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 공주 디자인
잡스의 디자이너 에슬링거는 그 선언에 화답했다. 그가 확립한 ‘
백설 공주 디자인 언어’에는 누가 봐도 확연하게 디터 람스의 영향이 묻어나 있다. 에슬링거가 만든 디자인 원칙은 90년대 이전 애플 제품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다. 밝은 회색과 베이지 색상을 기본으로, 군더더기 없는 외형에 얇은 직선이 제품 표면을 채운다. 매킨토시 시리즈도 바로 이러한 원칙하에 만들어졌다. 군더더기 없이 제품의 이해를 돕도록, 제품이 더 유용하도록.
IT MATTERS
디터 람스 디자인의 뿌리는 바우하우스에 있다. 파울 클레, 오스카 슐레머, 바실리 칸딘스키, 라슬로 모호이 너지 등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이 교수진을 맡았던, 20세기의 예술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1919년에 설립되었다가 나치의 박해로 1933년 폐교된다. 이 짧은 역사 동안, 이곳의 목표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예술이었다. 대량 생산이라는 시대적 변화에 맞는 아름다움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디터 람스의 디자인에도 이런 정신이 녹아들어 있다. 이런 철학을 바탕으로 탄생한 디자인이야말로, 세계를 바꾼 혁신의 제품에 어울리는 것 아닐까.
하르트무트 에슬링거의 뒤를 이은 애플의 디자인 심장, 조너선 아이브스도 디터 람스를 흠모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오랜 침체기를 지나 iMac G3으로 화려하게 부활한 매킨토시의 제2의 전성기는 조너선 아이브스의 디자인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 디자인 철학은 스티브 잡스의 애플 복귀를 알렸던 iMac 이후 Mac이 추구했던 전략과 닮아있다. 혁신적으로, 그러나 대중에게 더 가까이.
잡스는 피카소가 남긴 “유능한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Good artists copy, great artists steal)”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PARC의 GUI를 사 왔고 디터 람스의 디자인을 훔쳤다. 그리고 그게 혁신이 되었다. 팀 쿡은 훌륭한 관리자이며 리더이지만, 잡스 같은 기획자는 아니다. 애플은 혁신을 잃어버렸다는 평가에 직면해 있다. 지금 애플에 부족한 것은 최첨단의 기술이 아닐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