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 자금이 반토막 났다

2024년 1월 22일, explained

홍콩H지수가 추락하며 ELS 손실이 커지고 있다.

ELS 투자로 원금 손실을 본 투자자들이 1월 19일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 Chris Jung, NurPhoto,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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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H지수가 추락하며 ELS 손실이 커지고 있다. 1월 21일 은행권에 따르면 국내 5대 은행(KB국민, 신한, 하나, 우리, NH농협은행)이 판매한 홍콩H지수 ELS가 올해 들어 19일까지 2300억 원의 원금 손실을 확정했다. 1월 8일부터 첫 원금 손실이 확정됐는데, 11일 만에 2000억 원이 넘은 것이다. 손실률은 52.8퍼센트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올해 상반기에 만기가 끝나는 ELS가 10조 원이 넘는다. 상반기에만 손실이 6조 원대까지 불어날 수 있다.

WHY NOW

투자 피해자들은 은행이 원금 손실 위험을 충분히 알리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평생을 거래한 주거래 은행에서 예금, 적금보다 더 좋은 상품이 있다고 권유해서 가입했다는 것이다. 금융감독원은 은행이 투자자에게 투자 위험을 충분히 고지했는지 조사하고 있다. 사실상 사기당한 일부 투자자를 제외하고 투자자, 은행, 금융 당국 모두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안전해 보이는 도박

주식 투자는 잘하면 돈을 벌 수 있지만, 까닥하면 돈을 잃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시작한다. ELS는 다르다. ELS는 예금처럼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가입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따져 보면 ELS는 도박에 가깝다. 다만 돈을 잃을 확률이 낮아서 안전해 보일 뿐이다. 예를 들어 지금 삼성전자 주식이 1주에 8만 원이라고 가정해 보자. 3년 뒤 삼성전자 주식이 4만 원 밑으로 내려가지만 않으면 투자 원금을 그대로 돌려주고 예금 이자보다 더 높은 이자를 붙여서 주는 금융 상품이 있다. 삼성전자가 망할 일은 없으니, 은행에 적금을 가입하러 온 사람이라면 은행원의 권유에 솔깃할 수밖에 없다.

ELS

이게 ELS다. ELS는 ELS은 Equity(주가) Linked(연계) Securities(증권)의 약자다. 말 그대로 주가에 연계한 증권이다. 특정 기초 자산의 가격에 연계되어 투자 수익이 결정되는 금융 파생 상품이다. 기초 자산을 뭘로 정하는지에 따라 지수형(코스피 지수, 홍콩H지수 등), 종목형(삼성전자, 네이버 등), 혼합형(지수와 종목의 혼합)으로 나뉜다. 상품마다 상환 조건이 다양한데, 만기 3년에 6개월마다 조기 상환 기회가 있는 게 일반적이다.

수익 구조

실제 상품은 이런 식이다. 2021년 7월 6일 주식 시장이 종료할 때의 지수와 가격을 기준으로 홍콩H지수, S&P500, 삼성전자, 이 세 가지 중에서 향후 3년간 어느 하나라도 50퍼센트 이상 하락하지 않으면 원금과 함께 연 4퍼센트의 이자를 지급한다. 여러 지수와 종목을 섞어 다양한 상품을 만들 수 있다. 이 상품은 2021년 6월 28일~7월 5일까지 100억 원 규모로 모집했다. 만기는 3년이고, 6개월마다 최초 기준 가격보다 일정 수준만큼 떨어지지 않으면 약속된 수익률을 조기 상환한다.

2021년

기초 자산의 가격이 일정 수준만큼 떨어지지 않아야 투자자가 수익을 올리는 구조라, 주식 시장이 절정일 때 ELS에 가입하면 자칫 원금 손실을 볼 수 있다. 이런 고위험 상품에 고령의 일반 투자자들이 왜 가입했을까. 피해자들의 이야기는 비슷하다. 2021년 상반기에 주거래 은행의 부지점장이나 팀장이 예금, 적금보다 이자 수익률이 1~2퍼센트포인트 높은 상품이 있다고 권했다는 것이다. 원금 손실 위험이 있는 상품인지 모르고 가입한 사람도 있었고, 위험을 알았어도 “중국이 망하지 않는 한 손실이 없다”고 해서 가입한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가입을 주저하면 은행원은 “나도 가입한 상품”이라며 투자자를 안심시켰다고 한다. 즉, 평소 오래 거래하던 시중 은행의 책임자가 추천하는 상품이라 위험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가입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피해자들은 은행의 불완전 판매를 주장하고 있다.

