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 시민에 대한 예의

2024년 1월 18일, explained

정치 혐오가 혐오 정치를 만든다.

1월 16일 한동훈 위원장이 국민의힘 인천시당 신년 인사회에 참석했다. 이날 한 위원장은 국회의원 정수 축소를 제안했다. 사진: 국민의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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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훈표 정치 개혁안이 화제입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16일 국민의힘 인천시당 신년 인사회에 참석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 총선에서 승리해 국회의원 수를 300명에서 250명으로 줄이겠습니다. 더불어민주당에 이번에도 반대할 것인지 묻겠습니다.” 구체적 실행 방안은 밝히지 않았지만, 비례대표 의원이 직능을 대표하기보단 지역구 자리를 따기 위해 권력에 맹종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고 말해 비례대표 의석수 축소를 시사했습니다.

WHY NOW

먹고살기 바쁜 ‘동료 시민’에게 정치는 거추장스럽습니다. 가끔 정치 뉴스를 봐도 거대 양당이 죽자고 싸우는 얘기뿐입니다. 선거가 민주주의를 완성한다지만, 나도 완성하기 어려운 판에 선거 제도는 복잡하기만 합니다. 지난해 5월 국회는 선거 제도 개편을 준비하면서 일반 국민 500명에게 공론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단순 여론 조사가 아니라 학습과 토론을 거쳐 결론을 냈습니다. 그 과정을 KBS가 생중계하기도 했죠. 오늘 우리는 그날의 토론 현장으로 들어갑니다. 오늘 익스플레인드는 평소와 조금 다르게 꾸렸습니다. 문체부터 다르죠. 대화와 토론의 분위기를 내보고 싶었습니다. 토론창도 열려 있습니다.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눠 주세요.

국회의원 선거 제도 개편을 위한 공론화

당시 공론 조사 방식은 이랬습니다. 시민 참여단 500명은 숙의에 들어가기 전에 간단한 설문 조사에 응했습니다. 이후 정치학 교수와 연구진이 마련한 자료집을 통해 선거 제도를 학습했습니다. 그리고 5월 6일과 13일, 두 차례 모여 전문가의 해설을 듣고, 조별로 나뉘어 토론했습니다. 여러 의제가 테이블에 올랐는데요, 오늘 우리는 한동훈 위원장의 정치 개혁안 주제인 국회의원 정수와 비례대표 의석, 두 가지를 논의합니다. 먼저, 다음 질문에 답해 주세요. 국회의원 수 300명은 많나요, 적나요. 현재 47석인 비례대표 의석은 늘려야 하나요, 줄여야 하나요. 생각을 정했다면 당시 시민 참여단의 응답과 비교해 보세요. 각주를 클릭하면 결과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1]

비례대표에 대한 숙의

현재 국회의원 수는 300명입니다. 그중 지역구 의원이 253명, 비례대표 의원이 47명입니다. 비례대표제는 정치 경력은 부족해도 전문성을 지닌 사람을 국민의 대표로 선출하는 제도입니다. 또한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기회를 부여합니다. 예컨대 청년을 대표하고, 노동자를 대표하고, 소상공인을 대표하는 사람을 국회로 보내는 겁니다. 이게 선거 제도의 기본 원칙 중 하나인 대표성입니다. 국회의원 구성을 유권자 구성과 비슷하게 꾸리는 거죠. 그런데 요즘 사회가 좀 복잡한가요. 비례 47석으론 다양성을 보장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비례를 늘리면 좋겠는데, 그러자니 걸리는 게 있죠. 정당이 부적합한 사람을 공천할 수 있거든요. 어떻게 저런 사람이 국회의원이 됐을까 싶은 당선자가 나올 수 있습니다.

공천 심사의 투명성

양정례 전 의원이 대표적입니다. 2008년 총선에서 17억 원을 건넨 대가로 친박연대 비례 1번으로 국회에 입성했습니다. 사회 경력이 거의 없는 부잣집 딸이었는데요, 비례대표제의 폐단을 지적할 때마다 거론되는 사례입니다. 그럼 비례대표 의원의 전문성을 높이고, 부당한 공천을 방지할 방법은 없을까요. 물론 있습니다. 정당이 비례대표 후보자를 공천할 때 구체적인 추전 기준과 추천 과정을 기록한 회의록을 공개하게 하면 됩니다. 실제로 공직선거법에 이런 규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2020년에 선거법이 개정되면서 삭제됐죠. 현행 선거법에선 비례대표 후보자를 공천할 때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야 한다”는 규정만 있습니다. 각 정당이 알아서 하라는 얘기입니다. 방금 사례는 하나의 예일 뿐입니다. 비례대표의 대표성과 전문성을 살리고, 부당한 공천을 방지할 방법은 얼마든 있습니다. 그 방법을 고안하고 토론하고 결정하는 것이 정치 개혁입니다.

