다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면, 왜 그렇게 느끼는지 생각해 보자. 타인의 평가와 수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나만의 느낌을 솔직하고 용기 있게 들여다보자. 소수의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특정한 멋짐과 아름다움, 공간 규정으로부터 독립하려 애써 보자. 패권을 쥔 소수, 혹은 엄청난 학습이 가능한 기계AI가 골라낸 정돈된 아름다움을 들이밀며 내게 구입을 권유하는 시대다. 이렇게 제안된 ‘미의식’에서 독립해야만, 누군가 만들어 놓은 미의식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8]

현대 민주주의의 근간은 말과 글을 스스로 이해하고 판단하는 시민이다. 도시에 대해, 도시 공간과 장소에 대해 스스로 이해하고, 판단하고, 자신이 느끼고 경험한 걸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도시 공간의 민주주의도 실현되지 않을까? 힘과 지식을 갖춘 누군가만 공간을 진짜로 이해한다면, 그를 기반으로 판단하고 도시를 계획한다면, 그 도시는 그들의 것이지 내 것은 아니다. 결국 만들어지는 건 ‘내’가 아닌 ‘그들’이 원하는 도시다.

이 도시는 내가 생각한, 내가 원하던 도시가 아니라고 부인(deny)’하는 게 아니라, 이미 주어진 도시의 아름다움과 재미를 먼저 거부(deny)해 보자. ‘노잼도시’가 아니라고 부인하기 전에, 그들이 없다고 규정한 ‘재미’를 먼저 거부해 보자. 당연하게 불리는 이름과 남이 만들어 준 도시 정체성을 거절하고 스스로 도시의 아름다움과 재미를 찾는 게 필요하다. ‘디나이얼 지방출신’은 스스로를 부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도시에 대한 수동적 태도를 거절하는 사람일 것이다. 완전히 길들여지지 않으려 버티면서, 완전히 누군가의 것이 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들은 자기만의 시선을 개발하고, 스스로 찾아낸 장소에 대한 #를 쌓으면서 도시를 진짜 살아간다.

지방 도시의 고유함과 미래 모습은 이렇게 부정과 거절, 용기와 상상력을 발휘해 ‘#로 도시를 짓는, 디나이얼 지방출신’에 달려 있다.
[1]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1997, 19~20쪽.
[2]
‘동네에서 영감을 얻는 도시 기획자’ 채아람(@ahramchae)은 〈나의 동네 새롭게 발견하기〉 프로젝트를 통해 살고 있는 동네를 ‘의식하고 기록하는’ 작업을 신청자들과 함께했다. 일상의 공간을 그냥 지나치지 말자는 가벼운 제안은 장소와 관계를 맺고 확장하는 첫걸음이 된다.
[3]
대전 중구에 있는 대전의 대표적인 공원이다. 봄 벚꽃과 산책로, 보문산 전망대 등이 유명하다.
[4]
고윤수, 〈식민도시 대전의 기원과 도시 공간의 형성〉, 《도시연구: 역사·사회· 문화》 27호, 2021. 7~39쪽.
[5]
손미, 《삼화맨션》, 월간토마토, 2021, 86쪽.
[6]
도시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패트릭 게데스(Patrick Geddes)는 생물처럼 살아 숨 쉬는 도시를 탐구하는 실천 작업을 강조했다. 게데스는 ‘지리 조사(geographic survey)’와 ‘역사 조사(historic survey)’를 도시 방법론으로 소개했는데, 물리적 공간과 사람, 그들이 하는 일과 발생한 사건을 섬세하고 통합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렵게 들리지만, 우리가 매일 일상생활 속에서 하는 일이다.
[7]
2023년, 필자는 대전과 세종시민 열 명, 사진작가 김재연과 함께 ‘지역적인 것’을 발굴하고 미학적으로 완성도를 높여 표현해 내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열 명의 ‘컬렉터’들은 자기만의 시선과 방법으로 대전과 세종의 장소를 탐색하고, 그 결과로 찾아낸 ‘장소성’ 혹은 ‘지역적인 것’을 사진과 짧은 글로 표현한다. 한 명의 컬렉터가 열 장의 사진을 제출해 사진집으로 엮일 예정이다. ‘10명×10개의 장소 푼크툼(punctum)’이 생겨나길 기대하고 있다.
[8]
서경식(박소현 譯), 《고뇌의 원근법》, 돌배게, 2019, 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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