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달력의 마지막 장

2023년 12월 7일, explained

은행권을 향한 불만이 쌓인다. 횡재세 논의가 터진다. 우리는 왜 은행을 미워하게 되었나.

서울 중구 KEB하나은행 본점 외환 딜링룸에서 외환 트레이더가 업무를 보고 있다. 사진: 류승일, Getty Images
NOW THIS

은행권이 궁지에 몰렸다. 윤석열 대통령이 “은행의 갑질”을 직접 질타하고 나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번에는 홍콩 ELS 판매를 놓고 책임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조 단위의 손실이 예정되어 있고, 피해자들은 은행에 울분을 토한다. 결국 은행권을 향한 ‘횡재세’ 부과 움직임에 불이 붙었다. 논의만 맴돌았던 이전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WHY NOW

금리가 뛰어오르고 물가도 뛰어오른다. 은행에 갚아야 할 대출 이자도 뛰어오르는데 어쩐지 매달 꼬박꼬박 붓고 있는 적금의 이자는 그대로다. 내 월급은 그대로인데 은행들은 성과급 잔치를 벌인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금융 소비자는 은행이라는 기업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 박탈감이 쌓여 은행은 약탈자의 이미지를 뒤집어쓴다. 그것이 진짜 은행의 본모습일까? 은행과 거래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은행의 현재와 미래를 알아야 한다.

은행 오픈런

요즘 구하고 싶어도 쉬이 구할 수 없는 ‘희귀템’ 중 하나가 바로 ‘은행 달력’이다. 한때는 집집마다 은행 달력이 두세 권씩 쌓이기도 했다. 달력을 얼마나 배부했느냐가 영업점의 영업력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각 은행이 ESG 경영의 일환으로, 더 솔직히는 비용 문제 때문에 달력을 적게 찍어내고 있다. 그에 비해 수요는 확실하다. 큼직한 글씨에 음력이 병기된 벽걸이형 달력을 선호하는 노년층부터 벽에 걸어 두면 돈이 들어온다는 속설에 솔깃한 사람들까지, 은행 달력을 원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적지 않다. 때문에 중고 거래 플랫폼 ‘당근’에서는 2024년도 은행 달력이 약 3000원에서 5000원 사이에 거래되고 있다. 명화 등으로 장식된 VIP 고객용 달력 세트는 5만 원까지 가격이 치솟아 있다.

문 닫는 은행들

사실 금융 소비자 입장에서 귀해진 것이 은행 달력만은 아니다. 달력을 배부하는 주체인 오프라인 영업점 자체가 귀해지고 있는 것이다. 은행연합회의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국민·신한·하나·우리·농협 등 5대 은행은 영업점을 198곳 줄였다. 현재 전체 영업점이 4000곳이 채 안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급격한 감소라 할 수 있다. 특히 고령층이 많은 지방에서 더 빠르게 철수하고 있다. 돈이 안 돼서 그렇다. 그런데 은행이 이윤을 낼 권리가 있듯, 금융 소비자에게도 권리가 있다.

영리 기업은 맞는데

은행은 이용할지의 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 기관이 아니다. 은행 계좌 없이 정상적인 경제 활동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디지털과 비대면이 익숙지 않다고 금융에서 소외되어서는 안 되다는 얘기다. 그런 계층은 고령층뿐만이 아니다. 외국인, 장애인 등도 대면 창구가 사라지면 불편을 겪는다. 그리고 그들도 엄연히 금융소비자다. 물론 은행은 영리 기업이다. 다만, 우리 경제 전체와 매우 긴밀하게 엮여있어 공공성을 요구받는 영리 기업이다. 그 때문에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금융 회사들의 구조 조정에 공적 자금 168조 원이 투입된 바 있다. 은행이 망할 것 같으면 정부가 세금으로 버텨 준다는 얘기다. 정부24가 아무리 잘되어 있다고 해도 주민센터가 갑자기 사라져서는 안 된다. 은행은 어떨까. 과연 은행 마음대로 영업점을 없애도 되는 것일까.

퇴직금 5억 5000만 원

은행이 영리 추구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도 살펴봐야 할 지점이다. 하나은행의 지주 회사인 하나금융지주의 지난 2분기 실적을 보면 순이자 이익이 2조 원을 넘어섰다. 대출 이자와 예금 이자의 차이인 ‘예대 마진’에서 발생하는 이익이다. 반면, 비이자 이익은 5700억 원가량이다. 증권 거래 수수료가 포함된 금액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금융 회사의 이익 구조가 예대 마진에 지나치게 치우쳐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은행만 따로 떼어보면 예대 마진은 전체 이익의 90퍼센트 정도를 차지한다. 글로벌 사업이나 도매 금융 사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수익을 창출하고 있는 미국이나 일본의 사례와 대비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번 돈을 은행은 어떻게 쓰고 있을까. 영업점을 줄이면서 발생하는 유휴 인력을 내보내는 데에 쓰고 있다. 최근 6년간 국내 은행이 지급한 희망 퇴직금은 10조 원에 달한다. 매년 2000명에서 3000명 규모의 은행원들이 짐을 싼다. 이들에게 지급된 희망 퇴직금은 1인당 평균 5억 5200만 원이었다.