의원 정수에 대한 숙의

이번 의제는 국회의원 수입니다. 비례대표제의 취지를 잘 살릴 수 있다면 비례 의석이 늘어나는 게 좋습니다. 의석수를 300석으로 고정한 상태에서 비례 의석(47석)을 늘리려면 지역구 의석(253석)을 줄여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한국은 국회의원 한 명이 대표하는 국민의 수가 많습니다. 바꿔 말하면 국회의원 수가 적습니다. 한국의 국회의원 1인이 대표하는 인구는 평균 17만 명입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평균인 11만 명보다 크게 높습니다. 38개국 중에서 네 번째로 많습니다. 국회의원 한 명이 대변할 인구가 많아지면 그만큼 대표성이 떨어지겠죠. 실제로 학계에선 의원 수가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의원 수를 줄인다고 금배지의 권한이 줄어드는 것도 아닙니다. 권력이 집중되는 만큼 오히려 권한이 강화될 수 있습니다.

예산의 문제

정치에 대한 불신과 정당에 대한 불만을 잠시 내려놓고 생각해 보면 조금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비례성과 대표성, 다양성 같은 민주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 비례대표 의석수를 늘린다면, 현실적으로 전체 의석수를 늘려야 할 겁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한국은 의원 1인당 인구가 많으니까요. 그런데 국민감정은 그렇지 않습니다. 억대 연봉에 각종 특혜를 받고도 일 못하는 국회의원을 뭐하러 늘리냐는 거죠. 정치 불신을 넘어 정치 혐오가 극심한 상황에서 의원들이 자기 입으로 의원 수를 늘리자고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표를 얻으려면 의원 수를 줄이자고 말하는 게 유리하죠. 예산 문제도 자주 거론됩니다. 의원 수가 늘면 그만큼 예산도 늘어날 텐데요, 역시 해법이 있습니다. 예산을 고정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현재 국회의원 300명에게 들어가는 예산을 고정한 상태에서 의석수를 늘리면, 예산을 더 들이지 않고 국회의원 1인당 제공되는 혜택도 줄일 수 있습니다.

숙의 종료

학습과 전문가 발제, 질의응답과 토론을 마치고 시민 참여단은 다시 설문 조사에 응했습니다. 숙의를 통해 생각에 변화가 있었는지 확인한 거죠.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비례대표 의석을 줄여야 할까요, 늘려야 할까요. 국회의원 수를 줄여야 할까요, 늘려야 할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변화가 있었나요. 당시 시민 참여단의 응답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 “비례대표 의석 비율을 늘려야 한다.” 숙의 전 조사 27% → 숙의 후 조사 70%
  • “국회의원 수를 줄여야 한다.” 숙의 전 조사 65% → 숙의 후 조사 37%

공론 조사가 끝나고

전문가들은 공론 조사를 시작할 때만 해도 회의적이었다고 합니다. 정치 불신이 심한 상태에서 비례대표 의석과 의원 정수를 늘려야 한다는 이상적인 결론은 나오지 않을 거라고 예상한 거죠. 사실 저부터 그랬습니다. 어차피 결과가 정해져 있는 조사를 굳이 비싼 돈 들여서 왜 하나 싶었습니다. 당시 공론 조사에 참여했던 한 시민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야기를 해보니까 대화가 되더라. 어렵더라도 왜 국회가 필요하고, 국회의원이 무슨 일을 하는지 더 얘기할 수 있었으면 결과가 더 크게 달라졌을 거다.”

IT MATTERS

선거 제도는 민주주의의 근간입니다. ‘고얀 놈들 맛 좀 봐라’식의 접근은 그야말로 고약합니다. 어려운 문제는 어렵게 풀어야 합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유권자에게 선거 제도를 더 알리고 이해시키고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한동훈 위원장도 모르지 않을 겁니다. 다만 의원 수 감축 제안이 석 달 남은 선거에 유리하다는 건 분명합니다. 일반 국민은 ‘숙의 전 조사’ 상태니까요. 한 위원장은 의원 정수 감축의 구체적 실행 방안을 묻자 “어떤 방식일지 차차 고민하겠다”고 답했습니다. 선거 제도 개편에 대한 고민의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 정치 혐오에 기댄 포퓰리즘 공약으로 보이는 이유입니다. 정치 혐오는 유권자를 정치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양당제를 강화합니다. 정치 양극화를 심화합니다. 혐오 정치를 조장합니다. 민주주의를 파괴합니다. 한동훈 위원장의 정치 개혁 공약은 ‘동료 시민’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1]
시민 참여단은 비례대표 의석 비율에 대한 질문에 현행 유지 18%, 비율 확대 27%, 비율 축소 46%, 모르겠다 11%로 응답했다.
국회의원 수에 대한 질문에는 현행 유지 18%, 의석 축소 65%, 의석 확대 13%, 모르겠다 3%로 응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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