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해의 총성

2024년 1월 19일, explained

후티 반군이 홍해를 막아섰다. 팍스 아메리카나가 흔들린다.

2024년 1월 12일, 예멘 사나에서 미국과 영국의 공습에 항의하는 시위가 진행됐다. 시위 참가자들은 팔레스타인과 예멘 국기, 후티 반군의 상징을 들어 보였다. 사진: Mohammed Hamoud, Getty Images
NOW THIS
 
예멘의 무장 정파 ‘후티 반군’이 수에즈 운하 직전의 길목, 홍해를 틀어막으면서 전 세계 해상 운송에 비상이 걸렸다. 연료와 물건을 실은 선박들이 먼 길을 돌아가느라 운송비가 급등하면서 인플레이션 우려가 강하게 제기된다. 이들의 명분은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전쟁이다. 홍해를 지나 이스라엘로 향하는 선박을 공격하겠다는 것인데, 실제로 공격을 받은 서른 채 가까운 선박들의 국적은 다양하고, 목적지 또한 이스라엘과 대부분 관계없다. 사실상 서방을 향한 무차별 공격이다. 결국 미국이 나섰다. 다국적 연합군을 구성해 폭격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홍해의 뱃길이 다시 열릴 조짐은, 아직 없다.

WHY NOW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12일, 후티 반군에 대한 첫 번째 대규모 공습 이후 성명을 발표했다. “후티 반군의 공격은 우리 군대와 민간인뿐 아니라 무역 및 항행의 자유를 위협했다.” 중동 위기로부터 최대한 거리를 두고자 했던 미국이 미사일을 날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 후티 반군이 위협하고 있는 것은 국제 상선들이 아니다. 미국이 80년 가까이 지켜온,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를 조준하고 있다.

대항해 시대
 
15세기 무렵 시작된 대항해 시대는 세계를 연결했다. 대양을 가로지르는 선박에는 탐욕과 착취가 가득 쌓였고, 문명의 충돌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 대부분은 폭력을 수반했다. 바다에서 대부분의 역사가 탄생하던 시절이었다. 바닷길을 찾느냐 못 찾느냐, 그 길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느냐에 따라 개인의 영욕과 국가의 운명이 갈렸다.

브레튼우즈 체제
 
망망대해에 평화가 찾아온 것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친 이후다. 서방 세계의 패권을 손에 쥔 미국은 세계 경제의 판을 새로 짠다. 2차 대전이 끝나기 직전 시작된, 브레튼우즈 체제(Bretton Woods system)다. 소련에 맞서 자유 진영의 경제를 미국 중심으로, 하나로 묶겠다는 목적이었다. 경제가 묶이려면 핵심은 무역이다. 달러 중심의 금 본위제를 바탕으로 국제 무역을 확대하는 것이 골자다. 이를 위해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도 설립된다. 그리고 이 브레우즈 체제의 성립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있었다. 바로 ‘공해의 자유(Freedom of Seas)’다.
 
공해의 주인
 
각국의 영해를 벗어난 공해(公海)는 누구의 것일까. UN 해양법에는 공해가 모든 국가에 개방되어 있다고 명시한다. 즉, 어떤 나라의 어떤 선박이든 다닐 수 있다는 얘기다. 무역을 중심으로 한 경제 체제의 기본 전제다. 국제 무역 물동량의 약 80퍼센트가 선박을 통해 운송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브레턴우즈 체제는 70년대 막을 내렸다. 그러나 무역의 시대는 시작에 불과했다. 공해의 자유는 점점 더 중요해졌다. 미국은 이를 지키기 위해 그 어떤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Freedom of Navigation Operations
 
대표적인 것이 바로 ‘항행의 자유 작전(FONOPs,. Freedom of Navigation Operations)’이다. 1979년부터 시작된 미 국방성의 연례 작전으로, 내용은 간단하다. 말 그대로 전 세계를 항해한다. 단, (미국이 보기에) 과도한 해양 영유권을 주장하는 곳을 골라 지난다. 특정 국가가 자신의 바다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UN 해양법 기준으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는 곳이다. 미국은 이런 곳들을 일부러 지나며 이곳은 모두의 바다, 즉 ‘공해’임을 암암리에 선포한다. 동맹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지난 2021년에는 우리나라 통영 앞바다가 작전 구역에 포함되기도 했다.
 
Pax Americana
 
미국은 전후 세계를 설계했다. 그리고 ‘항행의 자유’는 일종의 독트린이다. 이번에 후티 반군이 막아선 것은 홍해의 항로가 아니다. 미국이라는 국가가 만들어낸 국제 질서를 막아선 것이다. 미국이 전 세계의 확전 우려에도 불구하고 후티를 친 이유다. 결국 미국은 후티 반군을 국제 테러단체로 재지정했다. 3년 만이다.
 
후티 반군
 
예상외로, 후티 반군은 생각보다 강하다. 지금까지 네 차례에 걸친 연합군의 폭격에도 그들은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9년째 전시 태세를 유지하고 있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예멘 내전이다. 말이 내전이지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대리전이다. 후티 반군은 이란의 지원을 받으며 사우디아라비아의 공습을 9년째 받아내고 있다. 연합군의 폭격 몇 차례에 백기를 들 체급이 아니다.
 
이슬람 세계의 시각

다만, 아무리 체급에 자신이 있더라도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과 싸움을 시작한 후티 반군의 행보가 합리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들의 세계관으로 보면 명분도 이득도 확실하다. 후티 반군은 친서방 정책을 편 예멘 정부에 반기를 들며 시작됐다. 종교적 신념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명을 가진 이들에게, 이스라엘의 하마스 침공은 기회다. 이들의 홍해 상선 공격은 국제 사회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지만, 이슬람 세계에서는 정반대로 비칠 수 있다. 가자지구의 참상을 목도하면서도 대놓고 나서지 못하는 중동 국가들 입장에서는 후티 반군의 깃발에 새겨진 문구가 뼈아프게 느껴질 법하다. “미국에 죽음을, 이스라엘에 죽음을.”

IT MATTERS
 
스위스에서 열리고 있는 다보스 포럼에 참석 중인 이란의 호세인 아미르압돌라히안 외무 장관이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꺼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전쟁이 멈춘다면 홍해 사태도 멈출 것이라고 밝힌 것이다. 후티 반군뿐만 아니라 레바논 무장 정파 헤즈볼라 등 이란의 지원을 받는 것으로 간주하는 이슬람 무장 세력들의 공격이 멈추려면 이스라엘이 먼저 멈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을 향한 경고일 수 있다.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말란 뜻이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바닷길의 존재는 너무 당연했고, 그래서 쉬이 잊혔다. 미국이 만든 팍스 아메리카나가 가져온 평화였다. 하지만 이런 평화의 시기는 역사상 매우 드문 현상이다. 결국 평화를 전제로 한 패러다임의 수명은 다했다. 지금 홍해의 모습이 그 증거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닷길이 위기에 봉착하자 그 중요성이 급부상하고 있다.

지금은 유조선의 길이 막혔다. 다음 차례는 무엇일까. 데이터일 수 있다. 후티 반군이 장악한 바브엘만데브 해협에는 구글 등 빅테크 기업이 깔아놓은 해저 케이블이 묻혀있다. 전 세계 인터넷 트래픽의 97퍼센트는 해저 케이블을 통해 오간다. 새로운 국제 권력 지형도를 그리려면, 그래서 바다를 먼저 봐야 한다. 지금, 바다가 몹시 소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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