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은 집게손가락 논란을 해결할 수 없다

2023년 12월 6일, explained

넥슨의 대처에는 자신감이 묻어난다. 이 자신감의 원천은 어디인가.

엔젤릭버스터 'Shining Heart' MV. 메이플스토리의 아이돌 엔젤릭버스터가 매력적인 변신을 선보이며 화려하게 컴백했다. 사진: 에스카다 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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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초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제기됐던 넥슨 캐릭터의 ‘집게손가락 논란’의 콘티를 그린 주체가 여성이 아닌 남성 감독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논란의 중심으로 지목된 ‘스튜디오 뿌리’의 총감독 김상진·최인승 감독은 “감독의 의도에 반해 애니메이터가 특정 장면을 삽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WHY NOW

해괴한 논란이다. 그런데 예상치 못할 논란도 아니다. 문제의 원인은 반페미니즘보다도, 백래시보다도 훨씬 크다. 정치적 움직임에 얽힌 문제만큼, 업계 구조의 책임이 크기 때문이다. 디지털 콘텐츠 노동자의 노동 환경은 언제나 그늘 밑에 가려졌다. 이런 논란이 터지지 않는다면,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그래서 넥슨은 스튜디오 뿌리를 버렸다. 그게 가장 경제적인 선택이기 때문이다.

집게손가락

지난 11월 23일, 넥슨은 게임 ‘메이플스토리’의 여성 캐릭터인 ‘엔젤릭버스터’를 홍보하는 영상을 올렸다. 엉뚱한 곳에서 잡음이 생겼다. 여성 형상의 캐릭터가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에서 0.1초 동안 해당 캐릭터가 취한 손동작이 문제가 됐다. 집게손가락이었기 때문이다. 몇몇 남초 커뮤니티 이용자의 주장에 따르면 집게손가락은 한국 남성의 성기 크기를 비하하는 남성 혐오의 상징이다. 오랫동안 페미니즘을 검증하는 유효한 수단이기도 했다. 넥슨은 사과문을 올렸다. “유저들에게 불쾌한 감정을 드리거나 바람직하지 않은 표현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입장에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사안”이라고 밝혔다.

사과문

직접적인 위협을 받은 쪽은 넥슨이 아니었다. 해당 일러스트 작업을 진행한 스튜디오 뿌리와 스튜디오에 소속된 한 여성 일러스트레이터였다. 유저들은 분노했지만 사실은 이랬다. 지목된 일러스트레이터는 문제가 된 부분을 작업한 적이 없었다. 전체 콘티는 남성 감독이 연출하고 그렸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영상이 만들어지는 과정도 논란과는 거리가 있었다. 손가락을 몰래 그려 넣기 위해서는 수십 명의 눈과 네 차례의 검토 과정을 무사히 통과해야 했다. 스튜디오 뿌리는 이런 입장을 냈다. “손가락이 무슨 의미인지. 페미니즘이 뭔지도 모르는 제가 집게손가락을 음흉하게 넣었어야 합니다. 너무 억울합니다.”

음모론

애니메이션은 움직이는 매체다. 그것도 진짜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여야 한다. 찰나의 집게손가락은 불가피하다. 이미 게임업계에서는 찰나의 집게손가락을 피하려고 그럴듯함을 포기한다. 캐릭터들은 부자연스럽게 다섯 손가락을 한 번에 펴고 접는다. 이 찰나의 순간이 혐오를 선동한다는 주장은 음모론에 가깝다. 작아 보이지만 실상 존 F. 케네디의 총격 사건, 연예계를 장악한 프리메이슨 음모론보다 더 위협적이다. 힘없는 개인 일러스트레이터에, 대기업의 하청을 받아 일하는 스튜디오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용자들은 회사로 찾아오고, 여성 일러스트레이터의 신상을 유포했다. 해당 ‘페미 직원’을 자르지 않으면 “한 달 내내 텐트 치고 농성은 물론 단식 투쟁, 삭발까지 하겠다”는 게시물을 올렸다. 스튜디오 뿌리는 해당 직원을 보호하기 위해 해당 직원이 퇴사했다는 가짜 입장문을 낼 수밖에 없었다.

넥슨

논란이 터지자 넥슨은 뿌리에 일방적인 사과문을 강요했다. “엄격하고 낮은 자세로 커뮤니케이션 해주셨으면 한다”는 강경한 입장도 전했다. 뿌리가 사과문을 올린 뒤에도 유저의 반발이 계속됐다. 넥슨 김창섭 메이플스토리 총괄 디렉터는 유튜브 방송을 통해 “맹목적인 타인 혐오에 반대한다”며 뿌리 측에 책임을 묻겠다는 넥슨의 입장을 공고히 했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노골적으로 해당 논란을 만든 유저의 편을 든 것이다. 넥슨과 뿌리는 2017년부터 무려 7년간 함께 게임 작업을 해왔다. 뿌리를 이끄는 김상진 감독은 2007년 연출한 TV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통해 제59회 에미상을 받은 베테랑 감독이기도 하다. 그런 뿌리를, 넥슨은 버렸다. 단순히 ‘유저의 눈치를 봤다’고 하기엔 석연찮다. 넥슨의 대처엔 왠지 모를 자신감이 묻어난다.

