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이 없는 직장
1화

갑을노동의 사회

한국 노동의 슬픈 현실


계약은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 사이에 맺어진 법적 구속력이 있는 약속이다. 근로계약도 계약의 한 유형으로 사용자와 근로자가 서로 대등한 주체로 참여할 때 정당성이 확보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사용자와 근로자의 근로계약(관계)은 ‘갑을 관계’라는 불평등한 구조로 인식된다. 노동이 개인의 자아실현을 위한 것이라는 주장은 현실과 유리된 선언적 위로에 가깝다. 이윤 추구와 경쟁의 원리로 인해 근로자는 사용자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 것이 한국 사회의 슬픈 현실이다.

2014년에 이어 2018년 4월, 항공사 오너 일가의 ‘갑질 경영’ 문제가 다시 불거져 사회적 이슈가 됐다. 기업의 갑질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다. 갑질과 관련된 다양한 기업의 사례들을 보면 과연 근로자들이 인권을 보장받으며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회사가 실제로 있을까라는 의문마저 든다.

이 책에서는 현재 한국 노동의 슬픈 현실을 ‘갑을노동’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갑을노동은 ① 근로계약에 규정된 노동, 사업 조직의 질서 유지에 필요한 지배·종속을 넘어, ② 근로자의 건강, 정서와 감정, 양심과 사상으로까지 관리·감독 및 지배·종속의 대상이 불합리하게 확장돼, ③ 종국에는 근로자의 인권 침해로 이어지는 노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갑을노동은 실제 노동 현실에서 세 가지 특징을 보인다. 첫 번째는 ‘절대적 갑을노동’이다. 법이나 계약 등 사회의 제반 형식에 의해 정해진 항구적 갑을 관계를 말한다. 대부분의 회사에서 근로계약서에 사용자를 갑, 근로자를 을이라고 쓴다. 근로계약에서 갑을 관계는 계약 주체의 명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과 노동 사이의 수직적 구조를 반영하고 있다. 갑을 높은 지위, 을을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 구분하면서 은연중에 우열 관계를 정하고 있다. 절대적 갑을노동은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고착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두 번째는 ‘상대적 갑을노동’이다. 인간관계가 그물처럼 엮여 있는 현대 사회에서 갑과 을의 위치는 절대적이지 않으며 위치가 바뀌는 순간 갑을 관계는 전복된다. 나는 누군가에게 갑이지만 동시에 다른 누군가의 을이다. 갑질은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의 전유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누구나 상황에 따라 비슷하게 행동할 수 있다. 편의점 사장에게 갑질을 당하던 아르바이트 직원이 일을 그만두자마자 편의점 사장에게 갑질을 하는 진상 고객으로 변하는 모습을 연출한 어느 코미디 프로그램은 상대적 갑을노동의 단면을 잘 보여 준다.

세 번째는 ‘은폐적 갑을노동’이다. 이는 오랫동안 당연시해 온 문화와 개개인이 체화한 습관을 통해 무의식적, 비의도적으로 표출되기 때문에 갑질로 인식되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가해자는 갑질을 업무에 필요한 과정이라고 여기고, 피해자는 그것의 불합리함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현재의 노동 현실이다. 한국의 직장에 배어 있는 특유의 군대 문화는 훌륭한 직장인을 키워 내는 관행으로 치부되곤 한다. 이는 갑질에 해당하는 전형적인 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합리화시키고 은폐한다. 당하는 입장에 놓인 사람은 조직에 적응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 속에서 그 상황을 체념하고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가야 한다.

 

힘든 일터와 삶에 대한 이야기


근로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유지·보존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신체적 안전, 정서적 안정, 자존감 등을 보호받아야 한다. 그러나 갑을노동은 갑이 을에 비해 절대적 우위에 있는 불합리한 계약을 넘어 근로자의 인권 자체를 훼손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객관적으로 확인이 불가능한 근로자들의 신체적 피로 및 정신적 스트레스 또한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사회적 불안 요소다.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1], 우울증, 조울증, 분노 조절 장애, 경계성 성격 장애 등 심리적 질병으로 인해 정상적 사회생활을 지속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내적 파산[2]에 이른 근로자가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사용자와 근로자 간의 종속 관계는 늘 있었다. 그러나 최근의 갑을노동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 예의, 부끄러움마저 망각한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과거와는 양상이 다르다. 전통 사회나 산업화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을에 대한 갑의 횡포가 극단으로 치닫는 것을 막아 주는 여러 가지 이념적 장치들이 존재했다. 유교적 관점에서 말하는 인정과 예절 등의 이상적 규범을 예로 들 수 있다. 유교적 관점은 을에 대한 갑의 우위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을에 대한 갑의 미덕을 지키는 역할을 해온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갑을노동은 전통적 이념과 공동체적 가치를 모두 잊고 물질 만능주의나 성과 우선주의 논리로 무장했다. 갑에게 을은 최소한의 동정심을 유발하는 노예도 아닌 존재, 즉 돈을 내고 교환할 수 있는 물건이나 성과를 내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된다.

최근에 발생한 갑을 관계의 양상은 권위주의 이데올로기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갑을 관계가 자리 잡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97년의 IMF(국제통화기금) 금융 위기였다. IMF 위기 때 우리 사회는 급격한 전방위적 구조 변동을 겪었다. IMF는 자본 자유화와 외자 유치, 금융 및 기업의 구조 조정, 공공 부문 민영화, 시장 및 기업 자유의 확대, 노동 시장 유연화 등 신자유주의 흐름에 부합하는 개혁을 요구했다.

신자유주의는 화폐로 연결된 관계를 삶의 중심에 놓고 부의 최대화를 사회적 선으로 추구한다. IMF 경제 위기 당시 전 국민이 ‘나라가 망하면 나도 망한다’는 공감대 속에서 돈벌이가 안 되는 것을 과감히 정리하는 구조 조정에 동참해야 했다. 대량 실업이 발생했고 비정규직 비율이 높아졌으며 실질 임금은 하락했다. 이 과정에서 변한 것은 사회 구조만이 아니었다. 우리 내면의 의식 또한 부지불식간에 해체되고 변형될 수밖에 없었다.

사용자와 근로자의 비대칭 관계가 당연시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디까지가 근로자의 인격 침해에 해당하는지를 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현대 사회에서는 노동의 영역과 노동 외의 영역이 복합적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노동법은 기본적으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정됐다. 그러나 현대 노동 시장에서 근로자들의 고민은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가 아닌 삶의 질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행복하고 즐겁게 사는 것은 물질이나 경제적 관점으로 접근한다고 모두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갑을노동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가 당면한 문제라는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 갑을노동의 문제는 단순히 노동이나 법,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힘든 직장인들의 삶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다.
[1]
미국의 정신 분석 의사 허버트 프뤼덴버거(Herbert Freudenberger)가 처음 사용한 심리학 용어로 어떠한 일에 몰두하다가 신체적·정신적 스트레스가 계속 쌓여 무기력증이나 심한 불안감과 자기혐오, 분노, 의욕 상실 등에 빠지는 증상을 말한다. 탈진 증후군, 소진(消盡) 증후군이라고도 부른다.
[2]
여기서 말하는 근로자의 파산은 비판 이론 1세대 아도르노(Theodor W. Adorno)의 개인 파산(die Liquidation des Individuums) 테제를 배경으로 한다. 아도르노는 모든 것이 자본주의적으로 통합되는 사회에서 개인 파산이 초래되고, 개인이 죽어 버린 사회는 곧 사회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때 개인 파산은 단순히 경제적 차원의 파산이 아니라, 개인의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개별성 자체의 파산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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