홍콩 ELS 사태

영업점도 줄어들고, 직원도 줄어드는 가운데 사고가 났다. 큰 사고다. 5대 은행이 판매해 온 홍콩H지수 연계 ELS가 고꾸라진 것이다. ELS는 주가 연계 증권이다. 대상으로 하는 주가가 오르면 이익을 본다. 그런데 기준 이하로 주가가 내려가면 손해를 본다. 미·중 갈등과 중국의 경기 침체로 홍콩H지수는 기준 이하로 떨어졌다. 이 상품이 주로 판매되었던 2021년 상반기에는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내년 초 만기가 돌아온다. 손실액은 수조 원대에 이를 전망이다. 금융감독원은 판매 은행과 증권사를 대상으로 전수조사에 들어갔다. 가입자에게 충분히 설명했는지, 불완전 판매는 없었는지를 따져보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현장에서는 고령의 고객들이 창구에서 은행 직원의 설명을 듣고 은퇴 자금을 투자했다가 낭패를 당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전쟁이 나지 않는 한 손해나지 않는다’는 식의 설명을 들었다면 부당 권유에 해당한다.

조용한 이탈

영업점은 없애고, 예대 마진으로 번 돈으로 퇴직금 잔치하고, 줄어든 직원이 판매한 상품은 사고가 난다. 은행을 향한 시선이 고울 리가 없다. 시대가 디지털이다. 은행도 어쩔 수 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항변이라면, 고객도 변화하고 있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달라진 고객들은 은행에 불만을 제기하거나 계좌를 닫는 등의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 거래하던 은행에 몇십 원이 남은 계좌를 버려둔 채 다른 곳에서 은행 거래를 이어간다. 이른바 ‘조용한 이탈(silent attrition)’이다. 은행이 금융 소비자에게 신뢰를 주지 않는다면, 소비자 입장에서도 은행에 고객 충성도를 가질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어차피 손안의 스마트폰 안에 열 가지도 넘는 선택지가 있다. 게다가 네이버나 카카오, 토스 등 빅테크의 페이 서비스는 우리의 일상과 은행 사이의 거리를 더욱 벌려 놓고 있다.

횡재세인가 괘씸세인가

은행권에 대한 금융 소비자의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이면서 이른바 ‘횡재세’ 도입 논의에도 추진력이 붙었다. 국회는 지난주부터 횡재세 법안 심의에 돌입했다. 국회 의석수의 과반을 차지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은 횡재세 법안을 사실상 당론으로 추진하고 있다. 2년 가까이 오르고 있는 기준금리가 그 배경이다. 기준 금리가 오르면 은행의 이자 이익이 증가한다. 대출 금리는 빠르게 따라 오르고, 예금 금리 인상은 한발 늦기 때문이다. 은행은 이익이고 대출자는 손해다. 이 격차가 쌓였으니, 횡재세를 걷어 빚 부담이 커진 취약계층을 지원하자는 것이 골자다. 물론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횡재’의 기준이 모호하고 얼마만큼 ‘횡재 이익’을 환수해야 할지도 모호하다. 은행이 ‘횡재손’을 입으면 보상해 줄 것인지 되묻는 목소리도 있다. 입법 필요성부터 세부 사항까지 모든 부분이 꼼꼼히 계산되고 논의되어야 할 문제다. 다만 꼼꼼히 계산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도 있다. 은행에 부과하고자 하는 횡재세는, 어쩌면 ‘괘씸세’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은행이 공공성을 충분히 지켜왔는지 자문해야 할 이유다.

IT MATTERS

최근 발간된 보고서에 따르면, 글로벌 금융 기관 마케터들은 2024년 은행이 달성해야 할 최우선 과제로 예금 확보와 신규 고객 유치, 고객 관계 강화를 꼽았다. 대출 상품을 더 팔아서 이익을 보는 데에 집중해서는 은행이 고객 이탈을 막을 수 없다는 계산 때문이다.

특히, 고객들이 처한 상황에 맞는 조언을 제때 제공하는 등의 노력이 있어야 고객과 끈끈한 관계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은행이 사회 초년생에게 적금을 얼마 부어야 할지, 내 집 장만을 꿈꾸는 사람에게 청약 통장은 어떻게 만들어서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구체적인 조언을 해 주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최근 몇 년간 우리나라의 주요 은행이 보여 준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이대로라면 은행 달력에 금전운을 부르는, 상서로운 기운이 깃들어 있다는 소박한 믿음도 수명을 다할지 모를 일이다. 한국의 은행이 디지털 시대를 맞이하는 방법은, 어딘가 잘못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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