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이고 중립적인 교실은 가능할까

2023년 12월 27일, explained

〈서울의 봄〉이 보수 단체의 표적이 됐다. 교실 속 문화 전쟁의 작은 시작점일지 모른다.

영화 〈서울의 봄〉 스틸컷. 사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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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이 천만 관객을 동원했다. 마냥 좋은 소식만 들리지는 않았다. 서울시 마포구의 한 중학교가 〈서울의 봄〉을 단체 관람했다가 보수 단체에 의해 고발당했다.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은 해당 고발을 “새로운 유형의 교권 침해로 판단하고 단호히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WHY NOW

학교는 무엇을 가르치고, 가르치지 말아야 할까. 교실 속 정치는 안 된다는 중립 의무는 다시 무엇이 정치이고, 중립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사회는 아직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 교권만으로, 학교만으로, 정치적 성향과 이념만으로 교실 속 〈서울의 봄〉을 바라봐서는 부족하다. 정치적인 것의 영역이 커지는데 진짜 정치가 사라진다. 교실에서만이 아니다.

서울의 봄

〈서울의 봄〉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와 다르다. 〈바스터즈〉처럼 히틀러를 죽이지도,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처럼 찰스 맨슨의 살인을 막지도 않는다. 정치적 논란이 있을 법한 최근의 사건을 다루는 영화도 아니다. 모두가 교과서에서 배우듯, 1979년 12월 12일의 신군부 쿠데타는 ‘정립된’ 역사적 사건이다. 영화에는 자막이 쓰였다. 하루가 채 되지 않는 시간적 배경 안에서 발생한 사건을 건조한 어투로 짚는다. 영화를 연출한 김성수 감독은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다큐멘터리적으로 역사 기록을 잘 압축한 느낌이었다”고 후일담을 전했다. 모든 영화에 관객의 자리는 있지만, 〈서울의 봄〉은 열린 해석보다는 닫힌 감정과 가까운 영화다.

보수 단체

문제를 제기한 보수 단체의 생각은 달랐다. 유튜브 채널 ‘가로세로연구소’‘와 자유대한호국단은 〈서울의 봄〉을 좌익 역사 왜곡 영화라 규정하고 학생들이 이를 단체 관람하도록 하는 것이 학부모의 교육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서울의 봄〉은 우리나라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허구의 창작물일 뿐이지만, 보는 이에 따라 영화 속 허구를 역사적 사실과 혼동하고 왜곡할 수 있어 문제가 심각하다”고 덧붙였다. 그들이 말하듯, 사각 프레임 안의 역사는 어쩔 수 없이 허구다. 반면 그런 허구를 둘러싼 담론은 실재하는 현실이다. 〈서울의 봄〉은 정말 ‘정치적인 것’일까?

무엇이 정치인가

실재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교실이 마주한 정치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독일의 법학자 카를 슈미트는 “모든 종교적, 도덕적, 경제적, 인종적 혹은 다른 대립은 그것이 인간을 친구와 적으로 효과적으로 가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력하면 정치적 대립으로 바뀌게 된다”고 진단했다. 어떠한 주제든 그것이 피아 식별을 가능케 할 때 정치가 된다. 즉 정치는 정도의 문제다. 슈미트의 정의로 정치적인 것의 범위를 다시 정의할 수 있다. 한국은 사람들이 체감하는 갈등의 정도가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다. 2021년 영국의 킹스컬리지가 27개 국가 시민에게 ‘자신이 속한 나라에서 갈등이 심각하다고 느끼는지’에 대해 물었다. 한국은 12가지 갈등 항목 중 일곱 가지(이념, 빈부, 성별, 학력, 지지 정당, 나이, 종교)에서 1위를 차지했다. 갈등이 커질수록 정치적이지 않은 영역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중립의 개념

정치의 영역이 커진다. 정치적인 건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중립을 어떻게 설정할지가 문제가 된다. 정치적 발언이라 여기는 것을 언급하지 않고 회피한다면, 그를 정치적 중립이라 할 수 있을까? 미국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12월 5일, 학내 반유대주의적 움직임과 관련해 의회 청문회에 출석한 MIT, 하버드,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총장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유대인 학살을 촉구하는 건 하버드대학교의 괴롭힘 금지 규정을 위반한 것”이냐 묻는 공화당 의원의 질문을 의도적으로 회피했다. 클로딘 게이 하버드대 총장은 “그건 맥락에 달려 있다”고 답했고, 논란 이후 사임한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총장은 “그런 위협이 실제 행동으로 옮겨지면 괴롭힘이 될 수 있다”고 답했다. 모호한 답변과 의견 회피는 더 큰 정치적 편향으로 해석됐다. 피하는 것이 중립의 동의어는 아니다.

