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록스가 성공을 복사하지 못한 이유

2024년 1월 8일, explained

1970년대 팔로알토에서 제록스는 미래를 발명했다. 그리고 잃어버렸다.

제록스 PARC가 1973년에 연구 목적으로 만든 개인용 컴퓨터 ‘제록스 알토(Alto)’. 사진: 제록스 PARC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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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터 왕국 ‘제록스(Xerox)’가 대규모 구조 조정에 들어간다. 1월 3일 제록스는 1분기에 인력 15퍼센트를 감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전체 직원 2만 명에서 3000여 명을 한 번에 해고한다. 제록스는 조직 구조와 운영 방식을 개편하고 재창조에 나서기로 했다. 그동안 회사를 이끌어 왔던 프린터 제품 부문을 단순화하고 IT 서비스에 집중할 방침이다.

WHY NOW

2024년 1월 제록스의 시가 총액은 20억 달러다. 코스피 시가 총액 순위에 대입하면 120위권이다. 강원랜드보다 시총이 작다. 30년 전만 해도 제록스는 포춘 500대 기업 중 26위였다. 애플, 코카콜라보다 매출이 높았다. 1970년대 팔로알토에서 제록스는 IBM과 MS를 합한 것보다 더 큰 회사가 될 수 있는 미래를 발명했고, 잃어버렸다. 이후 내리막을 걸었다. 그때 팔로알토에선 무슨 일이 있었을까.

기술 혁신

제록스는 1906년 미국 뉴욕에서 시작했다. 사진 인화 용지를 만들었다. 그러다 1959년 물리학자 체스터 칼슨의 전자 사진 기술을 이용한 최초의 현대판 복사기 ‘제록스 914’를 출시하면서 세계 각국의 사무 환경을 바꾼 회사로 거듭난다. 20세기 중반까지 문서 한 장을 복사하려면 먹지가 필요했고, 수십 단계의 수작업을 거쳐야 했다. 복사 한 장에 3분이 걸렸다. 그런데 제록스 914는 일반 종이를 사용해 30초에 한 장씩 복사했다. 혁명이었다.

임대 모델

문제는 가격이었다. 한 대에 4만 달러가 넘었다. 제록스는 914를 판매하지 않기로 한다. 대신 임대만 했다. 한 달에 몇십 달러를 내면 914를 빌려주고 일정 부수의 무료 복사를 제공했다. 그 이상을 넘어가면 장당 요금을 받았다. 혁신적인 기술에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결합하면서 제록스는 떼돈을 벌었다. 1970년대 제록스는 전 세계에 10만 명에 가까운 영업 인력을 보유한다. 그들은 고객사의 복사기를 관리해 주고, 매월 초과 사용 부수에 장당 요금을 곱해 청구서를 작성했다.

PARC

임대 아이디어를 고안한 피터 매콜로는 제록스 2대 사장이 된다. 제록스는 세계 복사기 시장의 95퍼센트를 장악했지만, 호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었다. 경쟁 업체들이 추격하고 있었고, 복사기가 핵심 사무 기기로 계속 남아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1969년 말 매콜로는 제록스의 기존 복사기 연구소에서 멀리 떨어진 캘리포니아에 다른 연구소를 세우라고 지시한다. 이듬해인 1970년 7월 1일 팔로알토 연구소(Palo Alto Research Center, PARC)가 설립된다. 연구소의 임무는 “미래의 사무실”을 발명하는 것이었다.

꿈의 직장

PARC는 꿈의 직장이었다. 돈 벌 궁리를 하지 않고 그저 미래를 개발하기만 하면 되는 분위기였다. 모기업의 현재 제품 라인과 관계없이 하고 싶은 연구를 할 수 있었다. 과학자, 엔지니어, 프로그래머들은 새벽 4시에 출근해 밤늦도록 일했다. 제대로 씻지도 않고 사무실에서 먹고 잤고,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사무실을 맨발로 다녔다. 그야말로 컴퓨터 괴짜들의 집단이었다. 1970년대 중반 전 세계 상위 100명의 컴퓨터 과학자 중 절반이 PARC에서 일하고 있었다.

컴퓨터의 거의 모든 것

PARC 연구원들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 장치의 거의 모든 원형을 개발했다. 당시만 해도 컴퓨터를 작동하려면 코딩하듯 기계 언어를 키보드로 입력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웠다. PARC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raphical User Interface, GUI)를 개발해 사용자가 그래픽을 통해 컴퓨터를 작동하게 했다. 작업창, 아이콘, 메뉴, 마우스 포인터 같은 기능이 이때 처음 나왔다. 컴퓨터를 여러 대 연결하는 네트워크인 이더넷도 PARC가 개발했다. 쉽게 말해 랜선이다. 개인용 컴퓨터, 워드프로세서, 노트북, 태블릿도 PARC에서 나왔다.

