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인 한도를 풀면 동네 책방이 살아날까?

2024년 2월 5일, explained

동네 책방의 페인 포인트는 할인 한도가 아니다. 공급률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독립 서점 시티 라이트(City Lights). 사진: Robert Alexander,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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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1월 22일 열린 민생 토론회에서 동네 책방 살리기 정책을 내놨다. 현행 도서정가제에 따라 책은 정가의 10퍼센트 이내로만 할인해 판매할 수 있는데, 영세 서점에 한해 할인 한도 제한을 풀어 주겠다는 것이다. 동네 책방이 대형 서점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책을 판매할 수 있게 해 동네 책방의 경쟁력을 키우겠다는 취지다.

WHY NOW

정가 1만 원인 책이 있다. 온라인 서점은 도서정가제의 할인 한도인 10퍼센트까지만 할인이 가능해 9000원에 판매한다. 이 책을 동네 책방이 8000원에 팔게 된다면 영업에 도움이 될까? 질문부터 틀렸다. 할인 한도를 풀어 줘도 8000원에 팔 수 없다. 공급률 때문이다. 책 유통 과정을 살펴보면 이번 정책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알 수 있다.

도서정가제

책은 단순한 소비재가 아니다. 공공재적 요소가 있다. 정부는 대형 서점이 과도한 할인 판매로 중소 서점을 고사시키지 못하도록 도서의 할인 판매를 규제하는 도서정가제를 시행한다. 현행 도서정가제에 따라 서점은 책을 팔 때 직접 할인은 10퍼센트, 간접 할인은 5퍼센트까지 할 수 있다. 그래서 온라인 서점은 정가에서 10퍼센트를 할인해 판매하고, 정가의 5퍼센트를 포인트로 적립해 주거나 그 상당의 굿즈를 준다.

양은 냄비

도서정가제를 위반하면 최대 500만 원의 과태료를 물게 된다. 2015년 출판사 문학동네가 김훈 작가의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를 출간하며 사은품으로 양은 냄비와 라면을 주는 이벤트를 했다. 책 정가는 1만 5000원이었다. 직접 할인은 1500원, 간접 할인은 750원이 최대치다. 그런데 사은품의 제조 원가가 2334원(양은 냄비 1800원, 라면 534원)이었다. 사은품 가격이 정가의 5퍼센트를 넘겨 도서정가제 위반 판정을 받았다.

대형 서점

서점은 출판사에서 책을 공급받아 소비자에게 판매한다. 출판사에서 책을 공급받을 때 정가의 몇 퍼센트로 받는지를 ‘공급률’이라고 한다. 대형 서점은 60~70퍼센트로 받는다. 즉 서점의 마진율은 30~40퍼센트다. 그런데 소비자가 당연하게 여기는 10퍼센트 할인과 5퍼센트 포인트 적립, 무료 배송에 들어가는 비용을 서점이 부담한다. 이거저거 다 떼고 나면 대형 서점이라고 이윤을 많이 남기는 건 아니다.

소형 서점

그런데 소형 서점은 저 가격에 책을 갖고 오지 못한다. 정가의 70~80퍼센트로 가져온다. 동네 책방은 대형 서점과 달리 출판사와 직거래하지 않고 중간 도매상 역할을 하는 총판을 통해 책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유통 과정에 한 단계가 더 들어가니 비용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출판사와 직거래를 한다 해도 거래 수량이 적어 출판사가 대형 서점과 같은 조건을 제시하지 않는다.

한 달

서울 도심에서 15평짜리 책방을 운영하려면 한 달에 책 몇 권을 팔아야 할까. 월세 150만 원, 공과금 20만 원, 주말 없이 주 6일 혼자 일하는 책방 주인의 월급을 올해 최저 임금인 206만 원이라고 가정하자. 정가 1만 5000원짜리 책을 공급률 80퍼센트로 받을 경우, 하루에 50권을 팔아야 본전이다. 책방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보통은 하루에 30권을 팔기도 어렵다.

북토크

그래서 동네 책방은 북클럽을 열고 북토크를 열고 워크숍을 열고 커피를 팔고 문구를 판다. 책방 오픈 전의 경력을 살려 원고 교정·교열이나 편집 디자인 같은 외주 용역을 하기도 한다. 책만 팔아서는 먹고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책방을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택한 방법인데, 때로는 이 영역이 더 커져서 주객이 전도되기도 한다. 동네 책방을 하기가 이렇게 버겁다.

정책

다시 정부의 대책으로 돌아가자. 영세 서점은 도서정가제 예외가 돼도 애초 공급률이 높아서 책값을 더 내릴 수 없다. 정가 1만 원짜리 책을 공급률 80퍼센트로 가져오니, 책 한 권을 팔면 2000원이 남는다. 10퍼센트를 할인해 주면 1000원이 남고, 5퍼센트 적립을 해주면 500원이 남는다. 카드 수수료는 별도다. 이번 정책은 영세 서점 활성화 대책이라기보다 ‘눈물의 반값 할인’을 가능하게 하는 악성 재고 처리 대책에 가깝다.

IT MATTERS

도서정가제의 취지는 대형 서점이 과도한 할인 행사를 펼쳐 규모의 경제를 이루지 못해 가격 경쟁에 취약한 중소 서점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 제도가 표면적으로는 잘 작동하고 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공급률 차등화로 반쪽짜리에 그치고 있다. 소비자가 지불하는 가격뿐만 아니라 공급자가 제공하는 가격에 대해서도 합리적인 기준이 필요하다. 지금 동네 책방에 필요한 건 도서정가제 예외가 아니다. 공급률 표준화다.
 
이연대 에디터
#책 #다양성 #정책 #explai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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