회피가 중립이 된 사연

교육기본법 제6조1항은 “교육은 교육 본래의 목적에 따라 그 기능을 다 하도록 운영되어야 하며, 정치적·파당적 또는 개인적 편견을 전파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되어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한다. 해당 법안은 이승만 정부 시기 정치적 동원으로부터 교사와 공무원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조항이다. 교사는 정치적으로 동원되기 쉽다. 교사 개개인의 정치적 편향이 없다고 말할 수도, 그것의 영향력이 작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지금의 중립성은 권리보다는 제약에 가깝다. 사회는 성 소수자의 권리를 가르치는 것이 중립적인가를 물어 왔다. 필요한 질문은 ‘성 소수자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의 담론화가 필요한가’다. 그때야 우리는 ‘중립’이라는 기준을 세울 수 있다. 무엇이 중립인지조차 희미해진 때에는 모두가 예민해진다. 교사 자신의 발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교사들은 입을 닫는다. 정치는 사라지고 중립은 허울만 남는다.

교권 침해

중립의 근거가 된 교사는 점차 정치적 주체의 경계로 밀려나고 있다. 김성천 한국교원대학교 부교수는 교원의 정치 참여 금지가 교육 정책에서 교원을 소외시키고, 이로 인해 교권 침해 등이 문제가 됐다고 진단했다. “교원의 정치적 중립성과 교사는 수업만 잘하면 된다는 신화는 결국 교육의 행정화, 입법화, 사법화 현상을 심화시켰다”고 덧붙였다. 공교육의 쟁점이 된 교권 침해는 학생인권조례 하나에만 갇힌 이슈가 아니다. 교실에서의 정치적 표현, 교실 바깥에서 이뤄지는 검열과 중립이라는 신화와도 맞닿아 있다.

학교 바깥의 학교

교실, 교사, 학생이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는 논의는 미래 사회의 지향과도 멀지 않다. 학교는 미래의 사회이자 현재 사회의 축소판이다. 교실의 갈등은 더 큰 사회의 민낯을 드러낸다. 우리 사회는 중립을 무기로, 핑계로 정치적인 것에 대한 직면을 피해 왔다. 우리나라 국민 10명 중 네 명은 정치적 성향이 다른 사람과는 식사와 술자리를 함께 하는 것이 불편하다고 여겼다. 정치 성향이 다르면 본인이나 자녀의 결혼이 불편하다는 답변도 43퍼센트에 달했다. 정치의 영역은 커지는데, 안전하게 합의하거나 토론할 장소가 없다. 학교조차, 대학조차 그 장소가 되지 못한다. 정치는 고발로, 압박으로, 사건으로 되돌아온다. 갈등은 또 다른 갈등을 낳는다.

IT MATTERS

〈서울의 봄〉을 둘러싼 지금의 논란은 일부 극우 단체의 것이었지만 언제든 모두의 것이 될 수 있다. 정치의 영역은 확장돼 가고, 중립은 여전히 모호하다. 표현에 대한 적개심은 커지기만 한다. 진정한 정치의 복권을 위해 필요한 건 〈서울의 봄〉, 극우 단체에 대한 단순한 단죄, 허울뿐인 중립을 향한 메아리가 아니다.

분단 상황 속에서 정치 교육을 두고 큰 이념 갈등을 마주했던 독일은 1976년 ‘보이텔스바흐 합의’를 통해 세 가지 정치 교육 기준을 제시했다. 학생에게 교사가 원하는 견해를 강압적으로 주입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 정치와 학문에서 논쟁적인 것은 수업에서도 논쟁적으로 다뤄져야 한다는 원칙, 마지막으로 학생은 자신의 정치적 상황과 독자적인 이해관계를 분석하고 이에 따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 그것이다.

〈서울의 봄〉을 연출한 김성수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읽는 역사는 역사가가 여러 역사의 조각을 짜 맞춰 기술한 것이잖아요. 마치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읽히죠. 그런데 저는 역사가 그렇게 흐른다는 데 회의감이 있어요. 거창하게 쓰인 어떤 역사는 그 순간 개입한 많은 이들의 돌발적인 생각과 가치관, 됨됨이가 어우러져 만들어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정치에는 개입해야 한다. 침묵과 삿대질은 중립을 만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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