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에서 진실을 찾는 사람들

2023년 11월 29일, explained

탈진실의 시대다. 사전 속에는 진짜 진실이 있을까.

1888년 메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 G & C 메리엄 앤 컴퍼니에서 발행한 웹스터 사전 광고. 사진: Jay Paull, Getty Images
NOW THIS

Authentic. 우리말로는 ‘진짜’, ‘진정’. 혹은 ‘진실’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단어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전 출판사인 메리엄-웹스터가 2023년을 요약하는, 올해의 단어로 뽑았다. 메리엄-웹스터는 “어센틱(Authentic)이 바람직한 것이지만, 논쟁의 대상이기 때문”이라며 올해 이 단어에 대한 검색이 상당한 증가세를 보였다고 부연했다.

WHY NOW

올해의 단어에는 당시의 정서와 궁금증이 적나라하게 반영된다. 2008년의 단어는 구제 금융, 2017년의 단어는 페미니즘, 2021년의 단어는 백신이었다. 올해 사람들은 어센틱을 알고자 했다. 들여다볼 것은 어센틱이 나온 맥락이 아닌, 어센틱을 사전에서 찾아본 사람들의 욕망이다. 왜 사람들은 사전에서 진실의 단서를 구하려 했을까.

2005년

2005년, 메리엄-웹스터가 선정한 올해의 단어는 ‘트루시니스(truthiness)’였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 않고 자신이 믿는 것을 팩트로 받아들이는 성향을 말한다. 언뜻 진정성, 진짜를 뜻하는 어센틱과 유사해 보이지만 함께 오른 상위 10개 단어를 비교해 보면 차이가 보인다. 2005년의 상위 10개 단어에는 전쟁, 테러리즘, 종파주의, 폭도와 같은 단어가 올랐다. 트루시니스마저도 한 코미디언이 부시의 이라크전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였다. 당시 사실과 믿음 사이를 가로질렀던 것은 9.11 테러 이후 가속화한 정치적 혼란이었다. 반면 어센틱은 딥페이크, 매력을 뜻하는 신조어 ‘rizz’, 일론 머스크의 ‘X’와 함께 소개됐다.

세 가지 뜻

어센틱에는 크게 세 가지 뜻이 있다. 거짓이나 모방이 아닌 진짜, 누군가의 성격, 정신, 캐릭터에 진심이라는 의미, 사실에 부합하거나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 믿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르다. 어센틱은 비교적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는 진실·사실과 맞닿은 단어이되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믿음과 욕망에 단단히 엮인 진정성과도 분리할 수 없다. 2023년은 어센틱의 해였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진실 같아 보이는 말과 정보를 쏟아 냈고, 테일러 스위프트와 샘 스미스 등의 팝스타는 진정성 있는 자신의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웠다. 비리얼(BeReal)은 필터 바깥의 세상을 ‘real’이라 명명하며 Z세대의 인기를 끌었다.

누구나 쓰는 AI

AI는 어센틱이 올해의 단어에 오르는 데 큰 영향을 줬다. 2023년의 AI는 바둑을 두던 2016년의 알파고나 단백질 구조를 계산하던 2022년의 딥마인드와도 달랐다. 인공지능이 실험실, 대국장에서 나와 모두의 브라우저에 깔리기 시작했다. 챗GPT는 유려했고, 누구나 딥페이크를 통해 원하는 모습의 정치인을 만들 수 있게 됐다. 가짜 정보들이 쏟아지는 AI 시대에는 정보의 진실성과 형식 사이에 괴리가 일어났다. 이제 정보의 형식은 진실성을 담보해 주지 못한다. 과거의 영상과 사진은 간혹 작품이거나, 대개는 진실이었다. 지금은 아니다. 이제는 겉모습만으로 진실 여부를 파악할 수 없다. 메리엄-웹스터의 소콜로프스키 편집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목격하는 것들을 믿지 않는다. 눈과 귀를 믿지 못한다.”