어도어

‘2022 게임이용자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남성 표본 중 75.3퍼센트가, 여성 표본 중 73.4퍼센트가 게임을 즐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늘어나는 여성 유저가 페미니즘에 친화적이라고 가정하지 않더라도, 7년간 함께 작업해 온 ‘파트너’를 일부 유저가 만든 논란으로 인해 ‘강경 대응’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아이돌 그룹 ‘뉴진스’의 노래 ‘쿠키(Cookie)’의 가사가 아동을 성적으로 대상화했다는 논란에 휩싸였을 때, 소속사 ‘어도어’의 반응은 넥슨과 사뭇 달랐다. 어도어는 쿠키의 두 명의 작사가가 한국 및 스웨덴 국적으로 영어가 모국어인 30대 여성임을 밝히며 6000자 분량의 입장문을 냈다. 어도어는 쿠키의 “제작 의도가 선명했고, 여타 불순한 여지를 의심하지 못했던 탓에 모두 해당 논란에 대해 아연실색했다”고 밝혔다. 두 기업의 태도가 다르다. 어도어는 긴 입장문을 내면서까지 기획 의도와 작사 과정 전반을 변호하는데, 넥슨은 꼬리를 잘랐다.

보호와 외면 사이

이 차이의 이면에는 게임업계 전반의 비정상적인 노동 구조가 있다. 이상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장은 지난 11월 29일 자신의 소셜 미디어를 통해 문제는 “하청 업체의 직원이 원청 업체의 의지에 반해 원청 업체에 피해가 갈만한 행동을 독단적으로 했다는 데 있다”고 지적했다. 그의 말대로, 이 문제는 하청 업체와 원청 업체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그런데 하청 업체는 정말 독단적일 수 있을까. 이미 하도급이 만연한 게임업계에서 하청 업체의 근무 환경은 열악하다. 개발 자회사, 협력 업체의 임금 수준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평균 임금 격차 수준인 62.9퍼센트에도 못 미친다. 일상적인 고용 불안, 제대로 된 대가를 지급받지 못하는 것은 덤이다. 게다가, 대기업과 함께할 하청 업체는 차고 넘친다. 스튜디오 뿌리 매출의 70퍼센트는 넥슨에서 나온다. 어도어의 작사가와 달리, 넥슨은 언제든 같은 가격으로 대체 업체를 찾을 수 있다.

반복

작은 업체, 말단 직원에게 음모론은 더욱 거대한 힘을 갖는다. 지난 7월, 모바일 게임 ‘림버스 컴퍼니’ 제작에 참여한 여성 일러스트레이터는 입사 전 불법 촬영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해고됐다. 여성 캐릭터에게 비키니를 입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직원을 해고한 사례도 있다. ‘경기청년유니온’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같은 패턴의 밥줄 끊기 시도는 무려 14번 성공했다. 일러스트레이터는 다시 뽑으면 그만이고, 하청 업체는 다시 구하면 그만이다. 논란에 강경 대응하는 식으로 꼬리를 자르면 ‘유저의 마음을 빠르게 파악하고 대처하는 기업’이라는 이미지도 따라온다. 기업은 음흉한 일러스트레이터에게 당한 피해자가 된다. 문제를 제기한 유저들은 악랄한 페미니즘을 몰아냈다는 정의로운 성취감에 젖는다. 결국 음모론은 눈덩이처럼 커진다.

IT MATTERS

그래서 페미니즘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문제의 핵심을 이상한 논란, 한심한 행동, 게임업계의 몰지각함이라는 협소한 담론에서 꺼내 놓는 게 먼저다. 기업에 책임을 묻는 만큼, 이 구조를 시급한 문제라 생각지 않았던 과거를 바라봐야 할 때다.

게임업계 하도급, 창작 노동자들의 실질적인 근로 환경에 대한 제대로 된 통계조차 없다. 지난 6월 공정거래위원회가 몇몇 게임 대기업을 현장 조사한 게 전부다. 2020년, 인권위는 게임업계 내 여성 혐오에 대한 실태를 조사하라 문체부에 권고했지만, 3년이 지나도록 실태 조사는 단 한 건도 이뤄지지 않았다. 잠시의 논란만 지나면 다시 깔끔하게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하청 업체 노동자는, 다시 그늘에 감춰진다.

음모론은 어두운 곳에 있을수록 더욱 강해진다. 문제가 양지에 나와 모두가 주목한다면 유저도 조금씩 바뀔 수밖에 없다. 이 모든 걸 페미니즘의 손에만 맡겨 두기에는,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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