홍콩H지수

이번에 문제가 된 ELS는 홍콩H지수와 연계돼 있다. 홍콩H지수는 홍콩항셍지수(HSCEI)라고도 불리는데, 홍콩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중국 국영 기업 중에서 우량 기업만 모아서 만든 지수다. 중국공상은행, 중국건설은행, 중국은행 같은 기업이 속해 있다. 언뜻 보기엔 안정적인 지수 같지만, 홍콩H지수는 미국과 중국의 갈등으로 인해 변동성이 심하다. 홍콩H지수는 2021년 2월 1만 2000선을 넘었지만, 그해 말 8000대까지 떨어졌다. 그리고 2024년 1월 현재 5100대까지 내려왔다. 2021년 홍콩H지수가 한창 높을 때 ELS에 1억 원을 투자했다면 3년 만기가 돌아오는 2024년에 약 4000만 원을 받게 된다.

만기

홍콩H지수가 고점이었던 2021년에 판매된 ELS의 만기가 돌아오고 있다. 지난해 11월 기준 홍콩H지수 ELS의 총 판매 잔액은 19조 3000억 원이었는데, 그중 약 80퍼센트인 15조 4000억 원의 만기가 올해 돌아온다. 3년 사이에 주가는 반토막이 났다. 일반 주식 투자였다면 주가가 오를 때까지 버텨볼 수도 있겠지만, ELS는 만기가 있어 그럴 수도 없다. 홍콩H지수 ELS에 투자한 사람이 원금을 회수하려면 ELS 만기 전까지 홍콩H지수가 3년 전 수준으로 다시 올라야 한다. 그런데 미국과 중국의 경제 갈등, 중국 경제 둔화 등을 고려하면 지수가 급상승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 원금 손실이 예상된다.

금융감독원

은행 말을 믿었다가 노후 자금을 다 날렸다는 사람이 속출하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시중 은행이 ELS 상품을 팔 때 투자자들에게 원금 손실 위험이 있다는 걸 충분히 알렸는지 여부를 파악하고 있다. 불완전 판매가 입증될 경우, 판매사가 손실액 일부를 배상해야 할 수 있다. 은행들은 투자자의 자필 서명을 받고 녹취도 했다면서 금융소비자보호법상 절차를 지켜 판매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투자자들이 은행에서 몇십 장짜리 투자 설명서를 꼼꼼히 읽어 보고 가입했을지는 의문이다. 또한 은행이 투자 위험을 알렸다고 해도 전문 투자자가 아닌 일반 고령 투자자에게 고위험 상품을 권유한 것도 문제다.

IT MATTERS

이번 사태의 모든 책임이 은행에만 있는 건 아니다. 투자 위험성을 충분히 설명받지 못하고 가입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투자자에게 1차 책임이 있다. 홍콩H지수 ELS 가입자는 10만 명인데, 그중 90퍼센트 이상이 ELS 재가입자다. 과거 ELS로 투자 수익을 올렸을 때는 문제 제기를 하지 않다가 원금 손실이 나자 불완전 판매를 주장하는 셈인데, 피해자들은 예금이나 적금 갱신처럼 생각했다는 입장이다. 이들에게 어느 정도의 비율로 배상을 할지가 쟁점이다. 금융 당국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2019년 독일 국채 금리와 연계한 파생결합펀드(DLF) 사태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당시 펀드를 판매한 측은 “독일 국채 금리가 -0.2퍼센트 밑으로 떨어진 적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다”며 상품을 팔았다. 그러다 독일 국채 금리가 -0.6퍼센트 이하로 떨어지면서 투자자들은 원금을 모두 잃었다. 당시 금감원은 은행의 고난도 금융 상품 신탁 판매를 금지했다. 은행은 예금 같은 원리금 보장 상품을 주로 취급하기 때문에 투자자가 오인할 수 있는 고위험 상품의 판매를 자제시킨 것이다. 그러나 은행권이 강하게 반발하면서 판매 한도 제한과 소비자 보호 조치 강화를 조건으로 파생 상품을 팔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4년 뒤 이번 ELS 사태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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