가짜 정보와 욕망

메시지는 소셜 미디어를 타고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과거의 소셜 미디어는 연결을 기반으로 작동했다. 이제는 그 자리를 알고리즘이 차지한다. 많이 노출될수록 정보가 생산하는 부가 가치가 올라간다. 알고리즘이 조율하는 ‘탐색(explore) 섹션’을 보면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정보를 소비하고 싶어 하는지가 보인다.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이 발발하자 머스크의 X에서는 수많은 전쟁 영상이 쏟아져 나왔다. 군복을 입은 사람이 쓰러진 청소년을 찍는 이미지가 담긴 영상이 200만 회 이상의 조회 수를 기록했다. 사실은 단편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이스라엘군의 장성이 하마스에 생포된 장면이라는 영상도 퍼졌다. 물론 가짜 정보다. 반면 사람들의 욕망은 진실하다. 수전 손택이 말했듯, 우리는 먼 나라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자극적인 이미지를 ‘소비’하고 싶다.

진정성 비즈니스

사람들의 욕망을 겨냥한 정보는 콘텐츠를 넘어 비즈니스가 됐다. 지난 10월부터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광고를 도배하는 투자 광고는 이 비즈니스의 민낯을 드러낸다. 주진형 전 한화투자증권 대표, 장하준 케임브리지대학교 교수,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인스타그램에 자신이 운영하는 주식 리딩방 링크를 광고한다. 허위 광고인 동시에 진정성 비즈니스다. 사칭당하는 사람이 쌓아 온 이력과 신뢰, 적나라하게는 그들의 이름과 얼굴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정보의 진정성은 이 이전부터 조용히 소멸하고 있었다. 애널리스트의 리포트보다 주식 리딩방의 짧은 정보를 믿는 시대가 주진형과 수익률 30퍼센트, 주식 리딩방을 정보로 둔갑시켰다.

그저 받아들이기

이미 우리는 어센틱이 희미해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진정성을 가늠할 수 없는 정보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렇다 보니 진실을 좇는 일은 피곤한 것이 된다. 피곤한 이들은 능동적으로 담론을 형성하기보다는 수동적으로 그를 받아들이려 한다. 단적으로, 공론장으로서의 댓글 시대가 저물고 있다. 하루 평균 30만 개 이상의 댓글이 달리지만, 정작 작성자는 11만 명 수준이다. 11월 27일 기준 50대 남성은 7만 2656개의 댓글을 달았지만, 10대 여성은 102개의 댓글을 달았다. 한 연구에 따르면 포털사이트 뉴스 댓글이 ‘소수 의견에 불과’하다는 답변이 55.8퍼센트, ‘조작이 의심’된다는 답변이 55.7퍼센트에 달했다. 무엇이 사람들의 진짜 여론인지 파악할 장소가, 믿을 수 있는 공론장이 사라진 것이다.

어센틱을 찾는 이들

2005년 트루시니스 시대에는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최소한 무언가를 믿을 수는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truth’를 찾고 판단해 왔다. 2023년에는 그 믿음의 대상 자체가 사라졌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사람들은 희미한 진정성을 좇아 사전 앞에 도착했다. 사전은 모두에게 ‘답’을 주는 공간이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올해의 단어는 한편으로는 고무적이다. 사람들은 결국 탈진실의 시대의 어센틱을 찾아 나서고 싶다. 이 능동적인 욕망이 유지되는 한, 우리는 서서히 그 개념을 조각할 수 있을 것이다.

IT MATTERS

2013년, 미국의 한 정신과 의사가 ‘슬레이트 스타 코덱스(Slate Star Codex)’라는 이름의 웹사이트를 연다. 정기적으로 토론이 열렸다. 토론에 참여했던 경제학자 데이비드 프리드먼(David Friedman)은 그곳을 “다양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과 정중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고 칭했다. 그곳에는 “공산주의자부터 무정부 자본주의자까지, 과학자부터 배관공까지,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곳에서의 토론은 누군가가 말하는 진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내가 믿을 진실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그것이 어센틱을 찾는 과정에 가장 가까이 닿아 있을지 모른다. 《포스트트루스》의 저자 리 매킨타이어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분간도 가지 않는 상황”을 탈진실 시대의 주요 문제라고 여겼다. 그런데 문제는 해결하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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