미래의 날

컴퓨터의 거의 모든 걸 개발했는데, 왜 사람들은 제록스를 복사기 회사로만 기억할까. 상용화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1977년 11월 10일 미국 플로리다주 보카레이턴에서 ‘미래의 날(Futures Day)’이 열렸다. PARC 연구진은 제록스 경영진과 영업 인력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간의 성과를 시연했다. 전에 없던 새로운 장비와 기술을 공개했는데, 청중의 반응이 별로였다. PARC 연구원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참석자들은 ‘그래서 인쇄 버튼을 어디서 누릅니까’ 하는 반응이었다.” 프린터 임대 모델에 익숙했던 그들은 종이가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커미션을 받을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애플과 MS

1979년 스티브 잡스가 PARC를 방문했다. 잡스는 마우스로 커서를 움직이고 아이콘을 클릭해 창을 여는 GUI에 매료됐다. 연구진의 시연을 10분간 지켜보고는 앞으로 모든 컴퓨터가 이런 방식으로 작동하리라는 걸 직감했다. 잡스는 제록스와 100만 달러 규모의 계약을 맺고 PARC에서 개발 중인 기술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그리고 GUI를 1984년 매킨토시에 적용했다. 대성공이었다. 훗날 잡스는 당시를 회상하며 “제록스는 자신들이 뭘 만들었는지조차 몰랐다”면서 제록스가 발명품의 상용화에 성공했다면 컴퓨터 산업 전체를 지배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빌 게이츠 역시 PARC에서 영감을 받아 윈도우를 출시했다.

IT MATTERS

제록스가 컴퓨터 장치의 거의 모든 것을 발명하고도 컴퓨터 시장을 선점하지 못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뉴욕 본사의 경영진이 PARC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이해하지 못했다. 1970년대 초반만 해도 복사기 수요가 공급을 초과했다. 회사에는 경영을 잘 아는 임원이 필요했다. 이들은 숫자에 능했다. 복사기 개발과 판매로 발생하는 비용과 수익 계산에 빠삭했다. 그러나 당시로선 생소했던 컴퓨터 시장의 잠재력을 알지 못했다. 그들에게 PARC의 성과는 캘리포니아의 괴짜들이 만든 신기한 발명품에 지나지 않았다. 제록스의 최고위 임원은 PARC의 경이로움을 하루 동안 둘러본 뒤 연구진에게 딱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저 빈백은 어디서 구할 수 있나요?”

둘째, 기존 성공 모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81년 제록스는 PARC에서 개발한 개인용 컴퓨터를 출시했다. 한 대당 1만 6500달러로 고가였는데, 그마저도 컴퓨터만 따로 살 수 없었다. 네트워킹과 레이저 프린터가 포함된 통합 시스템으로만 판매했다. 최소 설치 비용은 10만 달러였다. 타사 소프트웨어를 설치할 수도 없었다. 복사기처럼 제록스 직원이 설치, 관리하는 방식이었다. 복사기 임대 방식과 별 차이가 없었다. 제록스 경영진은 개인용 컴퓨터 시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대규모 시스템에 수십만 달러를 지불하는 시장과 똑같이 접근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IBM이 개인용 컴퓨터를 출시했다. 제록스 제품보다 성능이 훨씬 떨어졌지만, 한 대당 2000달러였다. 개인용 컴퓨터 시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제록스는 1970년대 중반까지 프린터와 복사기의 압도적인 성공에 젖어 개인용 컴퓨터라는 새로운 시장의 잠재력을 인지하지 못했다. 1970년대 후반에는 복사기 시장 후발 주자들의 추격을 피하느라 컴퓨터 시장으로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1980년대 초반이 돼서야 컴퓨터 시장의 잠재력을 알아차리고 제품을 내놨지만, 과거 복사기의 성공 방식을 답습하면서 상용화에 실패했다. 결국 1980년대 들어 앨런 케이, 밥 멧칼프, 밥 테일러, 존 워녹, 찰스 시모니 같은 컴퓨터 과학의 전설적인 인물들이 PARC를 떠나고, 복사기 시장의 점유율마저 급감하면서 제록스는 서서히 침몰한다. 그사이 제록스가 만들어 낸 눈부신 기술의 과실은 애플, MS, IBM 같은 기업들이 나눠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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